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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은 modernity의 번역어로서 현대성이라 번역되기도 한다. the modern의 번역어로는 근대와 현대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현대라는 말은 지금 우리의 시대라는 뜻으로, 동시대나 당대로 번역되곤 하는 the contemporary의 어감에 가깝고, 근대라는 말은 동시대를 포함하여, 전통사회 붕괴 이후 새롭게 생겨난 시대를 지칭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현재성을 강조할 때는 현대라는 말이, 시대 구분의 역사성을 강조할 때는 근대라는 말이 좀더 선호되고 있다. 근대성(현대성)이라는 말은 근대라는 시대가 지니고 있는 본질이나 특성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더러는 번역되지 않은 채 모더니티라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요컨대 근대성과 현대성, 모더니티는 모두 동일한 개념이다.
근대라는 시대의 규정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축적되어 있다. 크게 보아서 17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된 삶의 양식을 근대적인 것이라 한다면, 그 기원을 이루는 사건으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프랑스혁명, 산업혁명 등이 거론되곤 한다. 이에 따라, 근대적 시대의 특성으로서의 근대성은 정치나 경제, 철학과 문예 등의 차원에서 다양하게 규정될 수 있는데, 우선적으로 들 수 있는 요소는 정치적 형태로서의 국민국가와 경제적 형태로서의 자본제적 시장경제이다. 국민국가와 자본제적 시장경제는 모두 전통적인 왕조국가가 해체됨으로써 비로소 실질적인 힘으로 가시화되었다. 이를 가능케 한 상징적 사건으로는, 절대왕정을 붕괴시키고 국민주권의 개념을 최초로 확립한 프랑스혁명이 첫머리에 놓인다.
프랑스혁명의 삼대 기치로 일컬어지는 것은 자유(liberty), 평등(equality), 우애(fraternity)이다. 여기에서 자유란 자유시장의 자유, 곧 경제적 자유를 뜻한다. 자유시장이란 화폐와 계약을 통해 거래가 진행되는 공간으로서 그 어떤 신분적인 강제나 이념적인 강제도 통용되지 않는, 즉 어떤 경제 외적 강제도 통용되지 않는 공간이다. 왕의 돈과 평민의 돈과 노예의 돈이 차별받지 않으며, 누구라도 돈이 있어야 물건을 살 수 있고 빚을 지면 갚아야 하는 것이 자본제적 시장 질서이다. 경제 주체의 계약이 최고의 지위를 누리며 계약이나 거래에 임하는 사람들의 신분이나 지위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곳이 자유시장이다. 여기에서 자유란 시장의 질서에 입각하여 물건을 사고팔고 자기 재산을 만들 수 있는 경제적 자유를 지칭하는 것이다.
평등은 보통선거제로 압축되는 정치적 권리의 평등을 뜻한다. 신분이나 재산이나 지적 수준에 무관하게 누구나 1인 1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또 그 이상은 행사할 수 없으며,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누구나 복종해야 하는 정치적 원리가 평등의 이념이다. 한 국가의 시민권자라면, 그 사람이 나라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는 우국지사이건 나라 일에는 아무 관심 없고 자기 재산만 생각하는 모리배이건 혹은 나라가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이건 간에 똑같은 정치적 권리를 지닌다. 그것이 보통선거제로 표상되는 평등의 이념이다.
그리고 왕왕 오해되곤 하는 우애(혹은 박애)가 있다. 그것은 인류에 대한 사랑 같은 어떤 보편적이고 종교적인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혁명 일선에서 함께 목숨걸고 싸웠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던 정신적 자질과 일체감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우애라는 말에는 공동의 적을 향해 함께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른 사람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전우애 같은 느낌, 짙은 피냄새가 배어 있다. 뜻 자체만으로 보자면 보편적 인류애 같은 것과는 정반대의 개념인 셈이다. 물론 동지적 유대감이 보편적 인류애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이 같은 의미의 우애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과 소속감을 만들어주는 힘으로서,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정신적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국가대표팀의 승리를 함께 응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것의 매우 순화된 형태이겠다.
국민국가라는 말은 국민과 국가의 결합에 의해 탄생했다. state로서의 국가는 현실적 실체로서의 권력을 뜻하며 군대와 관료조직이 그 구체적인 형태이다. 이에 비해 국민이라는 말은 nation의 번역어로서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신적・정서적 자질이다. 이 둘의 결합으로 형성된 국민국가는 근대 이전의 왕조국가 체제와 대조적인 의미를 지닌다. 왕조국가에서 권력은 하늘로부터 그 권한을 점지받은 왕의 혈통에서 비롯하며(좀더 정확하게는 그렇다고 주장되며), 그 권력 아래서 사는 사람들은 국민이 아니라 신민으로 규정된다. 반면에 국민국가에서 권력의 원천은 하늘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 국가권력의 담당자들은 국민의 뜻을 대행하여 집행하는 사람들이다.
nation이라는 말은 국민이라는 말 이외에도 민족이나 국가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는 국민이라는 말보다는 민족이라는 말이 좀더 실감 있게 사용되고 있다. 20세기 초반 제국주의의 침탈과 20세기 후반부 이래로 지속되고 있는 분단 상황으로 인해 국가와 민족의 분리 상태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신적 자질로서의 민족(국민)의 개념은 혈통이나 언어, 문화적 동질성 등에 의해 형성된다고 하지만, 이중 그 어떤 것도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없다.
족보의 집합으로 구성되는 혈통이란 본디 믿을 수 없는 것(혈통의 순수성 같은 것은 누군가 주장할 수는 있겠으나 정확하게 증명하기는 어렵다. 순수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만 그렇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이고, 언어나 문화적 동질성조차도 민족의 형성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아니다(스위스, 벨기에, 캐나다처럼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도 한 국가의 성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각각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소속감이다. 그 소속감은 자신의 여권에 기입되어 있는 국적을 승인함으로써, 국가가 소속원에게 부여하는 의무를 이행하고 국가의 역사를 배워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동질감을 학습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국가의 형성에 있어 개인의 nationality(민족성, 국민성)를 확립하게 하는 힘으로서의 nationalism(민족주의, 국가주의)은 필수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자기와 다른 것으로서의 외부를 규정하고 만들어냄으로써 거꾸로 자신에게만 고유한 것으로서의 민족(국민, nation)의 개념을 만들어내는 정신적 힘이다.
국민국가와 자유시장은 근대세계를 규정하는 양대 핵이다. 이 둘의 결합은, 실체적 권력으로서의 국가와 자기 논리만을 고수하고자 하는 시장의 논리를, 공동체를 구성하는 정신적 자질로서의 nation(민족, 국민)이 통어하고 매개하는 모양새이다. 이 결합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곧 근대성의 외연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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