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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적 전도의 효과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는 보통 이념이나 주의라는 말로 번역되며 또는 독일식 발음 그대로 이데올로기라고 쓰이기도 한다. 어감은 조금 달라서, 이념이나 주의라는 말은 중립적인 느낌을 지니고 있고 이데올로기는 조금 안 좋은 느낌, 특정 집단이 억지로 만들어낸 생각의 체계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는 매우 폭넓게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그 뜻도 인간과 세계에 대해 한 집단이나 개인이 지니고 있는 체계화된 생각들이라는 식으로 매우 포괄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냥 생각들이 아니라 옳건 그르건 간에 나름의 체계를 지니고 있는 생각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의’ 자가 붙은 다양한 말들,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복지주의, 무정부주의 등등은 모두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들이다. 그리고 이런 주의 주장 들은 대개 한 개인만이 아니라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어서 이데올로기는 집단적인 생각의 형태를 지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한 개인만이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점심으로 굳이 자장면을 먹어야겠다는 친구에게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짬뽕보다 자장면이 좋다고 하는 너의 이데올로기는 뭐냐? 요컨대 체계화된 생각이라면 어떤 것도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안 좋은 어감은 특히 사람들의 평화와 행복에 커다란 해악을 끼쳤거나 끼치고 있는 집단적인 생각들, 이를테면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등과 결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이데올로기란 단지 집단적인 생각의 체계라는 뜻에 국한되지 않고 좀더 나아가 한 집단을 사로잡고 있는 잘못된 생각들, 편견과 선입견과 오류의 체계들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 경우 이데올로기는 집단적인 편견을 만들어내는 어떤 효과로 작동하게 된다. 한 대상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측면들을 제거하여 단순하고 일면적인 것으로, 그 속성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효과 속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슬로베니아의 정신분석학자 지젝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을 이데올로기적 전도의 효과라는 말로 설명했다. 여기에서 전도란 우선 순위나 앞뒤가 뒤바뀌는 것을 뜻하며 그 순간 이데올로기적인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분단 이후 우리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여기에서 공산주의자는 빨갱이라는 비칭으로 불렸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공산주의에 대해 이렇게 접근할 것이다. ‘공산주의란 뭐지?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소유의 공동성을 실현하자는 것이군. 그렇다면,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는 문제가 있고, 또 이런 점은 사줄 만한 것이군.’ 그러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공산주의 혹은 빨갱이는 이미 근본적인 악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래서 ‘빨갱이란 누구(무엇)인가’가 정상적인 질문이라면 ‘누가 빨갱이인가’는 이데올로기적 질문이다.

첫번째 질문에서 빨갱이는 아직 정체가 분명하지 않아 다양한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 대상이다. 이에 비해 두번째 질문에서 빨갱이는 그 뜻을 물을 것도 없이 이미 자명한 악으로 등장하고 있다. 하나의 질문이 앞뒤가 바뀌어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되면 곧바로 마녀사냥이 뒤이어진다.

‘누가 빨갱인가’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질문은 ‘누가 나쁜 놈인가’라는 질문과 정확하게 같은 차원에 있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빨갱이(나쁜 놈)가 아니라고 항변해도 소용이 없다. 이데올로기적인 대답은 이렇게 나올 것이다. ‘너는 좋은 빨갱이다.’ 즉, 진짜 나쁜 빨갱이, 나쁜 빨갱이, 조금 나쁜 빨갱이, 보통 빨갱이, 어쩔 수 없어서 빨갱이가 된 좋은 빨갱이까지 수많은 빨갱이들의 종류만이 존재할 뿐, 빨갱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제기될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빨갱이라는 말의 자리에 다른 이데올로기적인 규정들, 예를 들어 검둥이, 조센징, 쪽발이, 매국노, 유대인, 중국놈, 주사파, 전교조, 유색인종, 아시아놈, 회교도, 아랍놈, 비게르만족 등등 어떤 말이 들어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처럼 의심의 여지 없이 근본적인 악으로 규정된 대상을 낳는 것을 이데올로기적 효과라 한다. 그것은 지젝의 지적처럼, 주어와 술어가 뒤바뀌는 전도의 효과에 의해 생겨나고 지탱된다. 그렇다면 이런 이데올로기적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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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집필자 소개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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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 저자서영채 | cp명문학동네 도서 소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펼쳐보기

전체목차
chapter 5. 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의미작용, 기표와 기의 고정점, 꿈-작업 발화수반행위
chapter 6.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선험적 가상으로서의 물신주의적 오인 이데올로기적 전도의 효과
chapter 8. 사디즘의 아이러니, 마조히즘의 유머 사디즘과 마조히즘 마조히즘의 유머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
chapter 9. 승화될 수 없는 것들의 섬뜩함 억압적 탈승화 과잉억압과 실행원칙 억압된 것의 회귀와 섬뜩함
chapter 13. 우리가 사는 세계 밖을 사유하는 힘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패러디와 패스티시 탈근대적 사유
chapter 14. 아름다움의 기준 취미 판단과 아름다움 숭고 키치와 캠프
chapter 15. 제대로 책임지는 법 윤리와 도덕의 차이 형이상학적 책임
chapter 17. 살아가게 하는 힘 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 정지상태의 변증법
chapter 19. 냉소적인, 너무나 냉소적인 냉소주의와 키니시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chapter 20. 극작가 플라톤의 희미한 유머 극작가 플라톤 플라톤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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