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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소크라테스적인

그리스비극에서 솟아나온 개념들

니체는 그리스의 신 디오니소스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는 일차적으로 디오니소스라는 신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격 때문이었다. 디오니소스는 그리스신화에서 매우 비중 있는 신이면서도, 올림포스 산에 사는 그리스의 다른 주신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현재의 신이 아니라, 구원을 약속하는 미래의 신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디오니소스는 하늘을 상징하는 최고신 제우스와 땅(데메테르 혹은 세멜레)의 결합에 의해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고, 헤라의 질투를 받아 어린 시절 온몸이 갈기갈기 찢겼으나, 심장만은 제우스에게 무사히 수습되어 다시 살아난 존재로 그려진다.

현재는 미치광이가 되어 반인반수의 사티로스 등의 무리와 함께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일대를 방랑하고 있으나, 그가 그리스 땅으로 다시 돌아오는 날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훗날 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자들에 의해서는, 미치광이 신, 포도주의 신, 부활한 신으로서 디오니소스가 예수와 동일한 이미지로 부각되기도 했다.

니체는 자신의 첫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이런 디오니소스의 모습을 근대에 대한 비판자의 형상으로 정립했다. 그리스비극을 매개로 했을 때 디오니소스는 아폴론과 대조적인 위상을 지니지만, 책 전체를 보았을 때 이 둘은 비극의 탄생을 위한 협력적 파트너십을 지니고 있으며, 진짜 대립관계는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 사이에서 형성된다.

니체는 그리스비극의 몰락 과정에 대해 기술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비극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요소, 즉 음악(비극에 등장하는 코러스)의 기능이 현저하게 위축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했다. 음악이 힘을 잃으면서 그리스비극의 몰락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테네의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새로운 작풍의 비극이 등장했던 것과 동시의 일로서, 음악적 요소가 사라지는 것이란 인간의 운명이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적 의미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에우리피데스의 극은 그 이전의 비극이 지니고 있던 인간의 운명적 한계에 대한 탄식 대신에, 인간의 삶을 논리로서 이해하고 접근해보고자 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을 일컬어 니체는, 에우리피데스와 동시대인이었던 철학자의 이름을 빌려 소크라테스적인 것이라고 불렀다. 논리와 이성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소크라테스적인 것이라 불렀던 것인데, 니체는 또한 이런 태도를 ‘이론적 세계관’이라 지칭했고 그에 맞서는 개념으로서 디오니소스로 상징되는 ‘비극적 세계관’을 내세웠다. 비극적 인간이 주어진 삶의 진리 속에서 행복해하는 인간이라면, 진리를 찾아 헤매다 눈이 멀어버린 인간이 이론적 인간의 원형이다.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소크라테스의 행위는 니체를 몸서리치게 했다. 일체의 모순적인 것을 배제하고 투명한 진리를 향해 가는 소크라테스적인 변증법 대신에, 니체는 부조화스럽고 모순적인 요소들을 품어 안고 함께 가는, 숭고하여 아름다울 수 있는 비극의 세계를 제시했던 것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이솝우화를 제외하면 어떤 예술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청년 비극작가였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자기 작품을 태워버리는 것이었다고 덧붙여놓았다. 비극을 내세움으로써 행해지는 니체의 소크라테스 비판은,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라는 시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근대는 인간의 인식능력으로서의 이성 개념에 기초해서만 성립된 세계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인으로서의 우리 대부분은 디오니소스의 사도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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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집필자 소개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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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 저자서영채 | cp명문학동네 도서 소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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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0. 극작가 플라톤의 희미한 유머 극작가 플라톤 플라톤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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