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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그리스비극을 종말에 이르게 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 대해 비판하면서 “악명 높은 기계장치의 신”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에 의하면, 에우리피데스의 시대에서부터는 비극에서 음악(인간의 운명에 대한 공감과 탄식)이 추방되고 그 대신에 논리적인 변론과 수사학으로 이루어지는 언어들이 들어서는데, 이로 인해 비극 자체가 지니고 있는 불협화음(왜 저렇게 위대한 인간인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기구한 운명에 빠지게 되었는가)은 형이상학적 위로(이유는 알 수 없다. 오로지 신의 뜻일 뿐이다.
오이디푸스보다 훨씬 못한 존재들인 우리의 삶이야 말해 무엇하랴!)를 얻지 못하고, 논리적 해결을 통해 현세적인 위안을 얻게 되기에 이른다. 니체는 에우리피데스가 이를 위해 극의 끄트머리에 기중기 같은 장치를 통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을 등장시켜 극을 마무리짓곤 했음을 지적하고, 이를 기계장치의 신이라고 비판했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인 『시학』에 등장했던 말이기도 했다. 비극은 그 자체의 필연성과 개연성에 입각해야 하며 기계장치와 같은 외부적인 것의 개입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구사되었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건의 해결이 플롯에 입각하여 내부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썼는데 니체는 거기에 덧붙여, 모든 것을 현실논리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추가해놓은 것이다. 작가 윤대녕이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에서 “더이상 알려고 하지 말아라, 누구나 먼 것이 있어야만 산다”라고 했던 것도 동일한 맥락에 입각해 있다.
물론 알 수 있는 데까지는 끝까지 추급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저 기계장치의 신과 같은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 부조리와 불합리성을 모두 척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우리가 운명 속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그 어떤 심연을 성급하게 메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에우리피데스의 새로운 비극(또한 동시에 근대에 시작된 음악극의 세계관)을 비판하는 니체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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