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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문학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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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장치의

그리스비극에서 솟아나온 개념들

니체는 그리스비극을 종말에 이르게 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 대해 비판하면서 “악명 높은 기계장치의 신”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에 의하면, 에우리피데스의 시대에서부터는 비극에서 음악(인간의 운명에 대한 공감과 탄식)이 추방되고 그 대신에 논리적인 변론과 수사학으로 이루어지는 언어들이 들어서는데, 이로 인해 비극 자체가 지니고 있는 불협화음(왜 저렇게 위대한 인간인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기구한 운명에 빠지게 되었는가)은 형이상학적 위로(이유는 알 수 없다. 오로지 신의 뜻일 뿐이다.

오이디푸스보다 훨씬 못한 존재들인 우리의 삶이야 말해 무엇하랴!)를 얻지 못하고, 논리적 해결을 통해 현세적인 위안을 얻게 되기에 이른다. 니체는 에우리피데스가 이를 위해 극의 끄트머리에 기중기 같은 장치를 통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을 등장시켜 극을 마무리짓곤 했음을 지적하고, 이를 기계장치의 신이라고 비판했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인 『시학』에 등장했던 말이기도 했다. 비극은 그 자체의 필연성과 개연성에 입각해야 하며 기계장치와 같은 외부적인 것의 개입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구사되었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건의 해결이 플롯에 입각하여 내부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썼는데 니체는 거기에 덧붙여, 모든 것을 현실논리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추가해놓은 것이다. 작가 윤대녕이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에서 “더이상 알려고 하지 말아라, 누구나 먼 것이 있어야만 산다”라고 했던 것도 동일한 맥락에 입각해 있다.

물론 알 수 있는 데까지는 끝까지 추급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저 기계장치의 신과 같은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 부조리와 불합리성을 모두 척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우리가 운명 속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그 어떤 심연을 성급하게 메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에우리피데스의 새로운 비극(또한 동시에 근대에 시작된 음악극의 세계관)을 비판하는 니체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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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집필자 소개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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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인문학 개념정원 | 저자서영채 | cp명문학동네 도서 소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펼쳐보기

전체목차
chapter 5. 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의미작용, 기표와 기의 고정점, 꿈-작업 발화수반행위
chapter 6.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선험적 가상으로서의 물신주의적 오인 이데올로기적 전도의 효과
chapter 8. 사디즘의 아이러니, 마조히즘의 유머 사디즘과 마조히즘 마조히즘의 유머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
chapter 9. 승화될 수 없는 것들의 섬뜩함 억압적 탈승화 과잉억압과 실행원칙 억압된 것의 회귀와 섬뜩함
chapter 13. 우리가 사는 세계 밖을 사유하는 힘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패러디와 패스티시 탈근대적 사유
chapter 14. 아름다움의 기준 취미 판단과 아름다움 숭고 키치와 캠프
chapter 15. 제대로 책임지는 법 윤리와 도덕의 차이 형이상학적 책임
chapter 17. 살아가게 하는 힘 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 정지상태의 변증법
chapter 19. 냉소적인, 너무나 냉소적인 냉소주의와 키니시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chapter 20. 극작가 플라톤의 희미한 유머 극작가 플라톤 플라톤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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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기계장치의 신인문학 개념정원, 서영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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