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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BC 200경, 아르카디아 메갈로폴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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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BC 118경 |
국적 | 그리스 |
요약
그리스의 정치가·역사가.
(영). Polybius.
개요
로마가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등장하는 과정의 역사를 썼다(로마사).
초기생애
아카이아의 유명한 정치가 리코르타스의 아들로 태어나, 부유한 지주의 아들에게 걸맞는 교육을 받았다.
그가 젊은시절에 쓴 필로포이멘의 전기는 이 위대한 아카이아 지도자에 대한 그의 존경심을 보여주며, 지금은 사라진 그의 책 〈전술 Tactics〉은 군사문제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승마와 사냥을 즐겼고, 문학에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으나 철학에 대한 지식은 피상적이었다. BC 170(또는 169)년 아카이아 동맹의 히파르코스(기병대장)가 되었는데, 그 이전의 경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히파르코스가 된 뒤 심각한 사태에 연루되었다.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와 부담스러운 전쟁을 시작한 로마인들은 그리스 국가들의 배신을 경계했다. 폴리비오스는 로마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여 로마 콘술(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에게 사절로 파견되었지만, 로마는 아카이아의 지원을 거부했다. BC 168년 피드나에서 페르세우스가 패배한 뒤 폴리비오스를 비롯한 1,000명의 아카이아 명사들이 로마로 압송되어 재판도 받지 않고 이탈리아에 억류당했다.
로마 시절
로마에 볼모로 잡혀 있는 동안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위대한 장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친구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는 스키피오의 고문이 되었고, 스키피오 가문의 영향력을 통해 로마에 남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폴리비오스가 BC 151년 스키피오와 함께 스페인을 거쳐 아프리카(여기서 그는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를 만났음)로 갔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길에 한니발의 발자취를 따라 알프스 산맥을 넘은 것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다. 그 직후 정치적 억류가 끝나자 폴리비오스는 카르타고에서 스키피오와 합류했고, BC 146년 로마가 카르타고를 포위공격하여 파괴할 때 그 현장에 있었다.
그후 그는 대(大)플리니우스가 〈박물지 Naturalis Historia〉에서 말하고 있듯이 대서양 탐험 항해에 나선 것 같다. 그러는 동안 아카이아와 로마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아카이아가 BC 146년 멸망한 직후 폴리비오스는 코린트에 있었다. 그는 동포들에게 유리한 해결책을 확보하고 질서를 되찾기 위해 헌신했다.
지리학자인 파우사니아스가 말했듯이 아카이아인들은 테게아와 팔란티움, 만티네이아, 리코수라(이곳의 비문에는 '그리스가 모든 일에서 폴리비오스의 뜻에 따랐다면 결코 재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재난을 당한 그리스를 구해 준 이는 폴리비오스 한 사람뿐이었다'라고 새겨져 있음) 및 메갈로폴리스(이곳의 비문에는 '폴리비오스는 모든 땅과 바다를 방랑했고, 로마인의 동맹자였으며, 그리스에 대한 로마의 분노를 가라앉혔다'라고 적혀 있음)에 그를 기리는 동상을 세워, 폴리비오스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BC 146년 이후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언젠가 알렉산드리아와 사르디스를 방문한 바 있으며, 또한 스키피오 및 로도스의 파나이티오스와 함께 정치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BC 133년 이후에 일어났음이 분명한 누만티아 전쟁의 역사를 썼고, 적도 지역의 거주 적합성에 대한 논문도 썼다.
그러나 그가 언제 이 논문을 썼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폴리비오스의 로마사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것은 40권으로 이루어진 〈역사 Historiae〉로, 그중 마지막 권은 색인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제1~5권이며,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10세기에 그리스 역사가들의 저서에서 그를 인용한 구절만 가려 모은 발췌집과 16~19세기 여러 편집자들이 재발견하여 책으로 펴낸 것을 비롯해 많은 구절이 발췌된 형태로 남아 있다. 폴리비오스의 원래 목적은 로마가 세계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과정인 한니발의 스페인 원정부터 피드나 전투에 이르는 53년간(BC 220~168)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었다.
제1·2권은 서론에 해당되는 것으로 로마가 BC 264년 카르타고인과 싸우며 시칠리아 섬으로 진출한 이후의 로마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BC 264~220년에 세계의 다른 지역(특히 아카이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다. 제3권에서 폴리비오스는 수정한 구상의 개요를 설명하면서, 로마인들이 BC 146년 카르타고 멸망시기까지 그 패권을 어떻게 행사했는가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겠다고 제안한다. BC 168~146년에 일어난 사건들은 제30~39권에 언급되어 있다. 폴리비오스는 BC 146년까지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01)에 대한 기술을 끝냈기 때문에, 그가 계획을 수정하여 개정판을 내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마 BC 146년 이후일 것이다.
적어도 제1~6권은 BC 150년경에 이미 출판된 것 같다. 제3권에 실려 있는 수정된 구상을 포함해 이 저서의 나머지 부분이 언제 출판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관
폴리비오스는 '모든 역사가들이 주장했던대로 정치활동을 위한 가장 건전한 교육과 훈련은 역사 연구이며, 운명의 변천을 용감히 견뎌내는 방법을 배우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재난을 돌이켜보는 것'이라고 썼다.
재난에 직면했을 때 꿋꿋이 견디는 인내와 실제적인 경험은 역사를 공부한 보상으로서 이 저서 전반에 걸쳐 거듭 강조된다. 역사는 본래 교훈적이다. 즐거움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역사에서 얻는 이익에 비하면 덤에 불과하다. 역사가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 문제와 군사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역사(변덕스러운 독자들에게나 호소력 있는 족보와 신화적 이야기, 진부한 취향의 사람들을 매혹하는 식민지 이야기와 도시건설 및 친족관계에 대한 이야기)와는 대조적인 '실용적인 역사'(pragmatiké historia)이다(제9권 1·2장). 여기에는 당시의 예술과 과학에서 이루어진 발전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성격은 본질적으로 건조하다.
폴리비오스는 역사와 비극을 혼동한 그 이전의 많은 역사가들과는 대조적으로 선정주의를 기피했다. 그는 제2권에서 그리스의 역사가 필라르코스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비전문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방법을 썼다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가는 선정주의로 독자를 놀라게 하려고 애써서는 안 되며, 비극 시인들처럼 누군가가 말했음직한 발언을 추적하거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가능한 결과를 망라하려고 애써도 안 되고, 평범하더라도 실제로 일어난 일과 실제로 이루어진 발언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 그쳐야 한다.
역사의 목적은 비극의 목적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비극 작가는 가장 그럴듯한 말로 관중을 일시적으로 전율하게 하고 매혹하려고 애쓰지만 역사가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과 발언을 기록함으로써 모든 시대의 진지한 역사학도를 가르치고 납득시키려고 애쓴다. 비극은 관객을 속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비극에서 중요한 것은 비록 거짓일지라도 있음직한 상황이다. 그러나 역사의 목적은 역사학도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폴리비오스는 필라르코스에 대해서만 이런 공격을 퍼부은 것이 아니라 선정주의의 죄를 범했다고 판단한 다른 역사가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비난을 퍼부었다(제2권 16장 13~15절, 제3권 48장 8절, 제7권 7장 1·2절, 제15권 34장 1~36절). 이것만이 그들의 약점은 아니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상황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단순하고 단조로운 주제로 논문을 쓰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를 확대하고, 짧은 발언을 가필해 다듬어내고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건을 중요한 사건과 행동으로 변조할 수밖에 없다(제29권 12장 3절). 이런 관행과는 대조적으로 폴리비오스는 자신의 주제가 갖는 보편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의 주제는 '로마인들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종류의 제도 덕분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 즉 53년 만에 거의 모든 인간세계를 하나의 정부에 복속시키는 일을 해낼 수 있었는가'를 기술하는 것이다(제1권 1장 5절).
폴리비오스는 자신이 포괄적인 역사관을 채택한 데에는 그런 견해를 선호한다는 점말고도 또 하나의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날(BC 220)부터 역사는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었고,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그리스 및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서로 연결되어,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제1권 3장 3~4절).
실제로 보편적인 역사만이 로마가 세계 강대국으로 떠오른 과정을 적절히 다룰 수 있다.
역사가 폴리비오스의 개관적 견해는 역사 자체의 유기적인 성격과 어울린다. "내 저서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오늘날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티케(운명의 여신)는 세계의 거의 모든 일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었고, 그 일들이 동일한 목표를 지향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역사가는 운명의 여신이 전체적인 목적을 달성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독자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동시대인들 가운데 지금까지 아무도 이러한 전반적인 역사서술을 시도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주로 위와 같은 생각이 이 일을 맡도록 나를 자극하고 고무했다"(제1권 4장 1~2절). 여기서 운명의 여신에게 할당된 역할은 약간 이례적이다(포르투나). 원인과 결과가 헤아릴 수 없는 변덕스러운 힘에 달려 있다면, 역사가 실용적인 교훈의 원천으로서 갖는 가치는 분명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대개 폴리비오스는 순전한 우연으로부터 의도적인 신의 섭리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현상을 다루기 위해 운명의 여신을 이용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순의 대부분은 그가 순전히 표현상의 기교를 부리거나 운명을 늘 여신으로 표현하는 당시의 헬레니즘 용어를 부주의하게 채택하는 것에서 생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운명의 여신은 로마를 세계의 주인으로 끌어올린 진정한 힘인 것 같다. 로마는 그런 지위에 오를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폴리비오스는 인과관계를 상당히 강조한다. 사건의 원인과 그 직접적인 발단의 구별(제3권 6장)은 그리스의 위대한 역사가 투키디데스보다 더 기계적이고 실제 역사 상황의 변증법적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지만 어떤 점에서는 유용하다.
폴리비오스의 저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로마의 통치체제와 군대에 대한 연구 및 이 도시의 초기 역사(제6권)이다.
단일한 통치 형태가 흔히 빠지기 쉬운 변질과 타락의 악순환을 로마가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복합적인 통치체제 덕분이다. 여기에 대한 그의 분석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키케로의 〈국가론 De republica〉에서 마키아벨리와 몽테스키외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보의 출처
폴리비오스의 규정에 따르면 역사가의 임무는 문헌을 고증하는 것, 관련된 지형상의 특성에 친숙해지는 것, 끝으로 정치적 경험을 쌓는 것이며(제12권 25장), 이 가운데 뒤의 2가지 사항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말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훌륭한 정치적·군사적 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지중해 전역뿐만 아니라 그 너머까지도 널리 여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문헌 자료를 소홀히 여긴 것은 아니다. 사실 BC 264~220년을 다룬 서론 부분을 쓰기 위해서는 문헌 자료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의 역사책의 주요부분인 BC 220년 이후를 쓰기 위해 그리스와 로마의 많은 작가들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선례에 따라 책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거의 밝히지 않았다(역사편찬).
그는 개인 자료에도 접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에게 보낸 편지는 BC 209년 스페인의 노바카르타고 점령 과정을 묘사하고 있으며(제10권 9장 3절), 스키피오 나시카가 헬레니즘 국가의 어떤 왕에게 보낸 편지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제29권 14장 3절). 그가 아카이아의 공문서 보관소에 부탁하여 자료를 열람한 것은 거의 확실하고, 카르타고와 필리포스 5세가 맺은 조약(제7권 9장) 같은 자료는 로마의 기록에 의존한 것이 분명하다. 그가 로도스의 기록을 입수했다는 주장은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그는 이탈리아에 진을 친 한니발 부대의 대형을 도형으로 자세히 설명했는데, 이것은 그가 라키니아 곶의 주노 신전에서 한니발이 남긴 비문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얻은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폴리비오스는 구두 정보를 가장 중요하게 간주하고, 증인에 대한 탐문을 역사가의 임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했다. 실제로 그가 역사책의 주요부분을 BC 220년 이후로 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밖의 정보는 모두 '소문으로 얻어들은 것'이므로, 판단이나 진술을 뒷받침할 확실한 근거가 전혀 없다.
문체와 역사가로서의 자질
BC 1세기에 역사를 쓴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폴리비오스를 '아무도 끝까지 참고 읽을 수 없는 글을 남긴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폴리비오스의 문체에 대한 디오니시오스의 견해는 그의 후계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데, 그의 저서가 불완전한 형태로만 남아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데서도 이런 견해가 뒷받침된다. 폴리비오스의 그리스어 표현(그는 당시 비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헬레니즘 시대 고관들의 상투적인 문구를 그대로 되풀이한 경우가 많음)이 부적절한 까닭은 장황하고 읽기가 부담스러운 표현, 애매모호한 추상명사, 현학적인 반복법을 서투르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자들에게는 그의 문체가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는 독자의 수준을 높이려는 열망 때문에 당연한 사실을 도덕적으로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그의 주제는 의미심장하여 독자에게 늘 흥미를 던져준다. 이때문에 그는 정확하고 진지하며 분별있는 역사가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 그가 쓴 사건을 이해하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올바른 질문을 제기할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추종자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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