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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플라톤

극작가 플라톤의 희미한 유머

플라톤을 극작가라고 말하는 것은 많이 이상해 보인다. 더욱이 유머러스한 플라톤은 상상하기 어렵다. 플라톤이라는 철학자의 이미지 자체가 유머러스한 예술가와는 가장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서양철학의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선조의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유럽의 철학적 전통 자체가 플라톤 철학에 대한 각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던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은 이런 플라톤의 위상을 지칭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곤 한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이상주의적 사고에 관한 한 플라톤 철학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 사실이고 보면 화이트헤드의 이런 말도 큰 과장은 아니다.

정신적 사랑을 흔히 플라토닉 러브라고 하는 데서 잘 드러나듯이, 플라톤은 현세의 금욕과 절제를 강조했던 엄격하고 이상주의적인 사상가였다. 그의 사유에서 무엇보다 뚜렷한 것은 본질과 현상의 이분법이다. 한시적이고 유한하며 상대적인 현상들의 세계, 즉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계가 있고 그 너머에는 영원불변의 절대적 가치가 보존되어 있는 진짜 세계가 있다. 플라톤은 그 세계를 이데아의 세계라고 불렀다. 예컨대,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수많은 의자가 있지만, 이데아의 세계에는 의자의 본질에 해당하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것, 곧 의자의 이데아가 보존되어 있다.

바로 그 의자의 이데아만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으로서 참된 실체이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수많은 의자들은 모두 이것에 대한 복사물이자 껍데기,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선의 이데아, 정의의 이데아, 꽃의 이데아, 산의 이데아 등등도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상정된다. 플라톤에게는 그러한 이데아의 세계야말로 진짜 세계이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감각의 세계는 언젠가는 없어질 한시적이고 상대적인 가짜의 세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세계가 있을까. 있다면 그런 세계의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플라톤의 생각에 따르면 사람도 세계처럼 두 부분으로 나뉜다. 사멸할 것으로서의 육신과 불사적인 것으로서의 영혼이 있다. 우리가 가진 육신의 눈이나 감각으로는 이데아의 세계를 볼 수 없으며, 오로지 불멸의 실체인 맑은 영혼만이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흔히 ‘동굴의 비유’라 불리는 비유를 들어 이데아의 세계를 설명했다. 사람은 흡사 동굴에서 빛을 등지고 앉아 있는 존재와도 같다. 진짜 세계는 사람이 등지고 있는 저 뒤에 있는데, 사람은 동굴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그것이 진짜 세계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지닌 육신이 그런 착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뒤를 돌아본다면 어떻게 될까. 이데아의 세계를 정면으로 보고자 한다면 그 세계가 요구하는 존재, 즉 육신 없는 영혼이 되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다. 육체/정신, 유한/무한, 상대/절대 등이 그 양쪽 항을 이룬다. 한쪽은 진짜들의 세계이고 반대쪽은 가짜들의 세계이다. 흔히 ‘시인추방론’이라 지칭되는 플라톤의 관념도 이런 사고의 연장에 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라에는 예술가를 위한 자리가 없다. 우리의 현실적 삶이라는 것은 진짜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를 한 번 복사한 것, 그것의 그림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생각하는 ‘시인’(모든 예술가를 뜻한다)이란 이 세계를 바탕으로 그것의 복사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세계란 진짜들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로부터 두 단계나 떨어져 있는 셈이며, 우리로 하여금 진짜 세계에 이르게 하는 데 보탬이 아니라 방해만 될 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플라톤을 두고 극작가였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에서 극작가 플라톤이라는 말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은 먼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기 전 전도유망한 비극작가였음을 뜻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유행하던 비극이 청년들의 성장에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청년들이 비극 극장에 출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비극의 탄생』의 니체에 따르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때까지 자기가 썼던 비극작품들을 모두 불태워버려야 했었다. 그러고 나서야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철학자 플라톤은 말하자면 전직 비극작가였던 셈이다. 개종자가 광신도가 된다고 했다. 『국가』에서 개진된 그의 ‘시인추방론’을 염두에 두면, 이것은 그럴 법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묘한 대목이다.

다음으로, 플라톤의 저작은 대부분이 대화체로 이루어져 드라마와 소설의 복합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의 책을 읽으면 흡사 연극 대본이나 소설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철학책(비인칭 화법으로 중립적인 기술을 하고 있는 책, 예를 들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과는 매우 다른 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책이 드라마의 대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드라마는 허구라고 설정된 것임에 비해 플라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저작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인가. 좀더 파고들어가보면 이에 대한 판단도 그렇게 쉽지는 않다. 플라톤의 저작 대부분에는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크라테스와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사이의 대화나 문답, 연설 등이 저작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사전 지식 없이 읽는다면 플라톤의 책들은 영락없이 소설 아니면 희곡이다.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드는 의문은, 이런 대화와 이야기의 디테일들이 어디까지 사실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허구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씌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큰 골격은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기억에 의존한 글이라면 플라톤의 일인칭 회고 형식으로 씌어져야 마땅하다. 또 플라톤 자신이 현장에 없었던 글이라면,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플라톤에게 말했던 것을 채록하거나 회고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플라톤 글 안에는 필자로서 플라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며 그로 인해 사실과 윤색의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가 재판받던 상황을 다루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내용의 대부분이 주인공 소크라테스 한 사람의 방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글의 내용을 보면 플라톤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플라톤의 책에서 재현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연설은 기억과 회고에 의존하여 씌어진 것치고는 너무나 풍성한 디테일과 수사학을 지니고 있어 마치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녹음하여 풀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사정은 그의 다른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와 그 주위 사람들의 대화가 현장에서 속기로 필사되어 채록된 것이 아니라면, 이런 방식의 글쓰기는 다분히 각색을 거쳤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기록자이자 연출자는 물론 플라톤이다.

그러니 이런 것을 전직 비극작가 플라톤의 드라마로 읽으면 어떨까. 그것은 허구가 아니므로 사실 재연 드라마에 가까울 것이나, 어떻든 그것이 드라마나 서사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으며 플라톤이 드라마 작가라는 점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다.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던 플라톤, 그러면서도 동시에 명백한 극적 플롯과 문학적 형식을 지닌 책들을 쓴 사람으로의 플라톤, 전혀 다른 두 개의 페르소나가 하나의 이름 속에 중첩되어 있다. 어쩌면 전직 비극 시인의 억압당한 재능이 다른 방식으로 발휘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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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집필자 소개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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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인문학 개념정원 | 저자서영채 | cp명문학동네 도서 소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펼쳐보기

전체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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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사디즘의 아이러니, 마조히즘의 유머 사디즘과 마조히즘 마조히즘의 유머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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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 살아가게 하는 힘 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 정지상태의 변증법
chapter 19. 냉소적인, 너무나 냉소적인 냉소주의와 키니시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chapter 20. 극작가 플라톤의 희미한 유머 극작가 플라톤 플라톤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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