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인문학 개념
정원

패러디와 패스티시

우리가 사는 세계 밖을 사유하는 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기법(혹은 정신)은 패러디와 패스티시이다. 둘 모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텍스트를 변형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패러디는 원본 텍스트를 풍자적이고 희극적으로 변형함으로써 비판의식을 강조하는 것이고, 혼성모방으로 번역되곤 하는 패스티시는 원본 텍스트를 차용하는 행위 자체를 강조함으로써 예술이 지니고 있는 유희 충동을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구분된다. 비판의식이나 정치성에서는 패러디가 패스티시보다 좀더 강하고, 패스티시는 상대적으로 탈정치적인 것이라 평가된다.

이런 점으로 인해 패스티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기법으로 간주되기도 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니고 있는 비판정신의 부재나 탈정치성이라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비판 받기도 한다. 하지만 사정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패스티시가 패러디에 비해 비판의 직접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좀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유희 충동을 극대화시키는 패스티시는 그 자체가 두 가지의 비판정신을 내장하고 있다.

첫째, 패스티시는 자본주의적 근대가 지니고 있는 목적합리성과 기능주의에 대한 우회적인 저항의 측면을 내장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지니고 있는 핵심적인 원칙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얻어내는 것이다. 정해진 목표를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느냐를 따지는 방식의 사고를 목적합리성이라고 한다면, 유희 충동은 자기 밖에 어떤 목적도 상정하지 않는 자기 목적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목적합리성의 타자이거나 방해물일 수밖에 없다. 기능주의적인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유희는 어떤 실용적 기능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배제되어야 할 것에 불과하다. 유희충동을 활성화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목적합리성과 기능주의가 지배하는 세계, 실용주의 세계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패스티시는 엄숙주의에 대한 비판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유희 충동 자체가 지니고 있는 속성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는 엄숙한 어조와 고상하고 거룩한 내용으로 발화된다. 구체적 내용과 무관하게 형식 자체가 그러하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혹은 인류의 평화를 위해, 법과 정의와 질서를 위해 같은 말들이 그런 형식의 예이다. 이런 엄숙한 말들 앞에서 전개되는 유희 충동은 내용이 어떻든 간에 그 자체로 엄숙주의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자면, 2006년 서울의 촛불시위대를 향해 법질서를 강조하며 해산을 명하려 마이크를 잡은 경찰을 향해, “노래해, 노래해”라고 외치는 행위와 같은 것. 여기에서 유희 충동의 상징으로서의 ‘노래’는 그 자체로는 비정치적이지만 엄숙주의 앞에서는 강렬한 정치성을 지닐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엄숙주의와 진지함을 구분하는 일이다. 엄숙주의(rigorism)는 본래 금욕적 태도로 원칙을 엄격하게 지키려는 사고나 행위를 뜻한다. 하지만 그것이 지닌 유연성 없는 태도는 이내 딱딱한 태도 자체를 목적으로 만들고 정작 지키고자 했던 핵심은 내용 없는 공백으로 변형시켜버리곤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중심의 내용 없는 상태를 가장하기 위해 이른바 원칙이라는 것을 더 엄격하게 내세우고 지키고자 하는 태도의 단호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엄숙주의는 가식적인 진지함이 된다. 진지하지도 엄숙할 수도 없는 것이 그런 척을 하는 것, 그것이 엄숙주의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집단적인 환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그 어떤 것도 엄숙주의가 아닐 수 없다. 실상보다 외관을 가장하고, 내용 없는 형식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점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종교적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다. 내용이 그 자체로 강렬한 힘을 발휘할 때 형식은 상대적으로 유연할 수 있다. 형식과 외관에 대한 강조로서의 이데올로기는 내용적인 지배력을 상실해버린 지배집단이 의지하게 되는 공허하고 과장된 형식주의다. 그것이 곧 진지함과 구분되는 엄숙주의의 의미이다. 진지함은 존중해야 하겠지만 엄숙주의는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패스티시의 정신은 이와 같이 유희 충동에 기반을 둠으로써 목적합리성과 엄숙주의에 대한 비판과 거부를 본질적인 힘으로 지니고 있다. 진지함에 대한 교란자일 때는 경박하고 무가치한 것일 수도 있으나, 이데올로기의 실질적 내용인 엄숙주의 앞에서는 그 자체가 저항력의 훌륭한 거처일 수도 있다. 이 점에서 패스티시는 패러디와 동일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서영채 집필자 소개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펼쳐보기

출처

인문학 개념정원
인문학 개념정원 | 저자서영채 | cp명문학동네 도서 소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펼쳐보기

전체목차
chapter 5. 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의미작용, 기표와 기의 고정점, 꿈-작업 발화수반행위
chapter 6.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선험적 가상으로서의 물신주의적 오인 이데올로기적 전도의 효과
chapter 8. 사디즘의 아이러니, 마조히즘의 유머 사디즘과 마조히즘 마조히즘의 유머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
chapter 9. 승화될 수 없는 것들의 섬뜩함 억압적 탈승화 과잉억압과 실행원칙 억압된 것의 회귀와 섬뜩함
chapter 13. 우리가 사는 세계 밖을 사유하는 힘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패러디와 패스티시 탈근대적 사유
chapter 14. 아름다움의 기준 취미 판단과 아름다움 숭고 키치와 캠프
chapter 15. 제대로 책임지는 법 윤리와 도덕의 차이 형이상학적 책임
chapter 17. 살아가게 하는 힘 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 정지상태의 변증법
chapter 19. 냉소적인, 너무나 냉소적인 냉소주의와 키니시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chapter 20. 극작가 플라톤의 희미한 유머 극작가 플라톤 플라톤의 유머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서양철학

서양철학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패러디와 패스티시인문학 개념정원, 서영채, 문학동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