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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상태의 변증법

살아가게 하는 힘

정지상태의 변증법은 근대세계의 시간의식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독일 비평가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구사했던 개념이다. 과학기술 문명의 비약적인 성장에 의해 이루어진 근대세계의 시간의식은 무엇보다 진보와 발전이라는 말로 대표된다. 전통세계가 농경사회에 기반을 둔 순환적인 시간의식에 입각해 있다면, 근대세계는 산업사회의 경제적 성장이 빚어낸 직선적이고 발전적인 시간의식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나아졌다는 ‘경험 공간’과 오늘보다는 내일이 좀더 나아지리라는 ‘기대 지평’ 속에서 이 같은 시간의식은 구현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교과서로 공부를 했던 것이 전통사회라면, 비약적으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언니와 동생의 교과서조차 같을 수 없는 것이 근대사회인 것이다.

시간의식이 이처럼 순환적인 것에서 직선적인 것으로 변화하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 대한 집단적 기억으로서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에 대한 나열일 수는 없으며, 현재라는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오는 하나의 단절 없는 선분의 형식으로 재편된다. 과거는 현재의 전사(前史)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미래도 역시 과거와 현재가 만들어지는 함수의 연장으로 상상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역사의식은 어김없이 승자들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이 문제이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하나의 연속선을 상상하며 과거를 기술하는 현재의 역사가는, 그것이 현재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간에 어김없이 승자의 시선에 입각해 있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이다. 그 속에서는 어떤 비참한 패배의 기록이라도 결국은 궁극적 승리의 초석이 되는 어떤 것이다. ‘야만의 기록이 없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고 했던 벤야민의 말도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다.

벤야민은 바로 이와 같은 시간의식의 외부를 사유하면서, 즉 균질적이고 공허하며 중단 없이 이어져오는 시간이라는 생각(예를 들면, ‘면면히 이어오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 같은 말)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면서 정지상태의 변증법이라는 말을 썼다. 승리한 과거와 보장된 미래로 구성되는 승자들의 시간의식 속에서 현재는 단지 둘 사이의 과도기일 뿐이며, 기계적인 시간 흐름의 한순간으로서의 현재에는 그 어떤 긴장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시간의 연속성을 가로지르며 등장하는 것이, 벤야민이 “현재 시간(Jetztzeit)”이라고 불렀던 패자들의 시간의식, 고통과 행복과 구원의 이미지로 대전되어 있는 메시아적인 시간의식이다.

그것은 마치 태풍의 눈처럼, 복합적인 힘에 의해 여러 방향에서 당겨져 있기 때문에 고요하게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도로 충전된 상태의 시간이며, 과거와 미래가 그 안에서 고통과 희망의 복합적인 메시지로 뒤엉켜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모습을 벤야민은 “변증법적 형상”이라고 했다. 정지상태의 변증법이란 그것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 어떤 경우에도 승리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마치 기계처럼 자신의 흐름을 지속해가는 스탈린주의 변증법과는 달리, 정지상태의 변증법은 메시아의 도래처럼, 갑자기 들이닥치는 마른하늘의 번개처럼 한밤중의 도둑처럼 그 연속적인 흐름을 폭파하며 등장한다. 이것이 벤야민이 생각했던 진정한 혁명의 이미지이다. 자기 속에서 스스로의 외부를 발견하고 그것과 투쟁하며 새로운 흐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변증법의 논리라면, 그것은 최소한 유장한 흐름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 오히려 수많은 단편적 요소들의 비약적 결합을 통해 만들어지는 열망의 에너지가 폭발 직전의 불꽃탄처럼 충전되어 있는 상태에 가깝다는 생각이, 정지상태의 변증법이라는 벤야민의 개념 안에 내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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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집필자 소개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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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 저자서영채 | cp명문학동네 도서 소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펼쳐보기

전체목차
chapter 5. 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의미작용, 기표와 기의 고정점, 꿈-작업 발화수반행위
chapter 6.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선험적 가상으로서의 물신주의적 오인 이데올로기적 전도의 효과
chapter 8. 사디즘의 아이러니, 마조히즘의 유머 사디즘과 마조히즘 마조히즘의 유머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
chapter 9. 승화될 수 없는 것들의 섬뜩함 억압적 탈승화 과잉억압과 실행원칙 억압된 것의 회귀와 섬뜩함
chapter 13. 우리가 사는 세계 밖을 사유하는 힘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패러디와 패스티시 탈근대적 사유
chapter 14. 아름다움의 기준 취미 판단과 아름다움 숭고 키치와 캠프
chapter 15. 제대로 책임지는 법 윤리와 도덕의 차이 형이상학적 책임
chapter 17. 살아가게 하는 힘 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 정지상태의 변증법
chapter 19. 냉소적인, 너무나 냉소적인 냉소주의와 키니시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chapter 20. 극작가 플라톤의 희미한 유머 극작가 플라톤 플라톤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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