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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은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와 아도르노가 함께 쓴 책의 제목이다. 두 사람은 모두 유대계 독일인들로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연구소에서 함께 연구 활동을 했다. 그들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제2차세계대전 와중에 이 책의 원고를 만들었다. 책은 전쟁이 끝난 후 1947년 암스테르담에서 간행되었으며 그후 20여 년간 독일의 지성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왜 계몽이라는 개념 뒤에 변증법이라는 말이 붙었는가.
계몽은 합리적인 근대 사유의 핵심으로서, 근대 이전의 미신적인 사유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힘이다. 막스 베버는 이 힘을 탈마법화된 사유라고 지칭했다. 이는 비합리적인 미신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라는 말이다. 그 어떤 신비적인 생각도 허용하지 않은 채, 인간이 지닌 합리적인 판단력과 실증적인 정신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곧 계몽적 사유이고 그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이 계몽이성이다. 이런 뜻에서 계몽이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세계의 정신적 기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세계를 전쟁의 광풍으로 몰아갔던 파시즘의 미친 힘을 확인하면서 이 책의 저자들이 목격했던 것은 바로 그 계몽이성의 한계였다. 그것은 현대 문명 자체가 지닌 한계이기도 했다.
중세의 신학과 절대왕정의 압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힘이었을 때 계몽이성은, 외부의 어떤 권위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스스로의 지적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합리적 판단력으로 존재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해방을 이루어낸 계몽이성이 근대세계의 유일한 정신적 권위로 군림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인간 중심의 사유에만 국한되는 것으로서의 이성은 점차 사회적 유용성이나 물질적인 계산 가능성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런 모습으로 전화됨으로써 계몽이성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인간 해방의 잠재력을 잃어버린 채 단순히 주어진 목표를 향해 생각 없이 나아가는 도구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세계와 삶에 대한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사유를 대신하여 골격뿐인 논리가 등장하고,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상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접근을 거부하는 실증주의적인 정신이 전면화된다. 이러한 면모는 무엇보다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계몽이성의 토대가 인식과 행동의 주체로서의 인간인 한에 있어, 그 이외의 것은 모두가 주체로서의 인간 앞에 놓여 있는 단순한 대상이 되어버린다. 자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간 중심적 사유 앞에서 자연은 더이상 마음의 고향일 수도 없고 또한 미지의 힘이 존재하고 있는 거룩한 곳일 수도 없다. 그저 지배와 개발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초라한 원재료의 상태가 된다. 계몽이성에게 자연은 곧 지배와 개발의 대상일 뿐인 것이다.
지배의 논리로 전화된 계몽이성은 자연을 대상화했지만, 자연의 대상화는 인간의 대상화로 이어진다. 이것은 지배의 논리로 전화된 계몽이성이 초래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인간의 자연 지배는 인간의 자기 지배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를 절묘하게 포착했다.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했던 세이렌은 계몽이성에 의해 퇴출당한 자연의 모습이고, 또 그 노랫소리를 듣기 위해 자신의 몸을 마스트에 묶어놓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은 근대인의 전형으로 파악된다. 이런 방식으로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내는 오디세우스의 일화는 자기보존을 도모하는 계몽이성의 기본적인 전략과 결과를 보여준다.
외부에 있는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내부의 자연(곧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 즉 인간의 자연 지배는 자기 자신의 본성에 대한 억압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인간은 자연 지배의 대가로 죽음과 같은 고독과 소외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체이고자 했던 인간이 자연뿐 아니라 스스로를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며,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에 다름아니다. 수용소에서 냉정하게 목적합리적으로 인간들을 관리하며 수백만을 학살한 파시즘의 광풍은 자기 지배의 합리성, 즉 목적합리성이 초래한 비합리성의 상징적인 표현이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대상화함으로써 자기 자신까지 지배와 통제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계몽이성의 모습, 미신과 신화적 사유를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면서도 새로운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됨으로써 그 자신이 다시 신화가 되어버리는 계몽이성의 모습에 대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변증법은 이처럼 모순과 역설이 발생하는 지점을 포착해내는 기제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여 멀리 있는 자식과 소식을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감탄에 대해, 기차와 기선이 없었으면 당신의 아들이 그렇게 멀리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대답을 맞세워놓으면서 『문명 속의 불만』의 프로이트가 지적하고자 했던 문명의 역설도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이성이 봉착해버린 역설적인 지점에 대한, 곧 신화가 되어버린 계몽과 비합리성이 되어버린 합리성에 대한 표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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