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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문학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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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된 것의 회귀와 섬뜩함

승화될 수 없는 것들의 섬뜩함

프로이트의 체계 속에서 억압의 개념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억압은 신경증을 초래하는 핵심적인 기제이거니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자체가 신경증 연구로부터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억압된 기억은 특별한 이유로 인해 인지 수준 밑으로 억눌려 있다는 점에서, 기억의 힘이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보통의 망각과 구분된다. 억압된 것들의 특성은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히스테리와 강박증으로 대표되는 신경증은 억압된 것들이 회귀하면서 만들어낸 여러 증상들로 표현된다. 몸 자체에는 이상이 없는데도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거나 비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다양한 형태의 히스테리성 정신신체증 그리고 강박증과 우울증, 공포증 등이 그것이다. 그 모두가 억압된 것의 회귀가 만들어내는 증상들이다. 이와 같은 억압된 것의 회귀는 다양한 장애와 증상을 초래하지만 이것이 단지 개인의 경험 세계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억압이라는 기제 자체가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 특정한 집단이나 사회 일반으로, 또는 인류의 진화나 문화적 성장의 역사 전체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억압된 것의 회귀는 기이하고 일그러진 모습과 정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정서적 반응을 프로이트는 섬뜩함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때로 기이하고 낯설고 끔찍하며 더러는 소름끼치게 무시무시한 것이기도 하다. 독일어의 섬뜩함을 뜻하는 Unheimliches은 친숙함을 뜻하는 Heimliches에 부정의 접두어 ‘un-’이 붙어 반대말로 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말들의 어원과 용례에 대한 추적을 통해, 서로 반대되는 이 두 단어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섬뜩함이란 한때 매우 친숙했지만 이제는 더이상 친숙할 수 없게 된 어떤 것, 한 개인이 자기의 성장 과정을 통해 결별하게 된 어떤 것, 또는 인류 전체가 진화나 문화의 발전 과정을 통해 초극해버린 어떤 것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주는 느낌이라고 했다. 친숙함과 섬뜩함 사이에 놓여 있는 부정의 접두사는 억압의 표지인 셈이며, 바로 그 억압이 우리에게 섬뜩함이라는 정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자정이 되면 어둠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인형들이 있다 치자. 동화나 어린이들의 세계에서라면 신나고 즐거운 일이겠지만 어른의 세계에서라면 그것은 공포나 경악의 대상일 것이다. 또 모든 사물들에 영혼이 있다는 생각은 고대 세계에서 지역을 초월해 드러나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 나무가 사람의 말을 하고 바위도 생명이 있어 숨을 쉬고 있다면 어떨까. 한쪽에서는 친근한 것이 다른 쪽에서는 섬뜩한 것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동화와 공포물의 차이라고 해도 좋겠다. ‘un-’이라는 억압의 표지가 그 두 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마르쿠제에게 있어 예술의 세계,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는 무엇보다도 억압된 것의 회귀가 이루어지는 장이었다. 한 개인의 차원에서도 인류 역사의 차원에서도 그러했다. 그래서 그에게 예술적 상상은 실패한 해방과 배반당한 약속에 관한 집단적인 무의식의 기억을 살려내고 억눌려버린 유토피아의 꿈을 회귀케 하며, 나아가 리비도의 확대에서 생기는 억압 없는 승화의 가능성과 해방된 에로스의 자유를 깃들이게 할 수 있는 장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초현실주의와 무조음악을 예시하며 예술적 상상력의 의미에 대해 역설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과잉억압과 현실의 부자유에 대한 저항이자 비판을 지칭하고 있지만, 종국에는 이성과 행복, 자연과 인간, 삶과 죽음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세계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 세계를 향한 열망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자주 꺾이고 억눌리곤 했다. 하지만 그런 실패와 억압의 기억은 집단적 무의식을 통해 예술적 상상력 속으로 되돌아온다. 때로는 친근하고 익숙한 모습으로 때로는 매우 그로테스크하게 일그러지고 훼손된 모습으로, 섬뜩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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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집필자 소개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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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인문학 개념정원 | 저자서영채 | cp명문학동네 도서 소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펼쳐보기

전체목차
chapter 5. 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의미작용, 기표와 기의 고정점, 꿈-작업 발화수반행위
chapter 6.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선험적 가상으로서의 물신주의적 오인 이데올로기적 전도의 효과
chapter 8. 사디즘의 아이러니, 마조히즘의 유머 사디즘과 마조히즘 마조히즘의 유머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
chapter 9. 승화될 수 없는 것들의 섬뜩함 억압적 탈승화 과잉억압과 실행원칙 억압된 것의 회귀와 섬뜩함
chapter 13. 우리가 사는 세계 밖을 사유하는 힘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패러디와 패스티시 탈근대적 사유
chapter 14. 아름다움의 기준 취미 판단과 아름다움 숭고 키치와 캠프
chapter 15. 제대로 책임지는 법 윤리와 도덕의 차이 형이상학적 책임
chapter 17. 살아가게 하는 힘 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 정지상태의 변증법
chapter 19. 냉소적인, 너무나 냉소적인 냉소주의와 키니시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chapter 20. 극작가 플라톤의 희미한 유머 극작가 플라톤 플라톤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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