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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새로운 시대에 속해 있다는 인식이었다.
르네상스 학자와 예술가들은 아직 무한한 진보의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하지 않았지만, 주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속도를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이들은 고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고대 그리스·로마의 저자들을 연구하고 그들에게서 영감을 얻는 일에서 귀중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새로운 비판적 견해를 발전시키고 중세의 연대기 작가들을 비판했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인 플라비오 비온도(1388~1463)는 몬머스의 제프리의 저서를 논하면서, "나는 이토록 거짓말과 경박한 말로 가득 차 있는 글을 지금껏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15세기에 이르자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은 과거의 모든 유물을 체계적으로 모으면 전체 문명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문주의자들은 지형학적인 길잡이, 공문서와 사문서, 그때까지 남아 있던 건축물과 비문 및 주화에 대한 연구를 비롯하여 다양하고 폭넓은 자료를 역사학에 활용했다. 인문주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먼 과거의 역사를 충분히 쓸 수 있다고 확신했고, 이런 자신감은 고대 역사가들보다 훨씬 더 강했다. 실제로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상당히 인상적인 저술들을 남겼다.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1483~1540)가 1536년부터 쓰기 시작한 〈이탈리아사 Storia d'Italia〉는 1494~1534년을 다룬 가장 권위있는 이탈리아 역사서로 인정받게 되었다(구이차르디니). 구이차르디니는 르네상스 시대 역사가 중에 투키디데스에 견줄 만한 인물이다. 그는 1494년에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략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탈리아를 잇따라 덮친 비극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사건의 논리적 원인을 규명하려는 이런 욕구는 최고 수준의 르네상스 역사학이 지닌 가장 성숙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르네상스 역사가들이 차츰 발전하고 있는 민족국가의 역사와 그것을 기록하는 데 애국적인 자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마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늦게 통일을 이룩한 스페인과 폴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역사학이 막 이룩한 결속을 찬양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독일에서도 인문주의 역사가들은 계속된 정치적 분열의 중요성을 축소함으로써 민족적 동질감을 회복하려 했다.
종교개혁은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일부는 우발적인 것이었다. 우선 프로테스탄트인 종교개혁가들은 역사에 호소함으로써 자신들의 견해를 정당화할 필요성을 느꼈다(프로테스탄티즘) . 프랜시스 베이컨이 날카롭게 간파했듯이, 마르틴 루터는 "오랫동안 도서관에서 잠을 자고 있던 고대 저자들의 저술이 널리 읽히도록…… 모든 고대를 잠에서 깨워 과거를 그의 원군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황의 통치권을 반박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역사 전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고쳐 쓰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우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따라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교회인 하느님의 나라는 이따금 적의 그림자에 가려 빛을 잃을 때도 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존재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했듯이 적은 이교도나 이단자만은 아니라고 종교개혁가들은 주장했다. 그들 시대에 교황의 권위를 지지하는 사람과 존 위클리프(1320~84)나 얀 후스(1369~1415)에 대한 박해자들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한 사람들도 이 무리에 포함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옹호자들과 그 역사가들은 재빨리 반격에 나섰고 그후 여러 세대에 걸쳐 글로 논쟁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역사에 관하여 가톨릭교도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벌어진 논쟁 덕분에 양쪽은 서로에 관한 자료를 많이 모으게 되었다. 이 자료를 편찬한 저자들은 권위있는 전기와 문서를 방대하게 수집·정리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종교 논쟁가들에 의해 인문주의의 역사학에서 사라졌던 습관, 즉 많은 참조사항을 제시하고 정확한 인용문을 길게 나열하는 습관이 다시 도입되었다.
서로 대립하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권으로 된 방대한 저술을 제작하여 널리 배포했다.
이 모든 저술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만, 일부는 나름대로 인상적이었다. 존 폭스(1517~87)의 〈순교자들의 책 Book of Martyrs〉(1563)에는 튜더 왕조의 메리 여왕 시절에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개신교가 당한 박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많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영국 프로테스탄트에게 영향을 주었다. 가톨릭 쪽에서는 고위 성직자인 자크 베니뉴 보쉬에(1627~1704)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저서가 강한 영향력을 가졌다.
가톨릭 수사들도 세속적인 교황 정치의 어두운 모습과 예수회의 비양심적인 음모를 고발했다. 수사인 프라 파올로 사르피가 쓴 트리엔트 공의회의 역사는 18세기 역사가들의 교회비판에 영향을 주었다.
종교 이외에 16세기에는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역사적 시각이 발전했다. 사람들은 인간사와 관련된 모든 학문분야에는 역사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법률사가인 프랑수아 보두앵은 1561년에 "나는 법률 서적이 역사의 산물임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모든 학문분야에서 거기에 어울리는 역사기법이 발달했다. 16세기가 지나는 동안 프랑스 법과대학에서는 매우 독창적이고 복잡한 역사가 저술되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들의 저술에도 불구하고 16, 17세기의 특징은 지적 관심의 세속화 현상이었다. 비종교적인 학문은 이제 신학보다 더 지식인을 사로잡는 개념들을 낳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역사는 가장 인기있는 문학분야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점점 더 많은 대중이 역사를 읽게 되었다.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책들의 목록이 1657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도서목록을 보면 역사책이 많은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1460~1700년 유럽 전역에서 주요한 고대역사가 17명의 저서가 최소한 250만 부나 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장애물의 하나는 통치자들이 그들의 통치에 불리한 출판물에 대한 적개심을 품은 것이었다. 영향력있는 독자층이 성장하자 통치자들은 역사에 관한 저술을 점점 불신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537~74년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가 실시한 검열은 피렌체 역사학의 쇠퇴를 촉진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것도 통치자들의 비위에 거슬릴 수 있었다. 1599년에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200년 전 왕위에서 쫓겨난 리처드 2세의 퇴위과정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저자를 비난했다. 고초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고도의 지성을 갖춘 학자들조차도 처음부터 몸을 사려 편파적인 역사가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위대한 법학자인 후고 그로티우스(1583~1645)는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전쟁사에서 종교적 측면에 대한 논의를 피했다(그로티우스). 스웨덴 정복의 역사를 쓴 사무엘 푸펜도르프는 17세기 스웨덴의 국내 정세를 다루지 않았다.
17세기에 수학을 크게 발전시킨 학자들은 그들의 업적이 궁극적으로 인류에게 자연환경에 대한 새로운 지배력을 부여해주리라고 확신했다.
특히 프랜시스 베이컨과 르네 데카르트는 그 점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낙관주의는 계속적인 진보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뒷받침해주는 토대가 되었는데,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19세기의 단호하고도 자신 만만한 역사학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17세기의 주요 사상가와 과학자들의 대부분이 역사에 대해 취한 태도는 당시 역사서술의 발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베이컨이 쓴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전기는 읽기 쉽고 재미있으며 합리적으로 씌어졌지만 정확성에는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베이컨은 헨리가 죽은 해를 1년 앞당겼고,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는 데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위대한 수학자였지만, 과학을 역사학에 적용하려고 시도한 결과 그의 역사는 살아 있는 인간이 거의 다 배제된 기계적 구조가 되었다.
17세기의 역사 비평가들은 대부분 다른 것을 우선으로 삼는 사람들이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역사가들이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학설을 공격하는 데 주로 관심을 보였다.
17세기말에 가장 성공적으로 역사를 옹호한 사람들은 매우 학구적인 가톨릭 교단 사람들이었다. 가톨릭교는 프로테스탄트보다 훨씬 더 전통에 권위의 기초를 두고 있었다. 장 마비용(1632~1707) 같은 가톨릭 학자들에게는 역사를 옹호하는 것이 사실상 자신의 종교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역사가들이 과학적으로 논증 가능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결정적인 출판물은 마비용의 〈고문서학 De Re Diplomatica〉(1681)이었다.
이 저서에서 마비용은 강력한 비판적 지성을 활용하여, 중세 기록의 신뢰성을 입증하는 데 적용할 보편적 규칙을 고안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문서가 진짜임을 증명하려면 단편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문서의 모든 측면이 정확한 일관성을 지니는가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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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학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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