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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영역의 분화는 근대세계를 규정하는 대표적인 특성 중의 하나다. 유일 가치를 중심으로 하여 동심원적인 가치의 서열을 지니고 있던 전통사회와 근대사회를 구분시켜주는 특성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진선미의 영역을 예로 들어보자. 전통사회에서는, 진리인 것만이 선한 것일 수 있고 또 이 둘에 입각한 것만이 아름다울 수 있었다. 이처럼 얽혀 있는 진선미의 결합체는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의미의 절대선의 영역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 이 세 개의 영역, 진선미의 영역은 절대적 가치세계로부터 분리되어 각각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지니게 된다.
근대 학문의 세계에서 진리는 윤리적이지도 예술적이지도 않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달과 행성들이 완벽한 동심원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코스모스)은, 그 자체로 완벽한 예술적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한 절대자의 선한 의지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후로 근대의 과학이 만들어낸 태양계의 모습은 이런 아름다움과는 무관하고, 또 19세기에 들어 새로운 과학의 선두주자가 된 진리로서의 진화론은 아름다움이나 윤리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기괴하기까지 하다(어떻게 단세포동물에서 인간이 생겨날 수 있는가). 학문의 모토로서의 진리란 아름답지도 도덕적이지도 않게 되었고, 또 인간은 신의 걸작도 만물의 영장도 아닌, 무수히 가능한 생명체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윤리의 영역도 자립적인 것이 되었다. 전통사회는 자신의 도덕적 강령들을 종교적 믿음이나 형이상학적 체계에 의해 선명한 틀로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성의 윤리는 이런 기성의 도덕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곳에서 형성된다. “어떤 덕도 자기보존보다 우선적인 것일 수는 없다”고 했던 스피노자의 말은 새로운 도덕률의 핵심을 이룬다. 또 칸트는 윤리의 영역을 인간의 행복이나 한 공동체의 공동선이라는 항목과 분리시켜 한 개인이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요구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의 수준으로 고양시켰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윤리적 준칙이 보편적 법칙일 수 있게 행동하라는 칸트의 윤리적 강령(정언명령)은 구체적 내용이 없는 것이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기괴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근대적 윤리의 영역은 학문적 진리나 예술적 아름다움의 영역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영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전통사회에서는 진실하고 착한 것만이 아름다운 것일 수 있었으나, 근대 예술의 아름다움은 보들레르의 시집 제목이 보여주듯이 오히려 기괴하고 섬뜩한 곳에서 생겨날 수 있는, ‘악의 꽃’ 같은 것이 되었다. 모더니즘 예술에 이르러 예술미는 조화로운 것으로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독창성(남과 다른 것)과 새로움(그 이전과는 다른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 되었다. 독창성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예술적 규준이나 사회적 규범을 넘어서는 곳에서, 기존의 한계를 초월하는 곳에서 생겨난다. 예술의 영역도 학문이나 윤리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은 가치 영역의 분화는 칸트의 세 비판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에서 적실한 논리적 표현을 얻는다. 학문과 논리의 영역인 순수이성에 대한 논의는 윤리의 영역인 실천이성과 미의 영역인 판단력을 괄호 침으로써 가능케 되고, 그 나머지 영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처럼 진선미의 세 영역은 서로에 대해 무관하게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한다.
이러한 현상을 사회학자 베버는 가치 영역의 분화라고 지칭했다. 이는 전통사회를 지탱해주었던 가치 절대주의 형이상학의 붕괴, 또한 사농공상의 사회적 질서나 종교 중심주의 세계상의 해체를 반영하고 있다.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에서는 신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구두를 만드는 일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고, 국가를 책임지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 중요한 일일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진선미의 세 영역이 서열화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국의 미인선발대회에서 등수를 정할 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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