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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문학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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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와 잉여 향락

이데올로기 격파술

라캉이 발전시킨 향락(향락은 라캉이 쓴 프랑스어 단어 jouissance의 번역어이다. 그 단어가 지닌 성적 의미를 강조하여 희열이라 번역되기도 하고 그에 대한 영어 번역어 enjoyment의 예를 따라 향유로 번역되기도 하며, 번역하지 않은 채 주이상스로 쓰기도 한다)의 개념은 고통스러운 쾌락을 뜻한다. 이 점에서 향락은 프로이트가 썼던 쾌락의 개념과 구분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쾌락은 불쾌한 긴장이 없는 상태, 몸과 마음의 내부에 존재하는 고요한 평형상태를 뜻한다. 밥때인데도 위장이 비어 있다든지, 방광이 가득 차 있는 상태는 쾌락의 반대이다. 배고픔과 배설욕 같은 불쾌한 긴장이 사라지는 것, 그것이 곧 쾌락의 획득에 해당된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가장 값싸게 획득할 수 있는 쾌락에 대해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 추운 겨울날 창문을 열어놓고 이불 밖으로 발을 내밀고 견디다가 이불 속으로 발을 끌어당기는 일, 그것이 가장 싸게 얻을 수 있는 쾌락이라고. 긴장에서 이완으로 가는 것이 곧 쾌락의 획득인 셈이다. 그것은 모든 유기체들이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성향이어서 프로이트는 이를 쾌락원칙이라고 불렀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논의를 바탕으로, 향락이라는 개념을 통해 쾌락원칙 너머의 세계에 대해 접근하고자 했다. 쾌락원칙의 관점에서 본 주체의 형상은 매우 절도 있고 금욕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음식을 먹더라도 몸에 좋은 음식의 종류를 가려가며 적당히 먹는 절제력 있는 사람을 상상하면 되겠다. 하지만 향락은 경우가 다르다. 절도 있는 이완 속에서가 아니라 과도함과 위반과 한계를 넘어서는 것 속에 있는 것이 향락이다. 그러므로 향락은 그 자체가 역설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다. 향락이라는 기쁨은 모든 것이 적절하게 갖추어진 상태와는 달리 과잉과 잉여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어서, 거기에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대로 먹었다고 할 수 있으려면, 곧 먹는 일에서 향락을 누렸다고 하려면 어느 정도라야 하는가. 평소의 내 식사량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적당한 양의 음식을 꼭꼭 씹어 먹는 차원이 아님은 당연하다. 목구멍까지 음식이 차올라서 칼을 들이대도 더이상은 못 먹겠다고 할 만큼 먹는 일, 그것이 먹는 일의 향락에 해당된다. 그것은 기쁨이고 쾌락이되 고통스러운 쾌락이다. 향락은 언제나 이처럼 과도함과 넘침 속에서만 존재한다. 향락은 잉여 속에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서 잉여를 제거하려 하면 잉여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향락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절도 있고 합리적인 기쁨은 향락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향락과 잉여 향락이 지닐 수밖에 없는 역설이다.

향락은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의 개념과 나란히 놓여 있다. 주체의 의지나 쾌락원칙과는 무관하게 작동하는 일그러진 세계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라캉이 정식화해놓은 충동의 틀은 이렇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데도 내가 지금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충동의 회로 속에 있다. 고통스러운 쾌락으로서의 향락도 마찬가지다. 배가 터질 지경이어서 먹는 것이 더이상 쾌락일 수 없는데도 나는 지금 먹고 있는 중이다. 담배를 끊어야지 끊어야지, 어떻게 하면 담배를 끊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나는 지금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충동이자 향락의 차원이다.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데올로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데올로기는 그럴듯한 논리와 합리성이라는 외관을 지니고 있지만 언제나 그것을 넘어선다. 대중들을 견인해내는 이데올로기의 힘은 언제나 논리가 아니라 그 너머에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이데올로기는 향락과 충동의 내적 질서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 향락 속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논리적 비판도 수용되기 어렵다.

이를테면 반유대주의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곧 유대인이 그런 사악한 존재가 아니고 그저 조금 다른 문화를 지니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라는 것을 수긍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반유대주의는 고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사악한 존재들이니까. 그런 우스꽝스러운 동어반복이 이데올로기적 향락의 형식 속에 내재해 있다. 그들은 지금 이데올로기를 즐기는 중이다. 그러니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흡사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한참 가지고 놀고 있는 장난감을 포기하게 하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그러니 방법은 없다. 빼앗는 수밖에. 이데올로기가 지니고 있는 이런 터무니없는 속성을 우리는 라캉의 향락이라는 개념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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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집필자 소개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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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인문학 개념정원 | 저자서영채 | cp명문학동네 도서 소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펼쳐보기

전체목차
chapter 5. 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의미작용, 기표와 기의 고정점, 꿈-작업 발화수반행위
chapter 6.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선험적 가상으로서의 물신주의적 오인 이데올로기적 전도의 효과
chapter 8. 사디즘의 아이러니, 마조히즘의 유머 사디즘과 마조히즘 마조히즘의 유머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
chapter 9. 승화될 수 없는 것들의 섬뜩함 억압적 탈승화 과잉억압과 실행원칙 억압된 것의 회귀와 섬뜩함
chapter 13. 우리가 사는 세계 밖을 사유하는 힘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패러디와 패스티시 탈근대적 사유
chapter 14. 아름다움의 기준 취미 판단과 아름다움 숭고 키치와 캠프
chapter 15. 제대로 책임지는 법 윤리와 도덕의 차이 형이상학적 책임
chapter 17. 살아가게 하는 힘 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 정지상태의 변증법
chapter 19. 냉소적인, 너무나 냉소적인 냉소주의와 키니시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chapter 20. 극작가 플라톤의 희미한 유머 극작가 플라톤 플라톤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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