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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란 흔히 은폐의 형식으로 간주되곤 한다. 진짜 대상과 그것을 가리고 있는 장막이라는 형식은 다양한 형태의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구조이다.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은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원조라 할 만한 주류 마르크스주의와 지젝이 개진한 라캉주의가 구별된다.
주류 마르크스주의가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그것이 특정 계급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들은 결코 영속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만 타당한 특수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가부장제나 일부일처제, 인간 생명의 절대적 가치, 예술의 순수성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목숨보다 명예나 대의가 중요했던 시대가 있었으니 목숨이 언제나 가장 가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그럼에도 그런 가치나 개념들이 보편적인 외양을 지니게 되는 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때문이며, 그것은 일종의 허위의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보편화의 효과는 허위이자 거짓이고, 이런 거짓된 보편성을 폭로하고 그것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일이 이데올로기 비판의 핵심을 이룬다.
이에 비해, 라캉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이 같은 역사화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곳에서 작동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수행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은, 역사성을 무시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잘못된 보편화의 허상을 타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대상이 지니고 있는 진짜 핵심에 대한 접근을 회피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예를 들면 문학이 혁명에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치자. 이 경우 문학은 혁명을 위한 수단이 되기 쉽고 이 과정에서 문학성(문학다움)이 훼손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주류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문학성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부르주아 시대라는 특정한 역사적 계기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라고, 새로운 시대에는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대응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는, 문학성을 이처럼 특정 시대에 생산된 특수한 개념으로 역사화하는 것이 그것의 본질에 대한 심도 있는 사유를 제한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문학성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세계에서 문학성은 어떻게 사유되어야 하는가 등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위한 통로가 차단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질문들은 다양한 역사적 상징화를 관통하며 어김없이 제기되곤 하는 것이기에 문제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 이데올로기의 이면에서 그릇된 보편화가 은폐해버린 역사성을 찾아냄으로써 작동한다면, 라캉주의적 비판은 그것에 대한 메타비판으로서, 성급한 역사화가 회피하고자 하는 대상의 핵심에 접근하고자 할 때 효과를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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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거짓된 보편화와 성급한 역사화 – 인문학 개념정원, 서영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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