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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발표된 이 세 개념은 이후 라캉의 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셋은 언어의 질서를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말은 최소한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성립될 수 있다. 말 그 자체와 말의 뜻, 그리고 그 말이 지칭하는 대상. 여기에서 말의 뜻은 상상계, 말 그 자체는 상징계, 대상의 세계는 실재계이다.
이런 라캉의 도식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언어를 통해 사유하고 행동하는 동물이라는 점, 언어를 배움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공동생활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초기 단계의 라캉은,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6개월에서 18개월 정도의 시기를 거울단계(mirror stage)라고 지칭했다. 이 시기에 인간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의 존재를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사람의 유아들뿐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유아는 ‘통합된 신체의 이미지’를 획득한다.
즉 이 팔이 내 팔이고 이 다리가 나의 것임을 알아나간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유아에게 중요한 것은 다음 두 개의 존재이다. 하나는 자기에게 먹을 것을 주고 불편하지 않게 돌봐주는 사람, 다른 하나는 그 배려 속에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엄마와 유아로 대표될 수 있는 관계가 이 시기 유아에게는 세계의 전부이다. 그리고 그 상태만으로 완벽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상태 혹은 세계를 라캉은 상상계라 부른다.
언어가 이런 충족감을 분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상징계가 시작된다. 오로지 먹는 입과 배설하는 항문으로만 존재하던 어린아이가 이제부터는 언어를 통한 금지와 통제를 만나기 시작한다.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고, 배설해야 되는 시기와 아닌 시기를 알아야 하며, 그에 따라 칭찬이나 질책이 가해진다. 이런 과정에서 엄마와 아이로 구성되어 있던 세계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어린아이를 통제하는 제3의 존재를 통해 새롭게 구성된다.
이 제3의 존재를 라캉은 ‘아버지의 이름’이라 불렀거니와, 이는 진짜 아버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인간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숙지해야 하는 규범을 뜻한다. (라캉이 1955년 사용한 이 용어는 프랑스어로 nom du père라고 쓴다. 이것은 non du père와 발음이 같고, 이는 ‘아버지의 안 돼’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라캉은 그것이 ‘아버지의 금지명령’과 겹쳐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상징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와 같은 억압 과정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양육자와 아이 사이에 존재하던 완벽한 충족감은 이처럼 언어와 규범의 개입을 통해 파괴되고, 이제 아이는 욕구와 요구 사이의 불일치에 의해 만들어지는 욕망의 회로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적 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마음의 세계를 라캉은 상징계라 부른다.
상징계와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상상계는 기본적으로 착각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이다. 라캉이 거울단계라고 불렀던 시기에 아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통합적인 이미지를 만들어간다고 했을 때, 이때 아이가 알게 되는 자기에 대한 이미지는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기본으로 한다. 진짜 거울일 수도 있고, 사람들의 반응이라는 추상적인 거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이미지[이것을 거울상(mirror image)이라 부른다]는 일찍이 시인 이상이 거울 속의 나를 일컬어 악수도 할 줄 모르는 왼손잡이라고 했듯이, 자기 자신과는 매우 닮았지만 사실은 정반대라 할 만큼 다른 존재이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며, 라캉은 이런 모습을 두고 사람들의 자기 인식은 오인(misrecognition)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착각은 상징계로 진입했다 하더라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상상계의 충족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분할되듯이, 상상적 세계의 착각도 언어로 구성되는 세계의 바탕에, 언어 자체와 그 의미라는 개념쌍의 형태 속에 남아 있게 된다.
예를 들자면, 사랑이 무엇인가. 간절하게 그리는 마음? 상대에 대한 배려? 합일에 대한 욕구? 아끼는 마음? 부모나 자식에 대한, 이성에 대한, 동료에 대한, 자연이나 인류나 세계 평화에 대한, 사랑이라는 단어 밑으로는 수많은 뜻이 흘러가고 있으되 이중 어느 하나를 짚어 사랑의 뜻이라고 한다면 필경 그 뜻과 말은 서로 어긋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마치 욕구와 요구가 어긋날 수밖에 없듯이.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말의 진짜 뜻은 무엇이고 우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고자 하는 진짜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랑이라는 단어의 소리와 그 뜻이 만들어내는 차이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말과 뜻이 만들어내는 간극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진짜 대상의 세계를 일컬어 라캉은 실재계라 했다. 그것은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세계이다. 궁극적으로는 고정된 의미에 도달할 수 없는 말들의 세계, 순수한 차이로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라캉은 왜 실재계라는 이상한 개념을 안출해내야 했을까. 언어로 이루어지는 상징계란 소리(말)와 뜻의 불일치로 인해 끝없이 유동하는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고정된 뜻도 상상적인 것, 곧 착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순수한 차이로서의 실재계는 그 착각이 깨지는 지점에 버티고 있다. 소리와 뜻의 불일치가 발생하는 지점에서 생겨나는 진짜 대상, 실재계의 대상을 라캉은 ‘대상a’라고 불렀다. 이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정신분석을 통해 사후적으로 드러나는 대상이다.
누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 술 한잔 할까. 대체 이건 무슨 뜻일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술 한잔 하자는 걸까. 아니면 무슨 심각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것일까. 이 경우 ‘술 한잔’이 지니고 있는 진짜 뜻은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가는 수많은 착각을 거친 후 서서히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술 한잔’ 속에 있는 그것 이상의 무엇, 곧 대상a이다. 라면의 대상a나 사랑의 대상a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불완전성을 감추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우리 마음과 생각과 이성의 불완전성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라캉이 말하는 것은 겸손하게 살라는 것인가? 누구에 대한 겸손일지는 모르나, 아마도 그래 보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던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을, 라캉은 이렇게 뒤집어놓았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 이것은 무의식과 실재계의 세계를 염두에 둔 발언이거니와, 라캉은 이런 모습의 이성을 일컬어 데카르트적인 이성에 맞서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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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상상계・상징계・실재계 – 인문학 개념정원, 서영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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