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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성숙한 어른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서사시와 구분된다. 서사시의 주인공들은 신들의 보호 아래 있다는 점에서 어린아이와도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보호자로서의 신들이 더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자신의 이상을 지니고 세계 속으로 뛰어드는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런 어린아이일 수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이상을 고스란히 세상 속에서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청춘 또한 소설적 시선의 주인공일 수 없다. 그런 청춘의 주인공은 어른보다는 아이에 가깝다. 완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믿음이 세계의 질서와 부딪쳐서 깨지는 것을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혜와 통찰에 이르는 주인공이 곧 소설의 형식이 요구하는 성숙성의 표상이다. 그런 인물의 심리에 대해 루카치는 ‘마성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마성적 존재(demon)들은 초인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의 왕국과 숭배자들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이 아니다. 또한 사탄처럼 악의 화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악마도 아니다. 한때는 신이었으나 자기 영역을 잃어버리고 인간이 되지도 못한 채 배회하는 존재들, 신과 악마의 중간에 혹은 신과 인간의 중간에 가로놓여 있는 존재들이 곧 마성적 존재들인 것이다. 현실 세계의 완강한 질서에 의해 패배당하여 무력화된 고상한 존재, 즉 연약한 신성으로서의 마성적인 것은, 기성 질서에 반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승리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세계의 현재 상태에 안주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소설의 주인공, 곧 문제적 개인의 심리를 상징한다.
현실과의 대결에서 바로 이와 같은 처지에 이른 상태를 루카치는 아이러니(irony)라고 했다. 아이러니는 통상 자기 속마음과는 반대로 말을 함으로써 본뜻을 강조하는 반어(verbal irony,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져버린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 등으로 구분된다. 어떤 것이건, 아이러니는 두 대상 사이의 불일치를 기본적인 동력으로 삼는다. 소설의 형식으로서의 아이러니도 주체의 의지와 세계의 상태 사이의 불일치와 불화를 기본항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과 일치한다.
주인공이 자기의 의도를 세계 안에 고스란히 실현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서사시나 민담 같은 다른 어떤 것이 될 것이다. 반대로 세계의 문제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싸우기를 포기해버린다면 이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다. 세계의 위력과 그에 맞서는 자기 자신의 상대적인 무력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곧 소설 주인공의 심리이자 소설적 아이러니의 내용이다. 비록 승리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패배의 경험을 통해 열리는 새로운 세상이 있다. 그것이 곧 소설이라는 이야기 형식의 한복판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양상의 아이러니를 루카치는, 자기 인식과 자기 지양의 복합체라고 했고, 제2의 자연으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기성의 제도와 관습의 세계)와 그에 맞서는 제1의 자연(인간의 본성의 세계)의 대립, 혹은 세계 속에 존재하는 기성의 윤리와 창조적 개인의 윤리 사이의 갈등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루카치는 다른 예술 형식과는 달리 윤리적 주체가 소설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라고 했다. 이 경우 윤리적 주체는 도덕적이고 착하게 사는 인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반대로 기성의 도덕과 불화하고 그에 대항함으로써 자기의 본성에 대한 성숙한 통찰과 지혜에 이르게 되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윤리가 그 자체로 미학일 수 있는 장르, 그것이 곧 근대의 산물로서의 소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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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마성적인 것과 아이러니 – 인문학 개념정원, 서영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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