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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비판의 차원

이데올로기 격파술

세상의 어떤 것도 고정불변인 것은 없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변하고 또 그런 만큼 세상의 어떤 것도 단순하기만 한 것은 없다.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이처럼 다양성과 유동성을 지니고 있는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고정시키는 일, 아직 분명하지 않은 것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빨갱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뿔 달린 도깨비 같은 게 떠오르는 것, 혹은 자판기에서 물건을 뽑기 위해 당연하다는 듯이 동전을 투입하는 행동 같은 것 등이 그 예이다. 빨갱이는 별나고 이상한 존재라는 생각,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 등이 거기에는 자명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다.

이데올로기의 효과는 이처럼 무의식적인 행동과 사고의 경우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그것이 왜 문제라는 것인가. 이데올로기가 문제시되는 것은 그것이 진짜 대상과의 만남을 가로막기 때문이고, 대상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를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작용과 연관하여 그에 대한 비판은 다음 세 가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다.

첫째, 이데올로기를 소수의 지배자들이 기획하는 대중 조작의 산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여기에서는 교활한 지배자와 그들에 의해 기만당하는 바보 같은 대중이라는 틀이 기본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즉 소수의 지배자들이 자신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고 어떤 거짓된 생각을 대중들에게 주입한다는 발상이다. 이 차원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은폐된 진실에 대한 폭로와 계몽이 주조를 이룬다.

둘째는 이데올로기를 제도적 차원의 대중 관리로 보는 것. 이것은 지배자에 의한 대중 조작이라는 첫째 시선을 좀더 정교화한 것이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어떤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기 위해 지배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장치라는 좀더 큰 틀 속에서, 학교나 군대 같은 제도적인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결과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비판도 제도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비판되어야 하는가. 그것이 소수의 정치적 지배자가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고안해낸 것이라 해서는 곤란하다. 사람들을 주민등록제도 속에 포획하고 교육과정을 통해 국민으로서의 의식을 훈육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적시하고 비판하는 것, 이것이 둘째 차원의 이데올로기 비판의 예이다.

이데올로기 비판의 두번째 시선은 첫번째 시선이 지니고 있던 음모론적인 소박함을 수정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럼에도 이 둘은 모두, 이데올로기의 형성이 대중 조작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차원에 있다.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허위의식이고 그것을 넘어서야 참되고 진정한 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은 허위의식을 넘어서기 위해 요구되는 의식에 대한 계몽을 자신의 주요 방법으로 삼는다는 생각 등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 효과 속에 들어가 있는 대중이 과연 단순한 조작의 대상이기만 한 것일까. 모든 이데올로기는 자기 자신을 향한 비판에 대해 저항력을 지니고 있어서, 폭로나 계몽이 통하지 않는 어떤 한계 지점을 만들어내곤 한다. 예를 들어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은 발생 당시부터 전두환 정부 시절 동안, 북에서 내려온 간첩과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공식화되어 있었고 정부의 통제하에 있던 언론은 제대로 된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혹은 밝히지 않을 수 있었다). 이 공식적 사실을 믿고 있는, 혹은 믿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라면 광주에서 벌어진 일의 진상을 알리는 사진이나 외신 기사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것은 조작된 사진이라고 할 것이고 또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을 오히려 불순분자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가 지니고 있는 이런 점에 주목함으로써 이데올로기 비판의 세번째 시선이 생겨난다. 여기에서 대중은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창출하는 기만이나 조작의 단순한 대상이 아니다. 이데올로기가 대중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이 이데올로기를 끌어당긴다. 즉 여기에서 이데올로기는 대중들의 무의식적 욕망이 투영되어 있는 적극적인 환상인 것이다. 이 같은 이데올로기적 효과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진실에 대한 폭로나 허위의식에 대한 계몽으로서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먹혀들기 어렵다. 그들은 이미 믿고 싶은 것만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반유대주의의 예를 들어보자.

반유대주의에서 나타나는 유대인의 형상은 다양한 측면의 반사회적 요소가 응축된 결과이다. 유대인은 정치적으로는 음모가들이고, 경제적으로는 탐욕스럽고, 종교적으로는 반기독교적이고, 도덕적으로는 음탕하고 등등. 그러니 유대인만 제거한다면 현재 사회의 모든 위험들이 사라지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올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그것이 환상에 불과한 것임은 물론이다. 유대인이 제거되고 나면 다른 어떤 존재들이 또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럼에도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사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제거해야 할 사회악으로서의 유대인이 그들의 눈앞에 버티고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유대인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이런 경우 두 유형의 대답이 돌아오곤 한다. 그것은 당신이 유대인을 잘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적극적 대답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유대인을 나쁘다고 하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소극적 대답이다.

그들이 묘사하는 사회악과 유대인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 유대인의 형상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체제의 비일관성을 봉합하기 위해 징발된 수단이라는 것이 정답이겠지만,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밝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방법이 있다면 오히려, 유대인이라는 사회악이 제거되면 좋은 세상이 될 거라 생각하는 그들 자신이 바로 사회악이라는 것, 그들의 혈관 속에 진짜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 그들이 제거하고자 하는 유대인은 바로 그들 자신이라는 것, 나아가 그들이 만들어낸 사회악으로서의 유대인의 형상 속에는 오히려 그들의 무의식적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 즉 유대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유대인이 되고자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방법 역시 보통 수준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면, 사회악 없는 사회란 불가능한 것임을, 적대와 균열이 없는 사회란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적 효과 속에 존재하고 있는 주체의 무의식적 환상을 일깨워주는 것이 이데올로기 비판의 세번째 차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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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집필자 소개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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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인문학 개념정원 | 저자서영채 | cp명문학동네 도서 소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펼쳐보기

전체목차
chapter 5. 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의미작용, 기표와 기의 고정점, 꿈-작업 발화수반행위
chapter 6.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선험적 가상으로서의 물신주의적 오인 이데올로기적 전도의 효과
chapter 8. 사디즘의 아이러니, 마조히즘의 유머 사디즘과 마조히즘 마조히즘의 유머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
chapter 9. 승화될 수 없는 것들의 섬뜩함 억압적 탈승화 과잉억압과 실행원칙 억압된 것의 회귀와 섬뜩함
chapter 13. 우리가 사는 세계 밖을 사유하는 힘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패러디와 패스티시 탈근대적 사유
chapter 14. 아름다움의 기준 취미 판단과 아름다움 숭고 키치와 캠프
chapter 15. 제대로 책임지는 법 윤리와 도덕의 차이 형이상학적 책임
chapter 17. 살아가게 하는 힘 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 정지상태의 변증법
chapter 19. 냉소적인, 너무나 냉소적인 냉소주의와 키니시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chapter 20. 극작가 플라톤의 희미한 유머 극작가 플라톤 플라톤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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