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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문학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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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판단과 아름다움

아름다움의 기준

사람들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한 사람이 느끼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해 다른 사람이 가타부타 논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질서 속에서라면 이런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세계에서 아름다움이란 독자적인 원리를 지닌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담(美談)이라는 말속에 들어 있는 아름다움은 그것의 전통적 의미를 시사해준다. 여기서의 아름다움은 오늘날의 뜻과는 달리 도덕적 착함에 훨씬 가깝다. 전통적 질서 속에서의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도덕적 선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대상이 격식에 맞고 참되고 바람직할 때 저절로 거기에서 실현되는 것, 즉 이념적인 완성태의 표현이 아름다움인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사군자가 예찬되었던 것도, 식물들이 지닌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의 차원을 넘어 정신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대상들이었기 때문이다.

가치 영역의 분화를 특징으로 지니고 있는 근대세계에서는 이런 전통적 아름다움의 이념이 존재하기 힘들다. 학문적 진리나 윤리적 선악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미의 세계도 독자적인 질서에 입각해 있다. 이것을 선명하게 정식화한 것이 칸트의 『판단력비판』이다. 여기에서 그가 다루고자 했던 것은 아름다움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판단의 문제였다. 그는 이것을 취미 판단이라고 불렀다. 진위나 선악에 대한 판단과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취미 판단에 대한 논구를 통해, 그는 어떤 것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지,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이 어떤 점에서 옳고 어떤 점에서 그른 것인지에 대해 논리를 세우고자 했다. 취미 판단의 독자성을 위해 그가 제시한 기준은 다음 네 가지이다. 사심 없는 만족, 보편적 만족, 목적 없는 합목적성, 필연적 만족.

첫째, ‘사심 없는 만족’이라는 말로 칸트가 강조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대상과의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이해관계라든지 자기만의 특수한 상황이나 성향이나 기질을 떠나 대상을 관조적인 태도로 바라볼 때, 그는 비로소 취미 판단에 임하는 것이며 미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쾌·불쾌의 감정과 결합되어 있는 만족에 대해 칸트는 선과 쾌적과 미 세 가지를 구분했다. 도덕적 가치로서의 선은 인간 같은 이성적 존재자에 의해 존중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쾌적함은 몸과 기질이 원하는 것이다. 호랑이가 풀보다 사슴 고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차원이라는 것이다.

세번째 요소로서의 아름다움이라는 만족감은 도덕적 관심으로부터도 벗어나고, 그와 동시에 자기 혼자만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향이나 기질로부터도 벗어나는 만족에 해당된다. 사과를 바라보면서도 먹고 싶다는 생각 없이 그 색깔과 형태와 색조 등 외관의 형식들을 바라볼 때가 곧 취미 판단에 임하는 순간인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취미 판단을,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동물적 존재자인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 했다. ‘사심 없는 만족’이 그것을 뜻하며, 이는 ‘무관심한 만족’이나 ‘관심 없는 만족’ 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둘째, 아름다움이 ‘보편적 만족’의 대상이라는 말을 통해 칸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취미 판단이 단순한 주관성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보편적인 것(시공간을 넘어서는 영구불변한 것)으로서의 미와 일반적인 것(시공간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경험적인 것)으로서의 쾌적함의 구분이다. 쾌적함은 단순한 개인적인 기호나 취향의 문제로, 이를테면 나는 흰밥보다 잡곡밥이 좋다는 수준이다. 내가 잡곡밥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칸트가 생각하는 미는 이런 주관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를테면 ‘튤립이 참 예쁘다’는 것은 말이 되지만 ‘튤립이 내 눈에는 참 예쁘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내가 튤립이 예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예쁘다고 느낄 것이라는 전제하에, 또 누구나 동의해주길 바라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이처럼, 개념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취향이나 기호의 차이를 넘어서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것으로서 누구에게나 찬성을 요구할 수 있는 수준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만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셋째, 칸트가 말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말은 역설적인 느낌을 준다. 합목적성은 어떤 것의 존재가 목적에 부합한다는 말인데 목적이 없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이런 모순을 칸트는 주관적인 합목적성이라는 말로 극복한다. 예를 들어 의자가 있다 치자. 의자는 사람이 편하게 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우리는 한 의자에 대해 그것이 목적에 얼마나 부합하는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 허리가 편하다거나 목받침이 없어 오래 앉아 있기는 불편하다는 식으로.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이런 유용성을 칸트는 객관적 합목적성이라고 했다. 하지만 튤립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가 꽃을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이 꽃의 존재 이유나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튤립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튤립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낄 때, 칸트는 그 느낌을 합목적성이라고 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튤립이라는 개념과 우리 눈앞에 있는 그것의 실상이 일치하는 듯한 느낌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것은 합목적성이되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며, 그러므로 튤립을 존재하게 만든 사람에게 묻지 않는 한 그것의 목적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이 마치 그 꽃의 존재 이유인 것처럼, 목적인 것처럼, 그래서 그 꽃의 존재가 자기 목적에 부합하는 것처럼 느낀다.

한두 사람만 이런 느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런 경우 그 대상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지니며 취미 판단의 대상이 된다. 요컨대 취미 판단을 할 때 우리는 대상에 대한 느낌 속에서 그 대상의 목적성을 소급적으로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칸트는 ‘법칙 없는 합법칙성’이나 ‘자유로운 합법칙성’이라고도 불렀다.

넷째, ‘필연적 만족’이라는 말은 ‘보편적 만족’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취미 판단은 개념이 아니라 감정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수학적인 판단처럼 정확하게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는 없다. 또 취미 판단은 대상과의 거리를 확보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하나 따져가며 거기에서 추론되는 원칙에 자기 자신의 행동을 포함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윤리적 명제와 같을 수도 없다. 하지만 취미 판단은 이런 객관적 필연성이나 실천적 필연성의 영역과는 다른 필연성, 즉 주관적 필연성을 지닌다.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자기 판단에 동의할 것이라는 전제를 지니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그런 전제 아래에서만 아름다움에 대한 취미 판단은 성립될 수 있다. 즉 내가 튤립을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나만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전제 아래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필연성의 존재에 대한 추론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에 대해 칸트가 제시하는 것은 공통 감각(sensus communis)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상식(common sense)이라는 말과는 다른 것으로서, 인간이면 누구나 공유할 수밖에 없는 감정과 감각을 뜻하는 말이다. 공통 감각에 입각할 때 취미 판단은 주관적 필연성만이 아니라 객관적 필연성을 지닐 수 있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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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집필자 소개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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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인문학 개념정원 | 저자서영채 | cp명문학동네 도서 소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펼쳐보기

전체목차
chapter 5. 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의미작용, 기표와 기의 고정점, 꿈-작업 발화수반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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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사디즘의 아이러니, 마조히즘의 유머 사디즘과 마조히즘 마조히즘의 유머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
chapter 9. 승화될 수 없는 것들의 섬뜩함 억압적 탈승화 과잉억압과 실행원칙 억압된 것의 회귀와 섬뜩함
chapter 13. 우리가 사는 세계 밖을 사유하는 힘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패러디와 패스티시 탈근대적 사유
chapter 14. 아름다움의 기준 취미 판단과 아름다움 숭고 키치와 캠프
chapter 15. 제대로 책임지는 법 윤리와 도덕의 차이 형이상학적 책임
chapter 17. 살아가게 하는 힘 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 정지상태의 변증법
chapter 19. 냉소적인, 너무나 냉소적인 냉소주의와 키니시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chapter 20. 극작가 플라톤의 희미한 유머 극작가 플라톤 플라톤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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