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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시대의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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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과 종교 논쟁가들이 역사학에 부여한 추진력은 18세기초에 거의 다 소진되었다.

질적 수준에서 판단할 때 18세기는 대체로 역사가들이 성공을 거둔 시대가 아니었지만, 과거의 역사학이 갖고 있던 몇 가지 결함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역사저술을 발표하는 것이 과거보다 더 안전해지고 쉬워졌다. 이처럼 자유가 많아지지 않았다면 18세기의 전형인 급진적인 '철학적' 역사학은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저술이 그때까지도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교회의 적대적인 내용인 나폴리 역사(1723)의 저자 피에트로 잔노네는 종교 재판소의 추적을 받고 12년 동안 투옥되어 있다가 1748년에 감옥에서 죽었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역사가로서 잔노네를 도와주려고 애쓴 루도비토 무라토리조차도 저서의 일부를 판금당할 위험에 빠졌지만, 교황 베네딕투스 14세가 직접 개입해 위기를 모면했다.

프랑스에서는 1714년 니콜라 프레레가 프랑크족은 원래 게르만 부족들의 연합체에 불과하며 그보다 뛰어난 조상들의 후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루이 14세의 노여움을 사서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다. 루이의 후계자들 시대에는 그처럼 터무니없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지만, 교회나 정부를 비판한 사람들은 자주 곤경에 빠졌다.

반면에 영국·네덜란드·스위스 및 독일의 일부지방은 대부분의 저술을 마음놓고 발표할 수 있는 안전한 오아시스였다.

18세기에 유럽의 역사학이 진정으로 새로워진 것은 그것이 자연과학의 발전에 자극을 받았고, 인간사회의 발전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에 기초를 두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역사학의 주요특징들은 유럽 이외의 다른 대륙에 대한 관심, 모든 인류 역사는 하나라는 의식, 특정한 시대나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을 대담하게 일반화할 수 있는 능력, 인류 문명의 진보와 관련된 주제에 대한 선호 등이었다.

프랑스의 콩도르세는 1794년에 쓴 인간정신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 개요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 전반을 9단계로 나누었는데, 위대한 발명이나 지리적 발견이 이루어진 해를 각 시기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합리주의적'인 역사학의 결점은 자주 지적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사상가들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각 사회를 응집력있는 개별단위로 보면서 각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의 다양한 측면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론을 체계화시켰다는 것이다.

나폴리의 가톨릭교도인 잠바티스타 비코는 사회의 한 단계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작용하는 복잡한 영향력을 동시대인들보다 훨씬 예민하게 의식했다. 그는 로마 역사의 초기 단계에 이루어진 이런 전환을 재구성하면서 각 시대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긋지 않았다. 같은 나폴리 사람인 잔노네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로마 법을 공부한 이유는 로마 법 자체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사회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잔노네의 영향을 많이 받은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스키외는 사실상 역사가는 아니었지만 역사적 현실을 인식하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쓴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1748)은 다른 어느 책보다도 그의 동시대인들로 하여금 각 사회를 이루고 있는 복잡한 요소들을 심사숙고하게 만들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이 어떠한 역사를 써야 할지를 결정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제도 내에서 사회제도와 결부되며, 또 그것에 의해 설명되는 역사'였다.

기번은 '철학적' 역사학의 걸작인 〈로마 제국 쇠망사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1776~88)에서 이 꿈을 실현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인류의 진보라는 문제에 골몰해 있었다.

인류가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다는 믿음은 18세기 중엽에 프랑스의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와 스코틀랜드의 애덤 스미스가 공개적으로 밝혔는데, 이들이 서로 관계를 가진 것 같지는 않다. 기번은 이들 두 사상가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의 저서를 읽었고 그들을 알고 있었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인류 역사 전반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목적을 부여해줄 것이었다. 기번은 로마 제국이 쇠퇴한 원인을 해명함으로써, 그가 살고 있던 당시의 유럽이 로마 제국보다 훨씬 높은 발전단계에 이르러 있으며, 고대세계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18세기에 역사학은 대학과는 거의 관계를 맺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의 괴팅겐 같은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역사학파가 끊이지 않고 발전할 수 없었다. 18세기 역사가들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일부는 동시대인들보다 오히려 19세기의 후계자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기번은 학구적 골동품을 수집한 연구가들의 방대한 자료를 '합리주의' 역사에 활용하는 데 선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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