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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다른 표기 언어 Preussen , <독>Preußen

요약 지리적 경계는 3가지 단계로 나뉜다. 원래 발틱 해 남동부 해안에 프로이센인들이 살던 지역으로 폴란드인과 독일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1701년부터는 호엔촐레른 왕가가 베를린을 수도로 프로이센 왕국을 세운 후 1871년 독일의 통일을 주도하여 이를 달성했다. 1918년 호엔촐레른 가문이 몰락한 뒤 왕국의 대부분 지역에 여러 개의 주들이 생겨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군이 이 주들을 모두 없앴다.
프로이센 토착민들의 사용 언어는 발틱 언어군에 속하고 혈통적으로 라트비아·리투아니아인과 가까웠다. 13세기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14세기 중반에 프로이센 주민 대부분이 독일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지리적 경계는 역사가 흐르는 동안 자주 바뀌었으나 크게 3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원래는 발틱 해 남동부 해안에 프로이센인들이 살던 지역으로 이곳에 살던 프로이센 토착민들은 중세 때 폴란드인과 독일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701년부터는 독일 왕가인 호엔촐레른 가문이 베를린을 수도로 왕국을 세워 프로이센 지방과 브란덴부르크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다.

Flag of Preussen 1892-1918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프로이센 왕국은 18, 19세기에 들어와 독일 북부 지역의 대부분과 폴란드 서부 지역을 차지하고 독일의 통일을 주도하여 1871년 이를 달성시켰다. 1918년 호엔촐레른 가문이 몰락한 뒤 옛 왕국의 대부분 지역에 여러 개의 주(Land)들이 생겨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연합군은 전쟁에 진 독일을 정치적으로 개편하는 작업의 하나로 1947년 이 주들을 모두 없앴다.

프로이센 토착민들은 주로 사냥을 즐겨하고 가축을 키웠으며, 사용 언어는 인도유럽어족의 발틱 언어군에 속한다. 혈통상으로 라트비아·리투아니아인과 가까우며 울창한 삼림지대였던 비수아 강과 니멘 강 하류 지역에서 부족을 이루고 살았다. 사회조직은 계층화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도 일부 있지만 전반적으로 느슨했으며, 그리스도교는 아직 전파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일찍이 성 아달베르트나 쿠베르푸르트의 성 부르노와 같은 사람들이 11세기말 프로이센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려고 했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13세기에 들어와 튜튼 기사단에 소속된 독일인 기사들이 이 프로이센 토착민들을 정복해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고, 폴란드 마조비아의 콘라트 공은 프로이센인들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도움을 준 대가로 튜튼 기사단에게 프로이센 땅을 선사했다.

기사단은 프로이센 지방을 모두 정복하고 독일인 귀족들을 위해 성을 쌓았으며 독일 농민들을 대거 프로이센으로 이주시켜 경작하도록 했다. 14세기 중반에 이르자 프로이센 주민의 대부분이 독일어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옛 프로이센어는 17세기에 들어와 토착민들이 모두 독일인과 동화되면서 사라졌다.

프로이센 공령(公領)과 프로이센 왕국 시대

프로이센 지역 튜튼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인 호엔촐레른가의 알브레히트는 루터파로 개종하고 1525년에 자신의 봉토를 기사단에서 분리하여 자신이 직접 다스리는 공작령으로 만들었다.

알브레히트(Albrecht)

독일의 귀족으로, 호엔촐레른 왕가 출신 초대 프로이센 공작이며, 37대 튜턴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 Lucas Cranach the Elder/wikipedia | Public Domain

이때부터 1701년까지 이 공작령(동프로이센)은 프로이센 공령으로 불리게 되었다. 알브레히트의 아들로서 이 공령을 상속받은 알베르히트 프리드리히가 1618년 자식이 없이 죽자 공령은 그의 맏사위이자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선제후(選帝侯)인 요한 지기스문트에게 넘어갔다.

프로이센 공령과 브란덴부르크의 결합은 호엔촐레른 왕가가 유럽 강국의 대열에 끼기 위해 반드시 이룩해야 할 과제였다. 요한 지기스문트의 손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1640~88 재위)는 스웨덴-폴란드 전쟁(1655~60)이 벌어지는 동안 군사 개입과 외교 노력을 통해 폴란드와 올리바 강화조약(1660)을 맺어 프로이센 공령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호엔촐레른가는 프로이센 공령에 대한 주권을 획득했으나 브란덴부르크를 비롯해 독일 안에 있는 다른 영토는 독일 제국 일부로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이들 지역에 대해 명목상의 종주권을 갖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와 더불어 중앙집권화된 행정체계를 확립했으며 귀족들에게서 공국의 재정적 수입원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았다(제1차 북방전쟁). 대선제후의 아들인 프리드리히(1688~1713 재위)는 1701년 1월 18일 리니히스베르크에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은 스스로를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라 부르며 왕의 위엄을 확고히 갖춘 일이다.

호엔촐레른가의 다른 영토는 명목상으로는 독일 제국의 테두리 안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종주권을 갖고 있었으나 얼마 안 되어 사실상 프로이센 왕국에 속하는 영토로 인정받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기 얼마 전인 1713년 왕위에 올라 뫼즈 강 연안에 있는 북부 헬데르란트 지역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지대에 있는 뇌샤텔과 발랭장 공국을 양도받았다.

그는 '대북방전쟁'에도 가담하여 포메른 서부지방의 상당 부분을 얻었다(1720). 또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의 군대와 관료제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행정조직의 개편을 통해 군사·재정·경제 분야의 협조체제를 한층 더 강화했으며 국가의 모든 일을 다루었다. 그의 전제적인 통치 성향과 일에 대한 몰두는 절대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1780~86 재위)는 유럽 최고의 훈련을 받은 군대와 800만 탈러(독일의 옛 화폐단위)에 이르는 재정자금, 그리고 대규모의 식민 사업(특히 동프로이센)을 통해 개발한 비옥한 영지등과 함께 근면·검소하고 양심적인 관료들을 부왕에게서 물려받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이 막 이룩한 국력을 이용해 야심적이지만 위험스런 외교정책을 벌여나갔다.

볼테르는 프리드리히 2세를 가리켜 계몽주의의 이상인 평화를 구현하는 '철학자 왕'이라고 갈채를 보냈으나, 그는 왕위에 오른 지 7개월도 안 된 1740년 11월 슐레지엔을 공격하여 전유럽을 놀라게 했다. 이같은 대담한 공격으로 인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고, 그뒤에도 슐레지엔에 대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분쟁은 몇 차례 불안한 휴전을 거치면서 계속되다가 1763년 7년전쟁이 종결되면서 끝났다.

슐레지엔은 여러 도시들이 번성하여 경제적으로 발전된 지방이었기 때문에 프로이센으로서는 이곳을 얻었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두 차례의 전쟁을 통해 군사적 천재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을 유럽 강대국 대열에 끼게 했다. 그는 슐레지엔말고도 북해 연안에 있는 동(東)프리슬란트를 획득했고, 1772년에는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참가해 서프로이센, 즉 폴란드에 속했던 프로이센 왕령을 차지해 동프로이센(프로이센 공령)과 서쪽에 있는 나머지 영토를 지역적으로 서로 연결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선왕이 만들어놓은 행정 조직을 바꾸지 않았으나 사법제도와 교육제도를 개선하고 과학과 예술을 장려했다.

프랑스 혁명 시대의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1786~97 재위)는 숙부였던 선왕만큼 뛰어난 통치자는 아니었다.

그는 독일 남부에 있는 안스바흐와 바이로이트 변경백(邊境伯)의 영지들을 구입하고 동부에서는 제2·3차 폴란드 분할에 참가해 그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프랑스 혁명군에게는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바젤 평화 조약(1795)을 맺어 프랑스가 라인 강 서쪽 독일 땅을 차지하는 데 동의했으며, 선왕들에 비해 국가 경제를 신중하게 관리하지 못해 결국 프로이센을 재정혼란에 빠지게 했다.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1797~1840 재위)는 처음에는 프랑스와 나폴레옹에 대해 신중하고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했으나 마침내 1806년 프랑스와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시기적으로 너무 늦은 것이어서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에게 패배했고 그뒤 프로이센의 국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프로이센은 틸지트 조약(1807)으로 엘베 강 서쪽에 있는 모든 영토와 제1차 폴란드 분할 때 획득한 영토의 남쪽 지역을 비롯해 제2·3차 폴란드 분할을 통해 얻은 영토를 모두 할양했다.

따라서 왕국의 영토는 브란덴부르크·슐레지엔·포메른 지방 등과 함께 서프로이센의 북부지역(단치히는 제외)과 동프로이센으로 줄어들었다(나폴레옹 전쟁).

1806년의 재난은 프로이센의 후진성을 잘 드러냈다. 프로이센이 행정·사회·군사 분야에 대한 개혁을 지체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자 장관 카를 슈타인은 개혁을 추진할 기회를 잡았다. 그의 기본적인 구상은 시민들이 국정 문제에 더 활발히 참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가와의 연대감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

이러한 구상을 바탕으로 1807년 농노해방이 시작되고 지방자치에 대한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으며, 중앙 정부도 개편되었다. 슈타인은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1808년 11월 해임당했지만, 그뒤에도 개혁작업은 카를 폰 하르덴베르크의 주도 아래 1810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이 유럽을 지배하게 되자 민족주의 감정이 크게 치솟았다. 프로이센의 민족주의 기운도 다른 독일 국가에 못지 않게 강했으며 마침내 해방전쟁(1813~14)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는 과거에는 주로 용병으로 구성되었던 프로이센군을 순수한 국민군으로 개편하고 이 군대를 움직일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는 낭만주의 운동이 일어나 애국심을 자극하고 자유를 예찬했으며, 더 나아가 낭만주의에 입각해 역사를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1809년에는 빌헬름 폰 훔볼트의 주도로 베를린 대학(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이 창설되어 전쟁에서 진 뒤에도 프로이센의 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프랑스와 강제로 동맹을 맺고 있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참여해야 했는데, 이때도 카를 폰 하르덴베르크는 프로이센을 기민하게 잘 이끌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후퇴하자 이것을 신호탄으로 유럽은 프랑스에 대항해 일어섰다. G. L. 폰 블뤼허와 A.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1813년의 라이프치히 전투, 1814년 프랑스에서의 전투, 1815년의 워털루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전쟁이 끝난 뒤 빈 회의(1814~15)가 열렸으나 프로이센은 동프리슬란트·링겐·힐데스하임·안스바흐·바이로이트 등과 같은 잃어버렸던 땅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러나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은 되찾지 못한 이러한 땅을 제외하고는 1803년 당시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고 그밖에 상당히 넓은 지역을 새로 얻었다. 프로이센이 새로 얻은 지역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① 작센 왕국으로부터 얻은 지역으로, 엘베 강 저지대 서안에 있는 원래의 프로이센 영토에 합쳐져 프로이센의 작센 지방이 되었다.

② 라인 강 양쪽 연안 지대로, 원래의 프로이센 영토와 합쳐져 프로이센의 라인 지방과 베스트팔렌 지방을 이루었다. ③ 뤼겐 섬을 포함해 포르포메른(북포메른)에서 과거 스웨덴이 차지하고 있었던 지역으로, 이곳은 나머지 포메른 지역과 한데 묶어져 포메른(포메라니아) 지방이 되었다. 또한 1815년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는 자를루이와 자르브뤼켄을 프로이센에 양도했고 프로이센은 이 지역을 한데 묶어 라인 지방에 합쳤다. 결국 프로이센의 영토는 1815년이 지나면서 동쪽으로는 니멘 강, 서쪽으로는 엘베 강에 이르게 되었으며 엘베 강 서쪽의 독일 서부에서도 프로이센 본토와 바로 연결되지 않았지만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프로이센은 영토의 지역적 중심축을 동유럽에서 독일 중부와 서부로 옮기고 독일어를 말하는 주민으로 이루어진 국가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국가로 자리잡았고, 빈 회의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독일 연방 속에서 오스트리아의 주도권에 도전할 잠재적인 경쟁자가 되었다.

1815~1918년의 프로이센

1815년이 지나면서 개혁에 대한 열의는 사그라들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1815년 5월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군대도 사기를 많이 잃어버렸다. 한편 프로이센의 교육제도는 여전히 유럽에서 최고였으며, 특히 베를린대학은 어떤 대학보다도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왕국의 서쪽 지방은 프로이센의 영토가 된 적이 없는 곳이었으며, 주로 로마 가톨릭교도들로 이루어진 이 지역들은 프로이센과는 이질적이어서 교회와 국가 사이에는 격렬한 갈등이 자주 일어났다. 프로이센의 관료제는 능률성과 청렴함에서 높은 수준을 이루었는데 이것은 당시 유럽에서는 독특한 현상이었다.

1818년 통관세를 낮춘 단순화된 관세제도가 왕국 전역에 시행되었고 이 관세제도는 1852년 오스트리아와 함부르크를 제외한 전독일 지역으로 확대된 1834년 관세동맹(Zollverein)의 모태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840~61 재위)는 낭만적인 인물로, 자신이 생각하는 중세에 대한 모습을 프로이센에 되살리기를 열망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분쟁을 끝냈고 1844년 몇 세기에 걸쳐 완성된 쾰른 성당의 준공 기념식에 참석해 프로이센 국왕으로서는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 건물로 들어갔다.

그는 입헌정치에는 반대했으나 중세와 비슷한 형태의 신분제를 몹시 만들고 싶어했으며, 처음에는 독일 의회를 만드는 데 지지를 보냈으나 나중에는 입장을 바꾸었다.

1848년 3월 독일에서도 프랑스 2월혁명에 자극을 받아 혁명이 일어났다. 군대가 나서서 이 소요를 진압했으나 겁을 먹은 국왕은 3월 19일 베를린에서 군대를 빼내고 한때 자신이 직접 혁명의 선봉에 섰다. 자유주의 정부가 들어서고 제헌의회가 소집되기도 했으나 자유주의 운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군대가 다시 베를린으로 들어왔고 의회도 12월 해산했다. 그러나 1850년 2월 국왕은 마침내 칙령을 내려 헌법을 제정했으며 이 헌법은 1918년까지 존속했다. 1848년 혁명이 벌어지는 동안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독일 통일운동을 주도하겠다는 열망을 갖고 1849년 4월 3일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모인 대표자들이 그에게 제의한 독일 제국의 황제 자리를 받아들일 생각도 했으나 보수적인 신하들의 설득으로 결국 이를 단념했다. 그러나 그후에도 그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국가들의 결합체인 '에르푸르트 동맹'을 수립하려고 했다.

1850년 오스트리아는 이 연맹안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전쟁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보수적인 신하들은 오스트리아와 올뮈츠 협약(1850. 11. 29)을 맺고 이같은 야심을 포기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1857년 정신이 이상해졌기 때문에 동생이 1858년 섭정이 되어 국사를 대신 처리하다가 1861년 형이 죽자 빌헬름 1세로 왕위에 올랐다.

빌헬름 1세는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公)이자 가톨릭교도인 카를 안톤을 총리로 하는 자유주의 내각을 임명했고, 프로이센은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여 독일을 주도할 국가가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군사예산과 이로 인한 과세 문제를 놓고 왕과 의회 사이에 반목이 일어났고, 이러는 가운데 1862년 9월 총리가 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에 대해 교묘한 논리를 폈다.

헌법에 따르면 예산은 상·하 양원과 국왕이 모두 동의해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비스마르크는 하원이 상원과 국왕의 입장에 끝내 동조하지 않자 "헌법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동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예산 없이 재정지출을 하는 것은 국왕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자금을 확보했고, 1863~64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놓고 덴마크와 분쟁이 일어났을 때 하원은 끝까지 군사예산을 인준하기를 거부했으며, 결국 프로이센은 덴마크와 싸우게 되었다.

프로이센은 1866년 '7주전쟁'에서 오스트리아에게 승리하자 헌법을 놓고 일어난 이러한 위기를 끝냈다. 비스마르크는 불법 지출에 대해 사과했으며 상·하 양원은 9월 면책법을 통과시켰다.

1864년에 벌어진 덴마크 전쟁으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지방을 공유하게 되었다. 7주전쟁을 통해 이곳뿐만 아니라 하노버를 비롯해 헤센·나사우·프랑크푸르트암마인과 같은 지역을 얻은 프로이센은 막히는 곳 없이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해 전체 독일 지방의 2/3와 독일 인구의 2/3를 차지하게 되었다.

프랑스와의 전쟁(1870~71)으로 프로이센은 새로 수립된 제국의 맹주국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1년 1월 18일 빌헬름 1세는 독일 황제로 즉위했고 프로이센군은 다른 독일 국가의 군대를 모두 흡수했다. 단지 바이에른 왕국의 군대만 평화시에 자율적으로 운영하도록 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의 총리이자 프로이센의 총리가 되었고, 이후 프로이센 역사는 주로 독일 제국의 역사가 되었다.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여 독일 제국과 프로이센 왕가가 몰락하자 프로이센의 패권도 끝이 났다.

베르사유 조약과 그에 따른 국민 투표의 결과 프로이센은 슐레지엔·포젠(포즈나니)·서프로이센·단치히(그다인스크)·메멜(클라이페다) 및 슐레스비히 일부를 잃었으며 벨기에 국경지대에 있는 일부 지역과 자를란트도 잃게 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의 일개 주(Land)로 전락했다. 또한 전에 비해 권한이 약해져 독일 정치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뒤에도 행정단위로 그대로 남아 있기는 했으나 헌법은 무효화되고 의회는 해산되었다. 독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미국·소련·프랑스 등 4대 전승국의 통치를 받게 되어 동프로이센 북부는 소련에 병합되고, 오데르-나이세 강 동쪽에 있는 지역은 폴란드로 넘어갔으며, 그 나머지 지역은 소련·영국·프랑스가 각각 분할 점령했다. 1947년 3월 1일 연합국점령위원회가 내린 조치로 프로이센은 공식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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