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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32. 5. 27, 튀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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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06. 3. 17, 카이로 |
국적 | 아라비아 |
요약
최초로 비종교적인 역사철학을 발전시킨 아라비아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정식 이름은 Walī al-Dīn ⁽Abd ar-Raḥmān ibn Muḥammad ibn Muḥammad ibn Abī Bakr Muḥammad ibn al-Ḥasan ibn Khaldūn.
목차
접기-
초기생애
-
중기생애
- ┗ 교육과 외교관 생활
- ┗ 역사철학 〈역사서설〉
- ┗ 이집트 여행
- 후기생애
걸작 〈역사서설(歷史序說) Muqaddimah〉 등을 남겼고,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권에 대한 완벽한 역사서도 저술했다.
이슬람 사상사에서 전무후무한 인물이었던 이븐 할둔은 카이로에서 제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중의 한 사람인 알 마크리지는 당시에 만연한 인플레이션에 대한 분석에서 그의 스승과 같은 통찰력을 발휘했으며 그는 당시의 사회상황을 세부적으로 조명한 몇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15세기 이집트에서 역사서술이 괄목할 만하게 부활한 것을 이븐 할둔의 영향으로 보는 것은 크게 무리가 아니다. 이후 16, 17세기의 오스만 제국에서 몇몇 탁월한 학자들과 정치가들이 이븐 할둔의 저작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역사서설〉은 튀르크어로 부분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븐 할둔의 비견할 수 없는 천재성에 합당할 만큼 세계적인 관심이 그에게 쏠리게 된 것은 〈역사서설〉의 프랑스어 완역본이 나온 186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초기생애
이븐 할둔은 1332년 튀니스에서 태어났다. 아직도 거의 변함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는 튀니스의 칼두니야 거리는 이븐 할둔의 생가로 믿어지는 집이 있다. 이븐 할둔의 자서전 〈앗 타리프 비 이븐 할둔at-Ta⁽rῑf bi-Ibn Khaldūn〉에 의하면, 남부 아라비아의 가문이었던 할둔가(家)의 혈통이라고 주장하는 집안이 아랍인의 정복시대 초기에 스페인으로 건너와 카르모나에 정착했다.
그후 이 가문은 세비야로 옮겨갔고, 9세기에 일어난 내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할둔가는 세비야의 지도적인 세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4세기 동안 이븐 할둔가는 우마이야·알모라비드·알모하드 왕조에 걸쳐 정치·행정 분야에서 고위직을 계속해서 유지했다. 할둔가의 일부는 군대에 들어가 그중 몇몇은 앗잘라카 전투(1086)에서 전사하기도 했다. 이 전투는 그리스도교도들의 스페인 재정복을 일시적으로 저지시켰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세비야와 코르도바가 함락되기 직전인 1248년에 이븐 할둔가와 많은 주민들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모로코의 북부 해안에 있는 사브타(지금의 스페인 영토인 세우타)에 상륙했다.
스페인에서 피난온 사람들은 북아프리카 지방민들보다 사회·경제적으로 훨씬 높은 신분층의 사람들이었다. 할둔가는 곧바로 튀니스에서 주요한 행정직위를 차지했다. 이븐 할둔의 아버지도 행정관이자 군인이었으나 얼마 안 있어 그만두고 신학·법률·문학에 전념했다.
이븐 할둔은 이렇게 적었다. "그분은 아랍어에 대해 뛰어난 지식을 가졌고 아랍어의 다양한 시 형식을 이해하고 계셨다. 문학자들이 논쟁중인 문제들에 대해 아버지의 의견을 묻고, 자신들의 작품을 아버지에게 주던 일들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1349년에 튀니스를 휩쓴 흑사병으로 그는 부모를 잃었다.
중기생애
교육과 외교관 생활
이븐 할둔은 그가 공부하던 시절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다.
자신이 읽은 주요 책의 목록과 그의 스승들의 삶과 저술까지도 기술했다. 그는 〈코란〉을 암송하고 중요한 〈코란〉 주석들을 공부했으며 이슬람 법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았다. 아랍문학의 걸작들에 정통함으로써 깨끗하고 힘있는 문체를 닦았고 유려한 운문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길렀다. 이러한 시작(詩作) 능력은 이후 여러 군주들에게 찬송과 탄원의 시를 바칠 때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도서목록에 철학·역사·지리, 그밖의 사회과학에 관한 책들이 빠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이러한 주제들을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역사가들은 그가 12세기 아랍의 철학자인 이븐 루슈드가 쓴 몇 권의 저서들의 요약집을 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 그러나 이들 분야에 대한 이븐 할둔의 인상적인 지식들은 대부분 그가 정식교육을 마친 후에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20세가 되자 그는 튀니스 궁정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3년 후에는 페스에서 모로코 술탄의 서기관이 되었다. 그무렵 그는 결혼했다. 그러나 2년간 봉직한 뒤 모반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투옥되었다. 거의 2년 만에 석방되어 새로운 군주가 그를 기용했지만 다시 미움을 받았다. 그는 모로코를 떠나 그라나다로 건너갔다. 그라나다의 이슬람 군주는 페스에서 전에 잠시 섬겼던 사람이었고, 그의 절친한 친구이며 탁월한 작가인 이븐 알 하티브가 그곳의 재상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븐 할둔은 32세였다. 다음해에 이븐 할둔은 카스티야의 잔인왕 페드로와 평화조약을 체결하도록 세비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나의 선조들의 역사적 기념물들을 보았다. 페드로는 나를 극진히 대접했고 내 앞에서 만족스러움을 표시했으며 우리 조상들의 탁월함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페드로는 그의 선조들의 영지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고 그에게 공직까지 제의했으나 이븐 할둔은 완곡하게 사양했다. 그는 그라나다의 술탄이 하사한 마을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신변이 보다 안전해진 것을 느낀 그는 그때까지 안전을 위해 콩스탕틴에 두고 왔던 가족들을 데려왔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을 가지고 '적들과 음모가들'이 전권을 휘두르던 총리 이븐 알 하티브와 그 사이를 이간하고 그로 하여금 이븐 할둔의 충성심을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음모가들의 술책은 당대의 가장 뛰어난 아랍 지식인이었던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에 대해 느끼던 가시적인 질투심 때문에 아마도 훨씬 쉽게 성공했을 것이다. 이븐 할둔은 또다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그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군주를 바꾸어 일하면서 베자이아(부기)에서 틸림산(틀렘센)으로, 비스크라와 페스를 거쳐 다시금 그라나다로 옮겨 다녔다.
그라나다에서 그는 왕명으로 처형을 당하게 된 오랜 경쟁자이자 친구인 이븐 알 하티브를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이 기간 동안 이븐 할둔은 총리로도 봉직했고 다른 여러 행정직도 맡았다. 토벌대를 이끌기도 했고, 유목민들에게 강탈당해 발가벗기움을 당하기도 했으며, 잠시동안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극심한 유전(流轉)은 당시의 사회가 불안정했음을 반영한다.
북아프리카 전부와 스페인의 이슬람 지역을 통치했던 알모하드 제국은 13세기 중반에 멸망했다. 그결과 모로코·알제리·튀니지가 형성되는 격동의 과정이 계속되었다. 전쟁과 반란과 음모가 비일비재했으며, 어떤 사람의 생활과 직업도 안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븐 할둔은 이밖에도 2가지 단점이 더 있었다. 침착하지 못한 성격과 그로 인해 사람을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특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받든 사람과 자기를 이간질시키는 '음모가'들에 대해 그가 끊임없이 불평했던 사실로도 잘 알 수 있다.
역사철학 〈역사서설〉
1375년에 소모적인 정치 업무를 벗어나 혼자 있기를 갈망한 이븐 할둔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아울라드 아리프 부족으로 도망쳐버렸다. 아울라드 아리프는 현재 알제리 프렌다 읍 근처의 칼라트이븐살라마라는 한 성 안에 그와 그의 가족들을 안전하게 숨겨주었다. 거기에서 그는 '모든 일로부터 단절된 채' 4년간을 지내면서 그의 방대한 명저인 〈역사서설〉을 저술했다. 그의 본래의 의도는(뒤에 달성되었지만) 아랍인들과 베르베르족의 전체 역사를 서술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작업을 하기 전에 역사적 진실과 과오를 구분해주는 기준점을 제시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를 위해서 그는 역사학의 방법론을 거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역사철학을 세상에 내놓았다. 20세기 영국의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는 그의 역사철학에 대해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사람의 정신 속에서도 일찍이 품어볼 수 없었던 의심의 여지없는 가장 위대한 작품이었다"고 쓰고 있다.
이 말은 그 전에 로버트 프린트가 이븐 할둔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찬사보다도 더 나은 것이었다(역사편찬). "역사이론가로서의 그에게 300여 년 뒤에 비코가 태어날 때까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그와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투스도 그에게 필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븐 할둔은 여기서 더욱 전진하여 사회와 사회변화의 성격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그가 분명하게 새로운 과학으로 보았던 것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것을 〈문화학 ⁽Ilm al-⁽umrān〉이라고 하고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이 학문은……문화 자체의 주제, 바꾸어 말하면 인간사회와 그 자체의 문제, 즉 사회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변형을 다루고 있다." 아랍의 학자인 사티 알 후스리가 이븐 할둔에 대해 언급한 다음 내용은 사실상 적절한 것이다. 즉 〈역사서설〉제1권에서 이븐 할둔은 일반사회학을 개관했고, 제2·3권에서는 정치사회학을, 제4권에서는 도시사회학을, 제5권에서는 경제사회학을, 그리고 제6권에서는 지식사회학을 다루었다.
이 작품은 역사·경제·정치·교육에 관한 탁월한 견해들로 가득 차 있다. 작품의 내용은 아사비야(⁽aṣabῑyah), 즉 그의 중심개념인 집단연대의식에 근거해 상호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연대의식은 종족이나 보다 작은 친족집단 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화되고 확대될 수도 있다. 이러한 연대의식이야말로 지배집단으로 하여금 권력을 잡게 만드는 추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정신적·사회학적·경제적·정치적 요소들이 복잡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븐 할둔은 이를 극히 세밀하게 분석한다. 즉 연대의식은 불가피하게 약화되어간다. 이러한 연대의식의 약화가 바로 왕국과 제국의 몰락을 예고하고, 보다 강렬한 연대의식을 가진 집단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국과 제국의 출범을 준비해준다는 것이다.
이븐 할둔의 독창성은 실로 놀라운 것이다.
이라크계 미국인 학자인 무신 마디는 이븐 할둔의 접근방법과 근본개념들이 이슬람 신학과 철학, 특히 이븐 루슈드에 바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븐 할둔은 물론 그의 선조들 때부터 쌓아온 지식에서 종횡으로 도움을 받았고 선조들의 사고에서 분명히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선조들 중 어느 누구도, 특히 그리스와 라틴계의 어떤 학자들도 이븐 할둔처럼 사회적 현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지 못했으며, 역사의 전개와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는 무수한 사건들의 연결고리(외관상으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를 그처럼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역사철학의 기본적인 견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분명히 이븐 할둔에게 있어 역사는 번영과 쇠락의 끊임없는 순환이었으며 원시시대에서 문명사회로 진행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것보다 진보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자신의 시대를 개관하면서 역사에서 뚜렷한 전환점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또한 그가 그러한 전환점을 목도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상황이 전반적으로 변화할 때……다시 창조되어 새롭게 다가오는 것처럼 세계는 전개된다." 그는 이러한 거대한 변화를 초래한 주요원인이 이슬람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준 흑사병이라는 것과 또 몽골족의 침입이 가져온 영향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와 함께 그는 유럽의 발전, 북아프리카의 항구들에 몰려든 상인과 선박들, 이슬람 군대에 용병으로 고용된 병사들로부터 감명을 받았을 것이었다.
이집트 여행
칼라트이븐살라마에 머무는 동안 이븐 할둔은 〈역사서설〉의 초고를 완성했을 뿐 아니라 그의 방대한 역사서 〈교훈의 책 Kitāb al-⁽ibar〉의 일부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역사서설〉처럼 세계적인 의미를 갖지는 못하지만, 북아프리카 이슬람 역사를 가장 잘 서술한 유일한 사료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에는 다른 많은 서적과 자료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아마도 보다 활동적인 정치세계에 대한 향수도 작용했겠지만)그는 도시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때마침 악화되어가던 신병을 이유로 그는 지금까지의 피신처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튀니스로 되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고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역사서의 많은 부분을 완성시키면서 오로지 학자생활에만 열중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금 그곳의 어떤 저명한 학자의 시샘을 받았고 군주에게도 의심을 샀다. 그래서 50세 때인 1382년에 그는 표면상으로는 메카 순례를 목적으로 이집트로 항해하는 허가를 받았다.
40일의 항해 끝에 알렉산드리아에 닿았고 조금 후에 오늘날처럼 당시에도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크고 풍요로운 도시 카이로에 도착했다. 그가 "지구상의 최대 도시, 세계의 정원, 국가들이 모이는 곳,……이슬람의 궁전, 권세의 장소……를 보았노라"라고 말했듯이 이 도시는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몇몇 저명한 북아프리카인들이 카이로에서 돌아왔을 때 그가 물어본 데 대하여, 그들이 "카이로를 보지 않은 자는 이슬람의 위력을 알 수 없다"라고 한 그의 대답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서 그의 카이로에 대한 호기심은 분명히 오래 계속되었다. 며칠 만에 "나는 줄 것이 별로 없는데도 얻을 것을 찾아 학자들이 내게 몰려들었고 나의 변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유명한 이슬람 대학교인 알아자르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븐 할둔은 이집트의 새로운 맘루크 통치자인 바르쿠크와 한두 번의 짧은 오해를 빼고는 사이좋게 지냈다.
바르쿠크는 얼마 안 있어서 이븐 할둔을 쿠암히야대학의 법률학교수로 임명했고, 또한 5개월 만에 그를 수니파 이슬람의 4대 법학파들 중의 하나인 말리키야파의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바르쿠크는 이븐 할둔이 가족과 결합할 수 있도록 튀니스의 통치자에게 잘 말해주었다. 그러나 가족을 실은 배가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서 침몰하여 그들은 모두 익사했다.
후기생애
말년
이븐 할둔은 재판관의 직무를 매우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는 재판은 오직 각 소송의 시비곡직에 의해서만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사법행정에서 그동안 나타난 수많은 악습을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관대하고 태평한 이집트인들을 어느정도 완고하고 금욕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생각은 그의 한 제자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 "이집트인들은 '심판의 날'이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 어쨌든 모든 지역에서 나를 둘러싸고 문제들이 야기되었으며 이것들은 나와 통치자들 사이의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해임되었다가 다시 대법관을 역임했지만 그것은 말년의 단 1년 동안이었다.
그러나 다른 교수직을 얻은 그는(카이로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는 많았다고 쓰고 있음)가르치고 저술하며, 〈역사서설〉의 교정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메카 순례여행도 했다. 갈 때는 수에즈 근처의 앗타우르에서 배편을 이용했고 올 때는 상(上)이집트를 경유하여 왔다. 몇 년 뒤에 그는 다마스쿠스와 팔레스타인의 성도(聖都)들을 찾아갔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동부 아랍 세계에 대한 지식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그가 헤브론에 있는 아브라함의 무덤과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교회를 방문했던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곳은 모두 아브라함과 예수를 예언자로 받들고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교도들이 사실로 믿지 않는, '그리스도교도들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주장하는 장소'인 예수의 성묘(聖墓)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이븐 할둔은 1389년의 궁정반란에서 작은 역할을 강요당했는데 협박 때문에 그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바르쿠크가 그에게 유감을 갖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븐 할둔은 그를 숭앙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많은 방문객을 받으면서 노년의 조용한 기쁨을 평화스럽게 누리는, 원숙하고 현명하며 또한 존경받는 학자의 모습을 길이 간직했을 것이다.
그는 사실상 그러한 생활을 누리기에 충분했지만 그의 운명은 가장 극적인 상황 속으로 그를 끌어들였다.
티무르의 보호
1400년에 티무르가 이끄는 무적의 타타르 유목민들이 시리아에 침입했다.
이집트의 새로운 술탄인 파라지는 이븐 할둔과 그밖의 명사들을 대동하고 티무르와 대적하기 위해 출정했다. 그러나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맘루크의 군대는 이븐 할둔을 포위된 다마스쿠스에 남겨둔 채, 이집트로 귀환해버렸다. 상황은 곧 절망적이 되었고 도시의 유력한 문관(文官)들은 티무르와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 도중에 티무르는 이븐 할둔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즉시 밧줄을 통해 성벽 밖으로 내려보내졌다.
이븐 할둔은 티무르의 막사에서 약 7주간을 보냈다. 이때의 일들에 대해 그는 자서전에 자세히 기록했다. 티무르는 존경심을 가지고 그를 대우했다. 역사가 이븐 할둔은 잔인한 세계 정복가의 호감을 사기 위해 자신의 온갖 지식을 다 동원했고 온갖 아부를 다했다. 더욱 원대한 정복을 꿈꾸고 있던 티무르는 북아프리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고, 이것 외에도 칼리프 제도와 '아사비야'에 대해서 간단한 강연을 하게 했을 뿐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서면 보고서까지 만들게 했다. 이븐 할둔은 티무르의 호의를 이용하여 다마스쿠스에 남겨진 문관들의 자유행동권과 그 자신의 이집트 귀환을 허가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이 도시가 약탈당하고 도시의 거대한 이슬람 사원이 불에 탄 다음이었다. 티무르와 선물을 교환한 다음 그는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해안에 도착할 때까지 한 무리의 베두인족에게 강탈과 벌거벗기움을 당한 것을 비롯하여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해안에서 그는 '룸의 술탄, 이븐 오스만이 이집트의 술탄에게 보내는 사절이 탄 배'를 얻어타고 가자에 도착했다. 이 일을 통해 그는 머지않아 중동의 지배자가 될 오스만 왕조와 제일먼저 접촉할 수 있었다.
카이로까지의 나머지 여정은 마치 그의 남은 생애가 그랬듯이 매우 평온했다. 그는 1406년에 죽어 카이로의 주(主) 성문 가운데 하나인 바브안나스르 외곽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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