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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히즘의 유머

사디즘의 아이러니, 마조히즘의 유머

마조히즘과 유머가 결합하는 것은 일견 낯설어 보인다. 폭력에 스스로 몸을 맡기는 일, 자기 자신을 처벌하는 일이 농담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법이나 관습처럼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전제되어 있는 규범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 규범이 사람들의 생각과 일치하거나 개개인의 행복에 저해되지 않는다면 문제없다. 그러나 법이나 관습 같은 제2의 자연이 사람들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다가온다거나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들뢰즈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서로 다른 방식을 통해 법에 저항하는 두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아이러니와 유머가 그것이다.

법의 명령에 대한 사디즘의 대답은 법이 정한 한계를 정면으로 돌파해버린다는 것이다. 사디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제2의 자연으로서의 법이 아니라 그 상위에 있는 것으로서의 절대선 혹은 제1의 자연이다.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그런 운동에 걸리적거리는 것이라면 법을 위반하고 돌파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폭군과 폭정은 법을 위반함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떨쳤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괴상한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지키게 함으로써, 즉 악법의 제정자와 수호자로서 존재했었고 그런 힘을 통해 번성했었다는 것이 사드의 통찰이다. 그러므로 법을 전복시키는 사디즘의 방법은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해버리는 것이며, 그런 양상을 들뢰즈는 수직적이고 초월적인 운동으로서의 아이러니라고 했다.

법의 힘에 맞서는 마조히즘의 방식은 이와는 대조적이다. 법에 대한 철저한 복종과 준수를 통해 법의 불합리성과 우스꽝스러움을 드러내는 것이 마조히즘의 방식이다. 사디즘이 법의 불합리성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라면, 마조히즘의 방식은 법을 문자 그대로 철두철미 준수함으로써 법에 대한 조롱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을 들뢰즈는 마조히즘의 유머라고 했다.

예를 들어, 잘못 설치되어 교통 흐름을 방해하는 신호등이 있다고 하자. 어떻게 할 것인가. 사디즘의 방식은 주저 없이 그 신호등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그 신호등을 무시하는 것이 교통의 흐름에 도움이 되고 또 기름을 절약하여 지구의 생태 환경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와는 반대로 마조히즘의 방식은 그 우스꽝스러운 신호를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다. 아침 출근 시간에 이 신호등 때문에 길이 막힌다. 그래서 교통경찰이 신호등과 무관하게 수신호로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교통경찰이 통과하라고 수신호를 하는데도 마조히스트는 오히려 버틴다. 무슨 말이냐고, 신호를 지켜야 되지 않느냐고 오히려 경찰을 나무라면서. 이런 상황 속에서 결과적으로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은 자신이 지켜지기를 요구하고 있는 신호등, 즉 우스꽝스러운 실체로서의 법이다.

법에 대한 복종을 통해 진리의 계기를 구현하는 마조히즘의 방식은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일화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얼마든지 죽음을 회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스꽝스러운 법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맡겼다. 소크라테스가 죽는 날의 장면을 그리고 있는 플라톤의 『파이돈』은 그 상황의 비극성에도 불구하고 흥청거리는 잔칫집과도 같은 기묘하게 명랑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그 분위기는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법 개념, 그 상위에 있는 선에 비하면 법은 이차적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며, 또한 법을 준수하는 일에는 아이러니와 유머가 깃들어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고 들뢰즈는 지적한다. 악법을 준수하며 죽어간 소크라테스의 행위는 기본적으로 법을 전복시키는 마조히즘적 방식의 산물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악법에 대한 조롱으로 귀결되는 유머 감각이, 말 그대로 목숨건 유머 감각이 스며들어 있다.

이런 생각을 좀더 연장해보면 사상 최대의 마조히스트는 예수라고 할 수 있겠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는 신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이 신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의 손에 자신의 육신을 맡기고 육체가 주는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했다. 그는 신이므로 자신의 비참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형상은 흡사 자살한 신의 형상처럼 기이하게 다가온다. 그 모습을 우주적 차원에서 보자면 어떨까.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간 죽을 수 없는 존재인 신이라면 이것은 또한 우주적 규모의 유머, 매우 기묘한 형태의 유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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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집필자 소개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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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 저자서영채 | cp명문학동네 도서 소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펼쳐보기

전체목차
chapter 5. 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의미작용, 기표와 기의 고정점, 꿈-작업 발화수반행위
chapter 6.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선험적 가상으로서의 물신주의적 오인 이데올로기적 전도의 효과
chapter 8. 사디즘의 아이러니, 마조히즘의 유머 사디즘과 마조히즘 마조히즘의 유머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
chapter 9. 승화될 수 없는 것들의 섬뜩함 억압적 탈승화 과잉억압과 실행원칙 억압된 것의 회귀와 섬뜩함
chapter 13. 우리가 사는 세계 밖을 사유하는 힘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패러디와 패스티시 탈근대적 사유
chapter 14. 아름다움의 기준 취미 판단과 아름다움 숭고 키치와 캠프
chapter 15. 제대로 책임지는 법 윤리와 도덕의 차이 형이상학적 책임
chapter 17. 살아가게 하는 힘 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 정지상태의 변증법
chapter 19. 냉소적인, 너무나 냉소적인 냉소주의와 키니시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chapter 20. 극작가 플라톤의 희미한 유머 극작가 플라톤 플라톤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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