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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독특한 세계관을 발전시키고 있는 동안, 중국의 역사가들은 여전히 사마천의 전통에 따라 연구를 계속했다.
중국학자들은 일찍부터 역사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들에게 역사가 의미를 갖는 것은 역사가 행동에 실제적인 지침을 주거나 올바른 처신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뿐이었다. 중국의 모든 사상 유파는 역사의 교훈을 인용했다. 그들이 역사적 사실의 도덕적 내용을 강조한 공자 및 그 후계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공자가 가르친 의무 가운데 하나는 믿을 만한 기록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공자가 죽은 지 몇 세기 뒤에 통일된 중국은 유학자들을 관리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기록을 주의깊게 보존하는 것은 정부의 주요기능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당(唐) 왕조(618~907) 이후의 방대한 공식기록과 연대기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중국 역사는 일정한 틀에 박혀 있고, 내용도 고위관료들이 흥미를 갖는 것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중국 역사는 구체적인 세부 사항과 왕조의 옹호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중국 역사는 왕조의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천재적인 저자와 대담한 비판정신을 가진 사람들도 나타났다. 가장 뛰어난 사람은 〈사통 史通〉을 쓴 유지기(劉知幾: 661~721)였다. 〈사통〉은 최초로 역사방법론을 철저하게 다룬 저서이다.
중세 유럽의 역사가들은 대부분 수도사였는데, 이들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중국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군주와 왕가의 일을 기록하거나 교회사에 전념하는 경향이 있었다(수사). 아인하르트(771~840)의 〈샤를마뉴 전기〉(830~833)는 이 분야의 고전이며, 몬머스의 제프리(1100~54)가 쓴 〈브리튼 왕의 역사 Historia regum Britanniae〉와 12세기에 프라이징의 오토 주교가 쓴 〈프리드리히의 통치 Gesta Friedrici〉도 마찬가지였다.
순수한 종교적 저술도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보베의 뱅상(1190경~1264)이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후원을 받아 쓴 것의 일부는 십자군 전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뱅상). 조프루아 드 빌라르두앵 같은 십자군 지도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주도적 역할을 맡은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서유럽 역사가들에 비해, 동로마 제국의 비잔틴 역사가들은 좀더 확실한 근거와 권위를 가진 믿을 만한 저술을 남겼다.
비잔틴 역사가는 대부분 정치가와 고위관리 및 고위성직자들로, 중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저술은 신중하게 활용하면 오늘날의 연구자들에게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 이 시대를 다룬 가장 흥미로운 저술 가운데 하나는 알렉시우스 1세 황제의 딸로서 부왕의 전기를 쓴 안나 콤네나의 글이다. 비잔틴의 역사 저술 가운데 가장 읽기 쉽고 재미있는 것은 아마 동로마 제국 황제인 요한네스 6세(1347~54 재위)가 제위에서 쫓겨난 뒤 강제로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할 때 쓴 자서전일 것이다.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의 한 측근은 1453년에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해 기록했다.
비잔틴 역사가들은 그리스어로 글을 쓰고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글을 의식적으로 모방했다. 1400년경에 이탈리아를 방문한 비잔틴 학자들은 그리스인의 가르침을 이탈리아대학에 소개했다.
그들은 그리스어와 함께 그들의 뛰어난 문학기법도 도입하여, 유럽에 새로운 르네상스 역사학이 싹틀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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