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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과거를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활동에 대한 기록을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복원하려는 학문.
이를 연구하는 사람을 역사가라 한다. 이들의 학문은 기록과 증언 등의 자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역사가들의 작업에 대한 이같은 개념은 최근에 생겨난 것으로서, 18세기말과 19세기에 주로 전문 역사가들이 과학적 역사를 발전시킨 데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역사연구는 오늘날 자연스러운 인간활동의 하나이자 교육의 중요한 일부로 여기고 있으며, 인간생활 전반에 대한 해석을 제공한다고 자부하고 있다(역사편찬).
고대의 역사학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역사 연구는 대체로 종교나 철학 또는 문학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전설이나 신화와 뒤섞이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 조상들이 기록한 과거의 인간활동은 왕과 왕조의 연대기인 경우가 많았지만, 과거의 관행에 바탕을 둔 도덕성의 길잡이로서, 다시 말하면 종교적 신앙의 한 측면으로서 과거의 인간활동을 기록한 경우도 있었다. 이집트인과 바빌로니아인을 비롯하여 고대 근동지방의 여러 민족이 남긴 오래된 역사기술을 살펴보면, 근대 역사가들의 작업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바빌로니아·아시리아·히타이트·페르시아의 왕들은 모두 후세를 위해 자신들의 위업을 기념비에 새겨서 오랫동안 보존하려고 애썼다(공문서보관소). 영향력을 크게 행사했던 통치자들은 방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행정 문서만이 아니라 그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다양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었다(왕들의 인명록). 아시리아의 마지막 통치자인 아슈르바니팔(BC 668~627 재위)의 경우, 그가 남긴 약 2만 개의 점토판이 지금도 남아 있다.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는 왕들의 명단을 신전에 보관하고 그들의 통치기간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을 연대기로 간추려 그 명단에 덧붙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부 통치자들은 전임자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오래된 자료들을 주기적으로 파괴하기도 했다.
연대기 작가들이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사건을 기록하려 애쓰기 시작한 것은 BC 5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 이전에도 중국에서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공자(BC 551~479)는 고국인 노(魯) 나라의 연대기를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역사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최초의 저술이 출현한 것은 BC 3세기의 진(秦) 왕조 때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역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사기 史記〉는 한나라 때(BC 85년경)에 씌어졌다. 저자인 사마천은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서양에서 역사라고 부르는 저술을 시작한 것은 그리스인이었다(라틴 문학). 약 1,000명의 고대 그리스의 저자들이 역사적 주제에 대해 글을 썼지만, 그들의 저술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BC 5세기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들로 근대 역사학의 선구자라고 불린다. 로마의 정치가인 키케로가 '역사의 아버지'라고 부른 헤로도토스는 소아시아의 서해안에서 태어났다. 그 지역 태생인 다른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여행하거나 그밖에 페르시아 제국과의 접촉을 통하여 많은 유익한 경험을 겪었다. 그는 다양한 민족과 그들의 관습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얻은 자료를 비판적 정신으로 다루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과 그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로마의 역사가들은 역사와 전기를 구별하는 경향이 있었다.
역사 저술가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전기 작가들은 역사적 인물을 전설과 비슷한 방식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가 쓴 로마 제국 초기 황제들의 전기를 비롯한 일부 전기는 귀중한 역사 자료가 되고 있다. 로마 시대에는 역사가 문학의 일부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가들은 온갖 문학적 장식을 이용하여 글을 아름답게 꾸미고 도덕적 교훈을 강조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로마의 역사가인 리비우스이다. 반면에 폴리비우스(BC 2세기에 활동함)나 카이사르(BC 44 죽음) 같은 역사가들은 미사여구를 피했다. 또한 로마 원로원의 공문서를 저술에 이용한 타키투스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들 고대 역사가들은 대부분 자기 시대의 역사를 다루었고, 당대의 역사가 아닌 과거의 역사를 쓸 때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스의 역사가들이 이룩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독창적인 업적은 진실과 허구를 구별해야 할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 방법에 의식적으로 몰두했다는 점이다. 투키디데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을남겼다. "사건을 서술할 때, 나는 결코 처음 입수된 자료를 토대로 사건을 서술하지 않았으며, 나 자신이 받은 인상조차도 믿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직접 본 것과 다른 사람이 본 것에 의거하여 사건을 서술했으며, 다른 사람이 보고한 내용은 항상 최대한으로 엄격하고 자세한 검증을 통하여 그 정확성을 시험했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역사서술 방식은 그후 적어도 18세기까지 이루어진 모든 역사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 고대 역사가들의 장점은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를 골라서 그 시대에 일어난 사건에 흥미로운 형태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투키디데스나 타키투스 등은 그 시대의 정치적 관계에 대해 흥미진진한 통찰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극적인 통일성을 이룩한 뛰어난 문학작품을 창조했다.
이와 같은 로마의 역사가들은 언어·문학·종교·관습에 관한 글을 바탕으로 당시의 로마 생활을 체계적으로 검토했다.
그리스도교 시대의 역사학
4세기에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에서 득세하자, 이교도인 그리스·로마 역사가들의 저술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역사학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 역사학의 기원은 유대였다(→ 유대교). 고대인들 가운데 유대인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무로 삼은 유일한 민족이었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대인의 역사는 하느님이 선민(選民)인 자신들을 위해 세운 계획의 실현을 찬양하는 것이었으며, 이 신성한 글들은 하나로 묶여 〈구약성서〉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도는 〈구약성서〉를 이어받아 거기에 새로운 종교적 역사를 추가했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신약성서〉는 대체로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저자들이 쓴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은 그리스도교도들에게는 〈구약성서〉의 여러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언이 실행된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도교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연대기 저자들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의지를 밝히는 일과 관계가 있게 보이는 사실에만 관심을 쏟았고, 그런 사실들만 골라서 기록했다.
그리스도교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보편적 역사라는 개념을 개발했다. 비판자들과 맞서서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이교도의 역사를 그들의 보편적 체계 속에 끼워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상당히 교묘하게 이 일을 해냈다.
특히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저자들은 하나로 통합된 보편적 연대체계를 고안했다. 6세기초에 로마에서 저술활동을 한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그리스도가 태어난 해를 기원으로 하는 연대체계를 도입했다. 8세기에 잉글랜드의 역사가 비드는 이 연대체계를 널리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디오니시우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 역사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신국 De civitate Dei〉이라는 책을 통하여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느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를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본 그의 시각은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의 견해를 지배했고 역사를 다루는 그들의 태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중세의 역사학
유럽에서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독특한 세계관을 발전시키고 있는 동안, 중국의 역사가들은 여전히 사마천의 전통에 따라 연구를 계속했다.
중국학자들은 일찍부터 역사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들에게 역사가 의미를 갖는 것은 역사가 행동에 실제적인 지침을 주거나 올바른 처신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뿐이었다. 중국의 모든 사상 유파는 역사의 교훈을 인용했다. 그들이 역사적 사실의 도덕적 내용을 강조한 공자 및 그 후계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공자가 가르친 의무 가운데 하나는 믿을 만한 기록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공자가 죽은 지 몇 세기 뒤에 통일된 중국은 유학자들을 관리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기록을 주의깊게 보존하는 것은 정부의 주요기능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당(唐) 왕조(618~907) 이후의 방대한 공식기록과 연대기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중국 역사는 일정한 틀에 박혀 있고, 내용도 고위관료들이 흥미를 갖는 것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중국 역사는 구체적인 세부 사항과 왕조의 옹호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중국 역사는 왕조의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천재적인 저자와 대담한 비판정신을 가진 사람들도 나타났다. 가장 뛰어난 사람은 〈사통 史通〉을 쓴 유지기(劉知幾: 661~721)였다. 〈사통〉은 최초로 역사방법론을 철저하게 다룬 저서이다.
중세 유럽의 역사가들은 대부분 수도사였는데, 이들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중국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군주와 왕가의 일을 기록하거나 교회사에 전념하는 경향이 있었다(수사). 아인하르트(771~840)의 〈샤를마뉴 전기〉(830~833)는 이 분야의 고전이며, 몬머스의 제프리(1100~54)가 쓴 〈브리튼 왕의 역사 Historia regum Britanniae〉와 12세기에 프라이징의 오토 주교가 쓴 〈프리드리히의 통치 Gesta Friedrici〉도 마찬가지였다.
순수한 종교적 저술도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보베의 뱅상(1190경~1264)이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후원을 받아 쓴 것의 일부는 십자군 전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뱅상). 조프루아 드 빌라르두앵 같은 십자군 지도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주도적 역할을 맡은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서유럽 역사가들에 비해, 동로마 제국의 비잔틴 역사가들은 좀더 확실한 근거와 권위를 가진 믿을 만한 저술을 남겼다.
비잔틴 역사가는 대부분 정치가와 고위관리 및 고위성직자들로, 중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저술은 신중하게 활용하면 오늘날의 연구자들에게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 이 시대를 다룬 가장 흥미로운 저술 가운데 하나는 알렉시우스 1세 황제의 딸로서 부왕의 전기를 쓴 안나 콤네나의 글이다. 비잔틴의 역사 저술 가운데 가장 읽기 쉽고 재미있는 것은 아마 동로마 제국 황제인 요한네스 6세(1347~54 재위)가 제위에서 쫓겨난 뒤 강제로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할 때 쓴 자서전일 것이다.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의 한 측근은 1453년에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해 기록했다.
비잔틴 역사가들은 그리스어로 글을 쓰고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글을 의식적으로 모방했다. 1400년경에 이탈리아를 방문한 비잔틴 학자들은 그리스인의 가르침을 이탈리아대학에 소개했다.
그들은 그리스어와 함께 그들의 뛰어난 문학기법도 도입하여, 유럽에 새로운 르네상스 역사학이 싹틀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이슬람 세계의 역사학
이슬람 세계의 역사학은 유럽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 같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도 그리스도교도와 마찬가지로 도덕주의적이고 교훈적인 역사를 썼다. 마호메트(570~632)는 이슬람교를 역사의식이 강한 종교로 만들었다.
정통파 이슬람교도들에게, 이슬람 공동체의 발전은 신의 의지가 끊임없이 표명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결과 이슬람 사회의 종교적 발전을 기록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슬람 세계의 역사학이 저명한 살라딘 같은 정치지도자만이 아니라 독실한 신앙을 가진 평민과 학자들의 생애에도 많은 관심을 쏟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인 살라딘이 12세기에 십자군을 무찌르는 데 성공한 것은 이슬람 저자들에게 특히 구미에 맞는 주제, 즉 종교적 의무감에 투철한 통치자라는 주제를 제공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아랍 역사가이며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역사학에 관하여 가장 통찰력 있는 식견을 보여준 사상가는 이븐 할둔(1332~1406)임이 분명하다. 그는 당시의 이슬람교도가 얻을 수 있었던 모든 학식을 흡수했다. 그는 종교학의 대가이며 걸출한 재판관인 동시에 논리학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장군으로서나 정치가로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스페인과 마그리브(북서 아프리카)의 이슬람 통치자들을 보좌하는 장관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알고 있는 사회를 지배하는 힘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는 〈키타브 알리바르 Kitāb al-⁽ibar〉에서 보편사를 시도했는데, 이 저서는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하는 획기적인 저술이다. 아널드 토인비는 이것을 소개하면서, '이런 부류의 저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학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새로운 시대에 속해 있다는 인식이었다.
르네상스 학자와 예술가들은 아직 무한한 진보의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하지 않았지만, 주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속도를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이들은 고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고대 그리스·로마의 저자들을 연구하고 그들에게서 영감을 얻는 일에서 귀중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새로운 비판적 견해를 발전시키고 중세의 연대기 작가들을 비판했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인 플라비오 비온도(1388~1463)는 몬머스의 제프리의 저서를 논하면서, "나는 이토록 거짓말과 경박한 말로 가득 차 있는 글을 지금껏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15세기에 이르자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은 과거의 모든 유물을 체계적으로 모으면 전체 문명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문주의자들은 지형학적인 길잡이, 공문서와 사문서, 그때까지 남아 있던 건축물과 비문 및 주화에 대한 연구를 비롯하여 다양하고 폭넓은 자료를 역사학에 활용했다. 인문주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먼 과거의 역사를 충분히 쓸 수 있다고 확신했고, 이런 자신감은 고대 역사가들보다 훨씬 더 강했다. 실제로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상당히 인상적인 저술들을 남겼다.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1483~1540)가 1536년부터 쓰기 시작한 〈이탈리아사 Storia d'Italia〉는 1494~1534년을 다룬 가장 권위있는 이탈리아 역사서로 인정받게 되었다(구이차르디니). 구이차르디니는 르네상스 시대 역사가 중에 투키디데스에 견줄 만한 인물이다. 그는 1494년에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략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탈리아를 잇따라 덮친 비극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사건의 논리적 원인을 규명하려는 이런 욕구는 최고 수준의 르네상스 역사학이 지닌 가장 성숙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르네상스 역사가들이 차츰 발전하고 있는 민족국가의 역사와 그것을 기록하는 데 애국적인 자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마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늦게 통일을 이룩한 스페인과 폴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역사학이 막 이룩한 결속을 찬양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독일에서도 인문주의 역사가들은 계속된 정치적 분열의 중요성을 축소함으로써 민족적 동질감을 회복하려 했다.
종교개혁은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일부는 우발적인 것이었다. 우선 프로테스탄트인 종교개혁가들은 역사에 호소함으로써 자신들의 견해를 정당화할 필요성을 느꼈다(프로테스탄티즘) . 프랜시스 베이컨이 날카롭게 간파했듯이, 마르틴 루터는 "오랫동안 도서관에서 잠을 자고 있던 고대 저자들의 저술이 널리 읽히도록…… 모든 고대를 잠에서 깨워 과거를 그의 원군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황의 통치권을 반박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역사 전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고쳐 쓰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우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따라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교회인 하느님의 나라는 이따금 적의 그림자에 가려 빛을 잃을 때도 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존재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했듯이 적은 이교도나 이단자만은 아니라고 종교개혁가들은 주장했다. 그들 시대에 교황의 권위를 지지하는 사람과 존 위클리프(1320~84)나 얀 후스(1369~1415)에 대한 박해자들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한 사람들도 이 무리에 포함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옹호자들과 그 역사가들은 재빨리 반격에 나섰고 그후 여러 세대에 걸쳐 글로 논쟁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역사에 관하여 가톨릭교도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벌어진 논쟁 덕분에 양쪽은 서로에 관한 자료를 많이 모으게 되었다. 이 자료를 편찬한 저자들은 권위있는 전기와 문서를 방대하게 수집·정리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종교 논쟁가들에 의해 인문주의의 역사학에서 사라졌던 습관, 즉 많은 참조사항을 제시하고 정확한 인용문을 길게 나열하는 습관이 다시 도입되었다.
서로 대립하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권으로 된 방대한 저술을 제작하여 널리 배포했다.
이 모든 저술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만, 일부는 나름대로 인상적이었다. 존 폭스(1517~87)의 〈순교자들의 책 Book of Martyrs〉(1563)에는 튜더 왕조의 메리 여왕 시절에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개신교가 당한 박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많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영국 프로테스탄트에게 영향을 주었다. 가톨릭 쪽에서는 고위 성직자인 자크 베니뉴 보쉬에(1627~1704)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저서가 강한 영향력을 가졌다.
가톨릭 수사들도 세속적인 교황 정치의 어두운 모습과 예수회의 비양심적인 음모를 고발했다. 수사인 프라 파올로 사르피가 쓴 트리엔트 공의회의 역사는 18세기 역사가들의 교회비판에 영향을 주었다.
종교 이외에 16세기에는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역사적 시각이 발전했다. 사람들은 인간사와 관련된 모든 학문분야에는 역사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법률사가인 프랑수아 보두앵은 1561년에 "나는 법률 서적이 역사의 산물임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모든 학문분야에서 거기에 어울리는 역사기법이 발달했다. 16세기가 지나는 동안 프랑스 법과대학에서는 매우 독창적이고 복잡한 역사가 저술되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들의 저술에도 불구하고 16, 17세기의 특징은 지적 관심의 세속화 현상이었다. 비종교적인 학문은 이제 신학보다 더 지식인을 사로잡는 개념들을 낳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역사는 가장 인기있는 문학분야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점점 더 많은 대중이 역사를 읽게 되었다.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책들의 목록이 1657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도서목록을 보면 역사책이 많은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1460~1700년 유럽 전역에서 주요한 고대역사가 17명의 저서가 최소한 250만 부나 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장애물의 하나는 통치자들이 그들의 통치에 불리한 출판물에 대한 적개심을 품은 것이었다. 영향력있는 독자층이 성장하자 통치자들은 역사에 관한 저술을 점점 불신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537~74년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가 실시한 검열은 피렌체 역사학의 쇠퇴를 촉진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것도 통치자들의 비위에 거슬릴 수 있었다. 1599년에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200년 전 왕위에서 쫓겨난 리처드 2세의 퇴위과정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저자를 비난했다. 고초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고도의 지성을 갖춘 학자들조차도 처음부터 몸을 사려 편파적인 역사가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위대한 법학자인 후고 그로티우스(1583~1645)는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전쟁사에서 종교적 측면에 대한 논의를 피했다(그로티우스). 스웨덴 정복의 역사를 쓴 사무엘 푸펜도르프는 17세기 스웨덴의 국내 정세를 다루지 않았다.
17세기에 수학을 크게 발전시킨 학자들은 그들의 업적이 궁극적으로 인류에게 자연환경에 대한 새로운 지배력을 부여해주리라고 확신했다.
특히 프랜시스 베이컨과 르네 데카르트는 그 점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낙관주의는 계속적인 진보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뒷받침해주는 토대가 되었는데,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19세기의 단호하고도 자신 만만한 역사학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17세기의 주요 사상가와 과학자들의 대부분이 역사에 대해 취한 태도는 당시 역사서술의 발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베이컨이 쓴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전기는 읽기 쉽고 재미있으며 합리적으로 씌어졌지만 정확성에는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베이컨은 헨리가 죽은 해를 1년 앞당겼고,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는 데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위대한 수학자였지만, 과학을 역사학에 적용하려고 시도한 결과 그의 역사는 살아 있는 인간이 거의 다 배제된 기계적 구조가 되었다.
17세기의 역사 비평가들은 대부분 다른 것을 우선으로 삼는 사람들이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역사가들이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학설을 공격하는 데 주로 관심을 보였다.
17세기말에 가장 성공적으로 역사를 옹호한 사람들은 매우 학구적인 가톨릭 교단 사람들이었다. 가톨릭교는 프로테스탄트보다 훨씬 더 전통에 권위의 기초를 두고 있었다. 장 마비용(1632~1707) 같은 가톨릭 학자들에게는 역사를 옹호하는 것이 사실상 자신의 종교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역사가들이 과학적으로 논증 가능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결정적인 출판물은 마비용의 〈고문서학 De Re Diplomatica〉(1681)이었다.
이 저서에서 마비용은 강력한 비판적 지성을 활용하여, 중세 기록의 신뢰성을 입증하는 데 적용할 보편적 규칙을 고안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문서가 진짜임을 증명하려면 단편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문서의 모든 측면이 정확한 일관성을 지니는가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학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과 종교 논쟁가들이 역사학에 부여한 추진력은 18세기초에 거의 다 소진되었다.
질적 수준에서 판단할 때 18세기는 대체로 역사가들이 성공을 거둔 시대가 아니었지만, 과거의 역사학이 갖고 있던 몇 가지 결함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역사저술을 발표하는 것이 과거보다 더 안전해지고 쉬워졌다. 이처럼 자유가 많아지지 않았다면 18세기의 전형인 급진적인 '철학적' 역사학은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저술이 그때까지도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교회의 적대적인 내용인 나폴리 역사(1723)의 저자 피에트로 잔노네는 종교 재판소의 추적을 받고 12년 동안 투옥되어 있다가 1748년에 감옥에서 죽었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역사가로서 잔노네를 도와주려고 애쓴 루도비토 무라토리조차도 저서의 일부를 판금당할 위험에 빠졌지만, 교황 베네딕투스 14세가 직접 개입해 위기를 모면했다.
프랑스에서는 1714년 니콜라 프레레가 프랑크족은 원래 게르만 부족들의 연합체에 불과하며 그보다 뛰어난 조상들의 후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루이 14세의 노여움을 사서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다. 루이의 후계자들 시대에는 그처럼 터무니없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지만, 교회나 정부를 비판한 사람들은 자주 곤경에 빠졌다.
반면에 영국·네덜란드·스위스 및 독일의 일부지방은 대부분의 저술을 마음놓고 발표할 수 있는 안전한 오아시스였다.
18세기에 유럽의 역사학이 진정으로 새로워진 것은 그것이 자연과학의 발전에 자극을 받았고, 인간사회의 발전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에 기초를 두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역사학의 주요특징들은 유럽 이외의 다른 대륙에 대한 관심, 모든 인류 역사는 하나라는 의식, 특정한 시대나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을 대담하게 일반화할 수 있는 능력, 인류 문명의 진보와 관련된 주제에 대한 선호 등이었다.
프랑스의 콩도르세는 1794년에 쓴 인간정신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 개요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 전반을 9단계로 나누었는데, 위대한 발명이나 지리적 발견이 이루어진 해를 각 시기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합리주의적'인 역사학의 결점은 자주 지적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사상가들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각 사회를 응집력있는 개별단위로 보면서 각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의 다양한 측면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론을 체계화시켰다는 것이다.
나폴리의 가톨릭교도인 잠바티스타 비코는 사회의 한 단계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작용하는 복잡한 영향력을 동시대인들보다 훨씬 예민하게 의식했다. 그는 로마 역사의 초기 단계에 이루어진 이런 전환을 재구성하면서 각 시대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긋지 않았다. 같은 나폴리 사람인 잔노네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로마 법을 공부한 이유는 로마 법 자체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사회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잔노네의 영향을 많이 받은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스키외는 사실상 역사가는 아니었지만 역사적 현실을 인식하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쓴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1748)은 다른 어느 책보다도 그의 동시대인들로 하여금 각 사회를 이루고 있는 복잡한 요소들을 심사숙고하게 만들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이 어떠한 역사를 써야 할지를 결정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제도 내에서 사회제도와 결부되며, 또 그것에 의해 설명되는 역사'였다.
기번은 '철학적' 역사학의 걸작인 〈로마 제국 쇠망사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1776~88)에서 이 꿈을 실현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인류의 진보라는 문제에 골몰해 있었다.
인류가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다는 믿음은 18세기 중엽에 프랑스의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와 스코틀랜드의 애덤 스미스가 공개적으로 밝혔는데, 이들이 서로 관계를 가진 것 같지는 않다. 기번은 이들 두 사상가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의 저서를 읽었고 그들을 알고 있었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인류 역사 전반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목적을 부여해줄 것이었다. 기번은 로마 제국이 쇠퇴한 원인을 해명함으로써, 그가 살고 있던 당시의 유럽이 로마 제국보다 훨씬 높은 발전단계에 이르러 있으며, 고대세계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18세기에 역사학은 대학과는 거의 관계를 맺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의 괴팅겐 같은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역사학파가 끊이지 않고 발전할 수 없었다. 18세기 역사가들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일부는 동시대인들보다 오히려 19세기의 후계자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기번은 학구적 골동품을 수집한 연구가들의 방대한 자료를 '합리주의' 역사에 활용하는 데 선구자였다.
19, 20세기의 역사학
19세기초부터 역사학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변화는 독일의 역사가들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그 변화는 주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독일 정복에 대한 반응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프로이센에 이어 독일 전역에서는 각급 학교와 대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19세기에 대학 교육이 유럽의 거의 전역에 확산되었을 때, 역사는 모든 지역에서 필수과목으로 받아들여졌다(고등교육, 교육과정). 역사상 처음으로 전문 역사가들이 역사를 쓰게 되었고, 이들에게는 역사 저술이 대학교수로 임명되거나 이미 확보한 대학교수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되었다.
또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사상의 자유가 성장했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에는 독자적이거나 비정통적인 사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위험했다. 프랑스인들이 지배한 지역만이 아니라 프랑스에 정복되지 않고 프랑스와 맞서 싸운 지역에서도 미리 겁을 먹고 이런 사상을 탄압했다. 그러나 1815년 이후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좀더 자유로운 역사학에 필요한 상황이 차츰 찾아왔다. 정부는 역사학에 점점 너그러워졌는데, 그 한 측면으로 1838년에 런던에 문을 연 영국 공문서관 같은 공공기록보관소가 차례로 세워졌고, 기존의 공문서도 좀더 자유롭게 공개되었다(공문서보관소). 로마 교황청도 변화를 받아들여, 레오 13세는 가톨릭 역사에 대한 연구를 장려하는 새로운 정책의 일환으로 1883년에 교황청 기록보관소를 설립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역사학은 주로 미공개 기록에 바탕을 두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학자들은 구전자료를 부당하게 무시하고 문서자료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었다.
샤를 V. 랑글루아와 샤를 세뇨보가 쓴 〈역사 연구 입문 Introduction aux études historiques〉(1898)은 또 다른 저명한 프랑스 역사가인 페르디낭 로가 〈중세 Le Moyen Age〉(1898)에서 쓴 비판적 논평으로 보완되었는데, 〈역사 연구 입문〉은 근대적인 역사 방법론에 대한 훌륭한 논의점을 제공해준다.
즉 역사는 자율적인 학문분야이며 다른 학문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방법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랑글루아와 세뇨보는 특히 강조하기를, 역사는 관찰의 과학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불완전한 문서나 서술체 기록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알아낼 수 있는가를 추론하는 과학이라고 말했다.
역사가는 일단 '외적 비평'을 적용함으로써 그의 목적에 적합한 자료를 결정하면 다음에는 '내적 비평'을 통하여 자신이 선정한 자료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원문비평). 그러나 역사가의 진정한 작업은 자료를 종합하려고 시도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페르디낭 로는 이 과정에서 학문적 기량이 아닌 다른 자질이 요구된다고 한다. 즉 역사가는 연구대상에 공감을 가지고 거기에 자신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의 통찰에 필요한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자질은 계몽주의시대 역사가들의 저서에는 대체로 부족하다. 이들은 무신론적이고 세계시민론적인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열정적으로 조국의 특성을 찬양하고 독일 역사 전반에 걸쳐 그러한 특성의 뿌리를 찾기 시작했다. 독일의 역사학이 이런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는 인간정신의 진보를 개관하는 것이 역사의 목적이라는 것을 부인했다. 그가 생각하는 역사의 목적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모든 나라와 모든 시대가 똑같이 연구할 만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견해는 인류 전체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섭리가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보여 준다는 레오폴트 폰 랑케의 확신을 예견했다.
나폴레옹이 독일에 가져온 재난 때문에 독일에는 애국적인 역사학파가 생겨났다.
역사학은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이 운동의 중심은 프로이센에 갓 세워진(1809) 베를린대학교였다. 1871년에 독일이 통일된 뒤 통일에 이바지한 독일의 많은 역사가들은 비스마르크의 승리를 계속해서 만족스럽게 묘사했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특히 19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고대사가인 테오도르 몸젠은 국가 권력을 찬양하는 독일인들의 경향을 개탄했다. 정치 사상가의 대가인 프리드리히 마이네케는 독일이 2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독일의 파국 Deutsche Katastrophe〉(1946)이라는 저서를 써서 역사학이 일반 문명의 좀더 높은 가치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마이네케). 한편 서유럽 국가에서는 과거를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쥘 미슐레는 1833~43년에 그가 당시 관리하고 있던 프랑스 국가 공문서를 바탕으로 하여 최초의 프랑스 중세사를 썼다(미슐레). 주로 1685~1702년을 다루고 있는 매콜리의 〈영국사 History of England〉(1848~61)도 과거를 상상으로 되살리려는 주목할 만한 시도이지만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흠이다.
독일의 학문기법과 역사 교수방법은 19세기 후반에 다른 나라에 보급되었다.
근대의 가장 중요한 고대사가인 M.I. 로스토프체프를 비롯하여 몇몇 위대한 러시아의 학자들은 독일 학자들이 얻은 결과를 그들의 작업에 적용했다(로스토프체프). '미국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지 밴크로프트(1800~91)는 1867~74년에 독일 주재 미국 공사로 일하면서 광범위한 공부를 했다. 출판물의 양으로만 따지면 18세기 이후에 씌어진 미국 역사는 다른 어떤 근대 국가의 역사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 가운데 밴크로프트와 프랜시스 파크먼(1823~93) 및 헨리 애덤스(1838~1918)의 저서는 역사서뿐 아니라 문학서로도 뛰어나다. 과학적 역사학을 체계화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선구자는 허버트 백스터 애덤스였다. 그는 1876년부터 죽을 때(1901)까지 존스홉킨스대학교를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학 중심지로 만들었다.
애덤스의 몇몇 제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가 되었다. 미국사를 순수하게 되살리려는 움직임은 1893년 애덤스의 제자인 프레더릭 잭슨 터너에게서 시작되었다. 터너는 1890년까지 미국사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미국이 하나의 대륙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라는 확신을 통하여 '혁신적' 역사학파를 창시했다.
터너가 보기에 19세기 미국사의 주요주제는 동부해안에 정착한 귀족적 자본가 집단과 중서부 지방에 새로 정착한 이주민들의 욕구 사이에 일어난 충돌이었다. 찰스 A. 비어드는 〈미국 헌법의 경제적 해석 Economic Interpretation of the American Constitution〉(1913)을 통하여 경제적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집단 사이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미국사 전반을 다시 검토했다. 1945년 이후 '혁신적' 역사가들은 미국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통된 전통과 목표를 강조하고자 하는 보수적 학자들만이 아니라 '뉴 레프트'라고 부르는 좌익 역사가들한테서도 비판을 받았다.
20세기에는 역사학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접근 방식이 뚜렷해졌다.
한편으로는 역사학이 순수학문으로서의 지위가 강화된 덕분에 대학에 전문역사가들의 수가 늘어났다. 이들은 특정한 사건이나 운동 또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주제의 범위를 좁히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경향은 특히 미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오스발트 슈펭글러(1880~1936)와 아널드 토인비(1907~75) 같은 학자들은 문명사와 문명의 변화를 매우 큰 테두리 안에서 인식했다. 슈펭글러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서 발표한 〈서구의 몰락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은 동양 문명의 영속성과는 대조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서구 문명의 앞날을 우울하게 예측한 책이었다.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The Study of History〉는 슈펭글러의 판단보다는 덜 비관적이지만, 수천 년 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한 다양한 문명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순환적인 역사관을 제시했다. 토인비와 슈펭글러는 과거의 유럽 역사가들과는 대조적으로 중동과 동아시아, 특히 중국 문화에 경의를 표했다.
전문 역사가들은 토인비의 저서에 나오는 여러 세부사항을 반박했지만, 그는 이 세계에는 독자적이고 나름대로 중요한 다양한 전통과 문화가 있으며, 이 전통과 문화는 이따금 서로 교류하기는 하지만 결코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완전히 흡수하지는 않는다는 세계관을 일반화시킨 선구자로 널리 갈채를 받았다.
20세기에는 토인비 및 슈펭글러와 거의 동시대에 속하는 사회역사가들이 중요한 집단으로 등장했다.
영국의 역사가 G.M. 트리벨리언과 그의 후배인 에이사 브리그스도 이들 가운데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트리벨리언이 쓴 〈영국 사회사 English Social History〉(1944)는 선구적인 노력이었고, 브리그스는 그 전통을 이어받았다. 브리그스가 말했듯이 "사회사는 사회의 역사이다. 그것은 사회구조 및 변화의 과정에 관심을 갖는다. 사회사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증거도, 아무리 사소한 증거도 무시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사회역사가들은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역사관, 즉 역사를 주로 정치적·경제적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간주하는 견해를 물리쳤으며, 그들이 연구하는 문명의 생활양식과 사회변화를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쳤다. 사회역사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 프랑스의 페르낭 브로델(1902~84)일 것이다.
브로델의 걸작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La Méditerranée de le monde méditerranéen à l' époque de Philippe Ⅱ〉(1949)는 16세기에 레판토 해전(1571)으로 절정에 이른 스페인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사이의 충돌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당시의 정치적 사건들의 배후를 추적하여 지중해지역 전체의 지리·역사·종교·농업·기술 및 지적인 풍토를 전반적으로 설명했다.
이 저서뿐 아니라 그후의 저서에서도 브로델은 장기적인 경향과 변화에 대한 자세한 분석에서 출발하여 좀더 일시적인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브로델은 영향력있는 역사학 잡지 〈경제·사회·문명의 연보 Annales : économies, sociétés, civilizations〉의 편집자로서 기후·지리·인구·교통·통신 같은 역사의 요인들에 대한 조사를 장려했다.
브로델을 비롯한 사회역사가들은 또한 일정 시대의 교역과 일상생활을 자세히 조사할 때 통계분석과 수량화에 크게 의존했다. 브로델의 업적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 20세기 후반에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경제적·사회적·지적 요인들을 과거의 역사가들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방법론
개요
역사학의 방법론은 기존 지식을 존중하고, 그와 관련된 새로운 자료를 찾고 가설을 만든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윤곽은 다른 학문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역사 저술도 기량과 경험에 따라 성공이 좌우된다는 점에서 다른 학문의 저술과 마찬가지이다. 과거를 시간이나 사건에 따라 나누는 것은 역사가들의 인간적 한계를 반영할 뿐이다. 역사학의 방법론은 4가지 측면을 갖고 있는데, 역사가의 기량이 높을수록 그런 측면들은 의식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또한 역사가는 2가지 이상의 측면에 동시에 관여할 수 있다. 그 4가지 측면이란 발견적 학습,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해석에 대한 지식, 연구, 저술이다.
처음 2가지는 간단히 생각할 수 있다.
발견적 학습은 훈련과 경험으로만 얻을 수 있는 연구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널리 채택되어왔다. 역사가의 경우, 발견적 학습은 필사본 수집에 대한 지식, 색인 카드를 만들고 자료를 분류하는 방법, 도서목록에 대한 지식 따위를 포함한다. 발견적 학습은 방법론의 다른 측면들, 예를 들면 같거나 비슷한 분야에 종사하는 역사가들의 능력에 대한 지식이나 문서자료를 신속하게 다루는 능력의 기초가 된다. 현재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해석을 알아야 할 필요성은 연구가 항상 알려진 것에서 출발하여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실무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한 역사가는 자신의 분야뿐 아니라 인접한 역사학 분야 및 역사학과 관련된 학문분야에서 이미 이루어진 성과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모든 경우의 성과는 '사실'과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역사가가 받아들이는 정도는 경우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역사가는 대개 자신의 분야에 해당되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현재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해석은 결코 무턱대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접한 역사학 분야에서는 사실과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내린 해석을 받아들이겠지만 발견적 학습과 그 자신의 일반적인 역사학 지식으로 그것을 수정하거나 한정한다.
인류학·경제학·지리학·자연과학·문헌학·심리학·사회학 등의 관련 분야에서는 반대되는 강력한 증거가 없는 한 그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의 기량과 지적인 정직성을 믿어야 한다. 물론 역사가가 역사학 이외의 학문에도 정통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고, 연구의 성격상 요구된다면 다른 학문에도 정통해야 한다.
역사연구는 역사가가 관여하고 있는 분야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작업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런 사건들에 대한 지식은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보전달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으며, 이런 정보들은 특정한 시대나 주제에 대한 사료(史料)를 형성한다. 역사가는 사건 자체를 결코 경험할 수 없고, 그가 입수할 수 있는 것은 사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기록 및 구전이나 사건의 최종결과인 사료이다. 이런 기록이나 최종 결과를 우리는 유물이나 형적 또는 사건의 흔적이라고 부른다.
이를 통해 역사가는 그 사건을 추론할 수 있지만 그 추론에 대한 확신의 정도는 다양하다. 따라서 흔적은 역사의 '사실'이고, 실제 사건은 사실을 바탕으로 추론한 결과이다. 역사연구는 당면문제와 관계가 있는 흔적들을 찾아내고, 그것이 적절한 흔적들을 더 많이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한 이런 흔적들을 토대로 추론하는 데 관여한다.
사료
사료는 문헌사료·물질사료·전승사료 등 세 부류로 나뉜다.
문헌사료는 다시 주관적인 사료와 공식사료로 나뉜다. 주관적인 사료는 개인의 눈을 통해 본 사건들, 따라서 그 개인이 해석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경우에는 대개 주관적인 사건 선정이나 동기 부여가 수반되게 마련이다. 공식사료는 거래 관계에서 작성된 기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개인간의 거래에서 국가간의 거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의 거래를 포함한다.
주어진 정보는 기본적으로 비개인적인 진술형태로 되어 있으며, 인과관계나 동기에 대해서는 지극히 피상적인 암시만 포함되어 있다. 사실상 주관적인 사료와 공식사료의 경계는 모호하여, 하나의 문서가 이 2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할 수 있다. 2번째 부류인 물질사료는 과거 인간활동이 낳은 물체로 이루어져 있다. 3번째 부류인 전승사료는 뒤에 기록되어 전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말이나 관습으로 전해 내려온 것을 포함한다.
가장 명백한 보기는 전통 관습, 자장가 같은 전승 동요, 민간 전승, 지명 등이다. 어떤 특정한 사료를 거기에 대응하는 다른 사료와 비교해보고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해석을 알면, 역사가는 대개 그 특정한 사료가 진실인지, 부분적으로 진실인지, 아니면 날조된 가짜인지를 알 수 있다. 그 사료가 진실이거나 부분적으로 진실이라 해도 문헌사료와 일부 전승사료에 포함되어 있는 주관적인 요소를 고려해야 하고, 오늘날 공식사료나 물질사료 또는 전승사료로 남아 있는 흔적을 토대로 사건 자체를 재구성하기는 어렵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사료의 분류는 본래 실용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서로 다른 부류에 속하는 사료를 다룰 때 필요한 서로 다른 기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명문이 새겨진 묘비는 역사가의 관심이 명문의 내용에 있느냐 아니면 돌 자체에 있느냐에 따라 문헌사료가 될 수도 있고 물질사료가 될 수도 있다. 연구의 성격에 따라서는 보조 학문분야에 대한 전문적 훈련이 필요할 수도 있다. 보조 학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고고학·서지학·연대학·고문서학·금석학·족보학·고서체학·인장학·원문비평학 등이다. 역사가가 사료에 씌어진 언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거의 말할 필요도 없다.
많은 역사가들은 사료를 편찬하는 데 시간의 일부를 바친다. 이것은 역사에 관한 저술이 아니지만 그 분야를 연구하는 다른 역사가들에게 유용하다. 그러나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사실을 모으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골동품 수집이며, 역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최종 결과는 역사가 자신의 저술이다.
사료 활용법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역사의 방법론이 아니라 철학에 속하는 문제이다.
역사라는 말 자체는 2가지 뜻을 지니고 있는데, 과거 및 사회가 과거에 겪은 경험이 그것이다. 사회가 무슨 이유로 과거의 경험을 활용하고 싶어하는지는 역사가의 관심사가 아니며 역사가의 임무는 사회가 과거의 경험을 이용할 수 있게 하고, 후세가 참조할 수 있도록 과거의 경험을 기록하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 경험을 활용하려면 그 경험의 중요한 요소들을 정확히 되살려야 하며, 그 요소들의 인과관계와 발생순서를 확정해야 한다.
역사가도 사회의 과거 경험을 다루는데 그와 비슷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흔적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하고, 자신의 작업과 관계가 있는 흔적들을 선택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확립하는 일은 역사가에게 다양한 선택의 자유를 허용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역사가의 성향이라는 주관적 요소가 개입하게 된다.
역사학에서는 이 주관적 요소를 배제할 수 없고, 역사가는 지적인 오류가 끼어들 여지를 되도록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사료를 다룰 때 필요한 것은 세심한 주의와 전문적 능력뿐이다. 따라서 지적인 오류가 끼어들 수 있는 곳은 주로 가설을 세우고 가설간의 관계를 확정하는 과정이다.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다른 역사가들의 견해는 지적인 오류가 있는지 없는지를 점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연구성과가 남에게 인정을 받으면 널리 통용되는 해석의 일부가 되고 때로는 정당한 역사로 간주되겠지만,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해석이 모두 그렇듯이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의한 수정을 면할 수는 없다.
역사의 방법론은 19~20세기에 좀더 명확히 체계적으로 서술되었지만, 때로는 먼 옛날의 역사가들이 이룩한 성과를 오늘날의 기준에 따라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방법론과 과거의 일반적인 방법론 사이에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중세의 저술은 대부분 문헌사료와 당시에 널리 인정된 해석을 무조건 따르기 때문에, 몇 세기 동안 선배 역사가의 저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19세기 이전에 유럽 역사가들의 대다수는 공식사료를 비교적 무시했지만 대체로 문헌사료를 수정하는 일에 착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근대적 방법론의 발전을 방해한 가장 큰 장애물은 다양한 역사해석이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역사를 문학의 한 형태로 여기는 관점은 역사를 상상력에 바탕을 둔 예술의 한 형태로 만들어 정확성보다는 오히려 우아함을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 '윤리적'인 역사관이다. 이 관점은 역사를 개인과 행동에 대한 가치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이것과 정반대되는 것이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객관적' 또는 '과학적' 역사이다.
객관적 역사는 사실 불가능하지만 이 역사관은 조사·연구의 필요성을 일반화시키고 보조학문을 발전시켰다. 역사를 선전 목적에 이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가장 노골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사실상 허구에 불과하게 되며 따라서 조사·연구도 수반되지 않는다. 좀더 교묘한 형태를 취할 경우에는 조사·연구의 정확성을 장려할 수도 있지만, 불리한 흔적들을 고의로 은폐하도록 조장하거나 관계를 해명할 때 지적인 속임수를 조장할 수도 있다.
역사가가 모든 사건과 관계를 예외없이 따라야 하는 법칙이나 선험론을 주장할 경우 이러한 조작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은 방법론과 역사 발전을 가로막는 중요한 장애물이 된다. 중세에는 인간사에 대한 신의 개입이라는 이론이 지지를 받았고, 오늘날의 많은 지역에는 마르크스 이론이 유행하고 있지만, 어느 쪽이든 역사를 선전 목적에 이용하는 것은 방법론과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중요한 장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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