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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44. 8. 25, 동프로이센 모룽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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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03. 12. 18, 작센바이마르 바이마르 |
국적 | 독일 |
요약 헤르더는 질풍노도 문학운동의 지도적 인물이며 역사·문화철학에서 혁신적 견해를 제시하였고, 낭만주의 운동의 선구자적 인물이다. 신학과 철학, 문학을 공부했던 대학에서 비판철학을 정립한 이마누엘 칸트, 종교사상가 요한 게오르크 하만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1769년 바다여행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깨닫게 되었고, 그 생각의 변화를 <나의 1769년 항해일지>로 펴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의 괴테와의 만남은 이후 괴테의 문학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궁정설교자로 일하기 위해 머물렀던 뷔케부르크에서의 저서들은 질풍노도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이 문학운동은 후에 독일의 고전주의 문학과 낭만주의 문학 탄생에 기여했다. 이 시기 그의 역사철학도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여 대략적인 역사발전의 전형적 틀을 제시했다. 괴테의 영향력 덕분에 바이마르 교구 감독이 된 그는 괴테, 빌란트, 실러와 더불어 ‘바이마르의 네 별’로 불리며 독일 신인문주의 발달에 공헌했다.
개요
질풍노도 문학운동의 지도적 인물이며 역사·문화철학에서 혁신적 견해를 제시한 사람이다.
청년 괴테와의 만남을 통해 영향력이 증가되어 낭만주의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1802년 귀족작위를 받았다.
초년시절의 여행
헤르더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지방학교를 다녔다.
1762년 여름부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신학·철학·문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비판철학을 세운 이마누엘 칸트와 그의 친구 요한 게오르크 하만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1764년 11월 리가에 교사 겸 설교자로 가서 최초로 2권의 저술 〈최근의 독일문학:단편들 Üer die neuere deutsche Literatur:Fragmente〉(1767)·〈미학과 미술에 대한 비판적 성찰 Kritische Wälder, oder Betrachtungen die Wissenschaft und Kunst des Schönen betreffend〉(1769)을 썼다.
1769년 여름 리가에서 낭트로 바다여행을 떠났는데, 이 여행에서 자기 운명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해 12월 파리에서 완성된 〈나의 1769년 항해일지 Journal meiner Reise im Jahr 1769〉(1769)라는 책은 그 여행의 영향으로 생긴 변화를 잘 보여준다. 헤르더는 자신이 안전한 육지를 떠나 미지의 미래로 항해하는 뿌리뽑힌 존재라고 생각했다. 미래가 어떤지를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과거로부터 얻은 통찰을 통해 미래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여겼다.
자기 시대에 대한 헤르더의 예언자적 비판은 몇 세대 뒤의 지적 발전을 예고한 것이었다. 시학·미학론에서는 괴테,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슐레겔,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 형제, 야코프 그림과 빌헬름 그림 형제 등이 뒤를 이었고, 언어철학에서는 빌헬름 폰 훔볼트, 역사철학에서는 헤겔, 인식론에서는 빌헬름 딜타이, 인류학에서는 아놀트 겔렌, 정치사상에서는 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이 뒤를 이었다. 홀슈타인의 페터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의 친구로 슈트라스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괴테와 극적으로 만났다. 호메로스, 핀다로스, 셰익스피어와 문학, 민속노래에 대한 헤르더의 비평에 자극을 받아 괴테는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깨달았다.
뷔케부르크에서의 활동
1771년 4월 헤르더는 궁정설교자로서 뷔케부르크에 갔다.
거기에서 쓴 작품들이 프로메테우스적·비합리주의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문학운동인 질풍노도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질풍노도운동이 없었다면 독일의 고전주의 문학과 낭만주의 문학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헤르더가 신봉한 낭만주의에서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자는 감정(Gefühl)이다. 헤르더는 감정을 촉각에 비유했는데, 시각이 사물을 떨어져서 파악하는 반면 감정은 실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려 하며, 실재를 개체 자신의 활력에 반작용하는 힘으로서 파악한다.
그러나 동시에 개체는 자신의 몸속에서 어떤 활력이 세계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인간이 환경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환경이 부과한 한계를 깨닫는 순간에 개체와 실재 사이에는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개체의 몸은 미학적인 형상(즉 완전한 구조)으로 바뀌고 개체와 실재 사이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이 시기의 저작에는 자신의 형이상학을 요약한 〈조각 Plastik〉(1778)이라는 저술과 언어의 기원을 인간본성에서 찾은 〈언어의 기원에 관한 소론 Abhandlung über den Ursprung der Sprache〉(1772) 등이 있다.
헤르더가 보기에 인식은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비록 개체와 실재가 감정 속에서 통일되어 있더라도, 말이 객관적 의미를 갖도록 기초를 제공하는 '지향적' 행위, 즉 대상을 향하는 행위에서는 새롭게 연결되기 위해 의식 속에서 분리된다. 이리하여 이전에는 감정 속에서 희미하고 명확하지 않게 인식되던 것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감정과 본성은 이렇게 상호 침투한다. 의미를 가진 소리인 말이 이 통합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말로 표현할 때는 항상 언어사용자의 개성과 관점을 반영하는 정서적 태도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언어의 구조야말로 인간 본성의 진정한 모습이다. 당시의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다양한 능력(의욕·감정·인식)을 주의 깊게 구분한 반면, 헤르더는 인간의 본성이 통일적이며 나눌 수 없는 전체임을 강조했다. 의식과 반성하는 식별력은 단지 동물적 본능에 덧붙여진 '더 높은' 능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적으로 독특한 욕구와 감수성을 갖춘 전체로서 개인의 구조를 가리킨다. 인간의 본능과 감수성이 이처럼 반성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인간 개개인은 최초로 해방된 피조물이다.
헤르더의 역사철학도 이 시기에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는데, 현재 상황과 미래에 있을 법한 일을 파악하기 위해 과거를 이용하려던 시도에서 생겨났다.
그는 이미 〈최근의 독일문학:단편들〉에서 인생의 시기구분에 비유하여 역사발전의 전형적 틀을 대강 제시했다. 이를 통해 그는 독일시(詩)의 위상을 정해보려 했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논문과 합리론의 역사기술을 반대한 〈인간교화를 위한 또 하나의 역사철학 Auch eine Philosophie der Geschichte zur Bildung der Menschheit〉(1774)은 역사의 참모습을 개체와 전체 역사 사이의 모순의 산물로 깊이 이해한 최초의 저작이었다.
이 모순이 바로 역사발전의 기초가 된다. 두 힘이 갈등할 때 사람들은 힘껏 버티면서 전체에서 벗어난 개별적인 구조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체는 어떤 단일한 형태에 만족하지 않는다. 역사의 격변기에서 전체는 이전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양을 가지게 되며, 시대가 지나면 이 모습은 다시 파괴된다. 개인은 목적일 뿐만 아니라 신이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맹목적이고 부자유스런 도구이다.
철학자조차도 과거의 발전 유형들로부터 그 조건을 추적함으로써만 미래를 보고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이 시기에 준비한 다른 저술로는 히브리 고대사에 대한 책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 Älteste Urkunde des Menschengeschlechts〉(1774~76)·〈설교자에게 보내는 글:지방교구 문서 15편 An Prediger:Fünfzehn Provinzialblätter〉(1774) 등이 있었다.
특히 중요한 두 저작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평론과 〈오시안과 고대인들의 노래에 대한 서한 발췌 Auszug aus einem Briefwechsel über Ossian und die Lieder alter Völker〉(1773)였다. 2번째 저작은 질풍노도 문학운동의 선구자인 괴테와 유스투스 뫼저가 기고한 성명서 형태로 발간되었다. 헤르더가 셰익스피어와 호메로스에 대한 해설에서 보여주었듯이, 지금까지 숨겨진 인간 삶의 모습이 순수하게 시적인 언어 속에서 언어의 창조적 기능에 의해 밝혀진다. "시인은 자기 주위에 국가를 창조하는 자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보아야 할 세계를 제시하며, 사람들의 영혼을 손수 그 세계로 인도한다" 시적 능력은 교육받은 사람들의 특수한 영역이 아니다. 시는 진정한 '인류의 모국어'로서 문명화되기 이전 시기의 모든 나라에서 가장 순수하고 힘있게 나타난다. 헤르더가 보기에 이 능력은 〈구약성서〉, 고대 북유럽의 신화시가집 〈에다 Edda〉, 호메로스 등에 의해 여실히 증명된다. 그래서 헤르더는 고대 독일 민요를 되살려내는 데 관심을 기울였으며, 북유럽의 시가와 신화, 중세 독일의 서정시인들의 작품과 루터의 언어를 깊이 연구했다.
바이마르에서의 5년
괴테의 영향력 덕분에 헤르더는 1776년 바이마르에서 일반 감독 및 종교법원회의 의원에 임명되었다.
거기서 그는 괴테보다 앞서 일반 어형론의 기초를 발전시켰는데, 이 작업을 통해 그는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 연극이나 〈요한의 복음서〉 등이 각각의 역사적 맥락에서 바로 그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경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헤르더의 방법은 모순을 깨닫고 더 높은 통일에 호소함으로써 결과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 때문에 헤르더는 변증논리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헤르더가 고전주의로 이행을 완료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인간 영혼의 앎과 느낌에 대하여 Vom Erkennen und Empfinden der menschlichen Seele〉(1778)·〈신학연구에 대한 서한 Briefe, das Studium der Theologie betreffend〉(1780~81)·〈히브리 시가의 정신 Vom Geist der ebräischen Poesie〉(1782~83)·〈민요 Volkslieder〉(1778~79) 등의 민요모음집이 있다. 헤르더는 시를 실재와 화해하는 양식으로 간주했다.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시를 학식의 산물이나 즐거움을 얻기 위한 도구로 본 반면, 헤르더는 시를 감정으로 경험하는 자연적·사회적 환경에서의 의도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사건의 자극에 대한 비의도적 반응으로 보았다.
그런 감정이야말로 인간과 세계가 역동적인 관계를 맺는 기관으로서, 이미지보다는 말의 음조, 강세 박자에서 훨씬 잘 표현된다. 이 '감정의 소리'는 인간과 인간을 만들어낸 역사환경으로부터 분리되어 혼자 세계를 구성할 만큼 완숙해질 때만 예술로서의 지위를 갖게 된다.
생애의 정점과 바이마르 시절 후기
이 시기의 헤르더의 작업은 〈단상(斷想) Zerstreute Blätter〉(1785~97)과 완성하지 못한 〈인류사의 철학에 대한 이념 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der Menschheit〉(1784~91)에서 정점을 이룬다.
괴테와의 교류 결과인 2번째 저작에서 헤르더는 자연과 역사가 동일한 법칙체계에 따른다는 점을 증명하려 했다. 흙에서 인류로의 발전과정중에 이미 결정적인 형태나 개별존재를 산출함으로써 서로 균형을 맞추려는 힘들이 작용하고 있다. 이와 똑같은 현상을 서로 대립하는 힘들이 조화를 이루는 인간 공동체 생활에서 '인간성'의 법칙으로 관찰할 수 있다. 지나가는 매 순간의 기준은 개별적이지만 모양을 갖추어가는 전체 발전의 원리는 일반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자유 때문에 너무도 자주 자연을 거스르는 작용을 하는데, 이는 사물의 척도에 대한 감각과 이성이 미숙하기 때문이다.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통찰력과 선의가 증대함에 따라 인간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국가간의 갈등을 통해 모든 인류를 포용하는 하나의 구조가 평형상태를 이루게 될 것임을 믿어야만 한다.
〈이념 Ideen〉에 깔려 있는 근본 전제는 대화집 〈신:몇몇 대화 Gott:einige Gespräche〉(1787)에 요약되어 있다. 여기서 헤르더는 합리론자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샤프츠버리의 견해를 결합하고 있다.
재정적인 어려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의견차이, 특히 더 위대한 사람이 자기 곁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한 자존심 강한 성격 때문에 헤르더는 괴테와 사이가 멀어졌다. 그결과 헤르더는 독일시와 철학에서의 고전주의 운동 전체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인간성의 증진을 위한 서한집 Briefe zu Beförderung der Humanität〉(1793~97)과 역사·철학·미학에 대한 논문집인 〈아드라스테아 Adrastea〉(1801~03)에서 그는 모든 시가 교훈적 목적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예술작품이 자율적이라는 이전의 자기 이론과 모순된 견해를 취하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글모음 Christliche Schriften〉(1794~98)·〈순수이성비판에 대한 메타 비판 Metakritik zur Kritik der reinen Vernunft〉(1799), 칸트의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에 대한 메타 비판인 〈칼리고네 Kalligone〉(1800)에서는 칸트 철학을 자신의 역사적 세계관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칸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에서 그는 영향력 있는 시인·소설가인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와 얀 파울의 지원을 받았다. 헤르더는 1803년에 죽었다.
그의 저작의 첫번째 전집(45권, 1805~1820)은 그의 부인이 제작했으며, B. 수판이 비평·편집한 전집(33권, 1877~1913)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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