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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89. 1. 18, 보르도 근처 라브레드 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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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55. 2. 10,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주요저서인 <법의 정신>을 통해 정치이론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 <법의 정신>이 나온 뒤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이 책이 모든 시대에 걸쳐 칭송받으리라고 했다. 스위스의 과학자 샤를 보네는 뉴턴이 물리세계의 법칙을 발견했듯이 몽테스키외는 정신세계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평가했다. 몽테스키외는 보르도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1708년 변호사가 되었다. 1726년 숙부 몽테스키외 남작 장 바티스트가 죽자 남작 직위와 함께 영지와 보르도 의회 부의장직을 물려받았다. 1721년 파리 문명을 날카롭게 풍자한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출판해 세간의 이목을 받기 시작했다. 1722년 파리로 가서 많은 학자들과 교류했다. 유럽 각국을 여행했고 영국에서 1731년 봄까지 머물렀다. 이 시기 동안 왕립학회 회원이 되어 의회 회의에 참여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1750년 <법의 정신에 관한 변론>을 출판했는데, 이 책으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개요
주저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1748)은 정치이론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
초기생애와 활동
아버지 자크 드 스콩다는 16세기경 왕에 봉사하여 작위를 받고 상당한 재산을 가진 유서깊은 무관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 마리 프랑수아 드 페늘은 영국 출신의 신앙심깊은 부인이었다.
그녀는 라브레드의 값비싼 포도주 생산지에서 남편을 도와 재산을 크게 늘렸다. 1696년 그녀가 죽자 라브레드 남작령은 7세 된 맏아들 몽테스키외에게 넘어갔다. 그는 처음에는 집에서, 나중에는 마을에서 교육받다가 1700년 파리에서 가까운 모(Meaux)의 교구에 있는 콜레주 드 쥐이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보르도의 유명한 가문들이 후원하고 있었으며 소유자 오라토리오회 사제들이 계몽적이고 근대화한 방식으로 견실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몽테스키외는 1705년 보르도대학교 법학부에서 계속 공부한 뒤 1708년 졸업하면서 변호사가 되었다.
그 직후 법률 실무를 쌓기 위해 파리로 갔다가 1713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다시 보르도로 돌아왔다. 2년 후 잔 드 라르티그와 결혼했다. 부유한 프로테스탄트였던 그녀는 지참금으로 10만 리브르를 가져왔고 얼마 후 딸 2명과 아들 장 바티스트를 낳았다. 몽테스키외는 부인의 사업수완을 높이 평가하고 파리로 떠날 일이 있을 때마다 기꺼이 재산관리를 그녀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충실하지도 헌신적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1726년 숙부 몽테스키외 남작 장 바티스트가 죽자 몽테스키외 남작이란 작위와 함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영지와 보르도 의회 부의장직을 물려받았다. 그 직책은 어느 정도 명예직으로 연금을 받긴 했지만 한직이었다. 몽테스키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사회적·재정적 안정을 얻었다. 그는 법률업무에 전념하면서 로마 법을 꼼꼼히 연구했는가 하면, 재산을 관리하는 틈틈이 새로 설립된 보르도의 학회에서 과학, 특히 지학·생물학·물리학 지식을 쌓았다.
1721년 〈페르시아인의 편지 Lettres persanes〉를 출판함으로써 몇 안 되는 가까운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이 책은 2명의 페르시아 여행자의 눈을 통해 프랑스, 특히 파리 문명을 날카롭게 풍자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바로 얼마 전에 끝난 루이 14세의 통치를 조롱하는가 하면 모든 사회계급을 놀림감으로 삼았으며, 선사시대 혈거인의 우화를 통해 자연상태에 관한 토머스 홉스의 이론을 논의하고 있다. 또 소박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인구통계학에 독창적으로 이바지하고 있으며,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교를 자주 시도하고 있다.
이밖에 얀센주의자로 알려진 비(非)국교도적 가톨릭 집단을 비난하는 로마 교황청서 〈유니게니투스 Unigenitus〉에 관한 논쟁을 거론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리를 풍자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활력넘치고 대담하고 성상파괴적인 비판정신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의 익명의 저자는 곧 밝혀졌고 몽테스키외는 곧 유명해졌다.
파리에서 움트고 있던 여러 새로운 사상이 가장 재기발랄하게 표현된 셈이었다.
이후 몽테스키외는 사회적 성공과 함께 학문적 성취에 힘을 쏟았다. 1722년 파리로 가서 베릭 공작의 도움으로 궁정에 들어갔는데, 베릭은 추방된 스튜어트 공(公)으로 보르도 군사령관으로 있을 때 몽테스키외를 알았다.
궁정생활의 분위기는 오를레앙 공작의 방탕한 섭정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지만 몽테스키외는 그 사치스러움을 경멸하지는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의 정치가 볼링브룩 자작과 친해졌는데, 그의 정치적 견해는 이후 몽테스키외가 영국 헌법을 분석하는 데 반영되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그는 보르도 의회의 판에 박힌 활동에 점차 흥미를 잃어갔다. 또 자신보다 지적 수준이 낮은 이들이 궁정에서 더 성공하는 것을 보자 분노를 느꼈다. 시장가치가 있는 사무실을 1726년에 팔아치운 일은 도시생활 동안 탕진한 재산을 다시 회복해준 동시에 파리 시민이라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서 그가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1727년 10월 아카데미에 자리가 비자 몽테스키외는 강력한 후원자들과 그의 주장을 확고하게 밀어준 랑베르 부인의 살롱 덕분에 1728년 1월 24일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처럼 공식적으로 재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누리기 위해 파리에 머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보다 뒤늦기는 했지만 외국여행을 통해 자기 교양을 완성하기로 마음먹었다. 부인이 라브레드에서 자기 영지에 대한 전권을 행사하도록 남겨둔 채 1728년 4월 베릭의 조카이자 나중에 파리에서 영국 대사로 활동한 월그레이브 경과 함께 빈으로 갔다.
몽테스키외는 18세기의 그 어떤 작가보다 여행기를 흥미롭게 썼다. 빈에서 그는 군인이자 정치가인 사보이의 외젠 공을 만나 프랑스 정치에 관해 토론했다. 흥미롭게도 광산을 탐사하기 위해 헝가리를 들러오는 경로를 밟았다. 또한 이탈리아에 들러 베네치아의 즐거움을 만끽한 뒤 다른 도시도 둘러보았다. 노트를 손에 들고 피렌체의 화랑들을 세심하게 둘러보면서 미적 감각을 다듬었다. 로마에서는 프랑스 장관 폴리냐크 추기경의 소문을 듣고 출판되지 않은 그의 라틴어 시 〈반(反)루크레티우스〉를 읽었다.
나폴리에서는 의심스런 눈으로 도시의 수호성인의 피가 흘러내리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탈리아로부터 독일을 거쳐 네덜란드로 갔다가 체스터필드 경을 알게 되어 그와 함께 영국으로 가 1731년 봄까지 머물렀다. 몽테스키외는 영국에서 폭넓은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궁정에 참석하고 웨일스 공(公)에게 접대도 받았으며, 나중에 그의 요구로 프랑스 노래선집도 만들었다. 리치먼드 공작과 몬터규 공작과 친하게 사귀었는가 하면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의회의 토의에 참여하고 그당시의 정치 잡지를 읽었으며, 프리메이슨 단원으로 가입했다. 장서용으로 많은 책을 사들이기도 했다. 그가 영국에 머문 기간은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득이 많은 시기였다.
주요저서
여행 기간 동안 몽테스키외는 파리에서 즐기던 사회적 쾌락을 회피하지는 않았지만, 진지한 야심은 더욱 강해졌다.
한때 외교관이 되려고 생각했지만 프랑스로 돌아온 후로는 학문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서둘러 라브레드에 머물면서 2년 동안 글을 썼다. 1734년 출판되었지만 회수된 〈보편 군주 La Monarchie universelle〉 말고도 영국 헌법에 관한 에세이와 〈로마인의 위대함과 그 쇠락의 원인에 관한 고찰 Considérations sur les causes de la grandeur des Romains et de leur décadence〉(1734)을 썼다.
그는 영국 전통에 따라 2권을 동시에 출판하려고 생각했는데, 이는 볼테르가 지적했듯이 영국인이 자신을 로마인과 비교하는 것을 기뻐했기 때문이다.
학문적 포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얼마 동안 법률과 정치학에 관한 대작을 기획했다. 〈로마인의 위대함과 그 쇠락의 원인에 관한 고찰〉이 출판된 후 잠깐 쉰 뒤에 나빠진 시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새롭고 엄청난 과제에 착수했다. 그 내용을 노트에 정리했는데 그 가운데 〈지리학 2권 Geographica tome Ⅱ〉의 노트만이 남아 있다.
그는 여러 명의 비서를 계속 고용해 한꺼번에 6명을 고용한 적도 있으나 그들을 독자와 서기로 이용했을 뿐 작가로 이용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방대하고도 끈질긴 노력은 흔히 재치가 넘치되 성급하고 천박하다고 알려진 그의 성격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작업을 눈치채지 못하게 했으며 단지 소수의 친구만이 그가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지 알 뿐이었다. 그는 대부분 라브레드에서 작업하면서 영지 관리에 힘쓰는 토지 귀족으로서의 특권을 유지했으나 자주 파리를 방문하여 사교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파리에서 왕립 도서관을 제2의 서재로 이용했으며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참석했고 살롱을 드나들었으며 이탈리아와 영국의 방문객들과 만났다. 동시에 지속적이고도 차분하게 스스로 대작이 되리라 믿고 있는 책을 준비해 1740년에 이르러 주요부분의 초안을 잡았고 거의 집필을 끝냈다. 1743년 원문은 사실상 완성되었지만 1746년 12월까지 2번에 걸쳐 다시 철저하고 세밀하게 수정해 출판을 위한 사실상의 준비를 끝냈다. 제네바의 J. 바리요를 출판인으로 선정했지만, 계속해서 수정을 가하고 몇 개의 장을 새로 쓴 뒤 1748년 겨울 드디어 〈법의 정신, 또는 법이 각국의 정부 구성·풍습·기후·상업 등의 구성과 맺는 관계에 관하여 De l'esprit des lois, ou du rapport que les lois doivent avoir avec la constitution de chaque gouvernement, les moeurs, le climat, la religion, le commerce, etc.〉를 출판했다.
이것은 4절판의 1,086쪽 31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법의 정신〉은 정치이론사와 법률사에서 가장 훌륭한 책 가운데 하나이다(정치학). 저자는 이전의 모든 사조를 섭렵했지만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그가 다룬 다양한 주제는 모두 뛰어나지만 특히 다음 3가지 주제에 관한 연구가 돋보인다.
첫번째는 정치이론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주제로 정부의 분류이다. 이전의 이론가들이 군주정·귀족정·민주정으로 나누던 전통적 구분법을 버리고, 자신의 고유한 분석틀에 따라 각 정부형태에 활동원리를 배정하여 공화정은 덕, 군주정은 명예, 독재정은 공포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이러한 분류는 정치권력의 소재가 아니라 정부의 정책수행 양식에 의거한다. 또 이 분류는 역사적이면서 폭넓은 기술적(記述的)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2번째는 가장 잘 알려진 주제인 권력분립이론이 색다르게 다루어진다(헌법). 그는 정치권력을 입법권·행정권·사법권으로 나누면서, 국가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자유를 촉진하는 방법은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서로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게 이 세 권력을 맡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국가의 모델은 영국이었는데, 그는 볼링브룩의 논쟁서에 나타난 대로 휘그당 당수 로버트 월폴에 반대하는 토리당의 관점에서 영국을 바라보았다. 이 이론을 서술한 장(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인 11권 6장)은 1734년 쓴 이래 한 번도 수정하거나 교정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그것은 즉각 18세기 정치 저작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떠올랐다. 비록 이 장의 정확성에 관해서 최근 논란이 있었지만 그당시에는 감탄의 대상이었고 영국에서까지 권위를 인정받았다.
몽테스키외의 가장 유명한 이론 중 3번째 부분은 기후가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학설이다. 독서를 통해 만난 학설들, 여행 경험, 비록 소박하지만 보르도에서 했던 실험 등에 기초해서 그는 주로 더위와 추위 같은 기후조건이 개인의 신체구조와 결과적으로 사회의 지적 풍토에 미치는 효과를 강조했다.
이러한 영향은 원시사회를 제외하고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영향에 저항하는 것이 입법자의 의무이다. 비판자들이 대부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몽테스키외는 기후가 이른바 '일반정신'의 2차 원인을 엮어내는 다양한 요소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조심스럽게 주장하고 다른 요소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법률·종교·정부지침 등은 비물리적인 것이고, 그 영향은 기후의 영향과 비교해볼 때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증가한다고 강조했다.
몽테스키외는 사회를 하나의 전체로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종교 자체는 원인으로 보든 결과로 보든 하나의 사회현상이며, 어떤 신앙이든 그 유용성이나 해로움은 교리의 참 여부와 전적으로 무관하게 논의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몽테스키외는 비독단적인 방법을 선호했다. 이때문에 독자들은 때때로 몽테스키외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비록 개선될 필요는 있지만 전적으로 나쁜 것일 수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몽테스키외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성급하게 요약하면서도 어떤 특정한 것, 이를테면 독재·노예제·불관용 등은 본래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인간의 권리를 일일이 열거하려 하지 않았고 그러한 시도조차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인간 존엄성에 대해 굳건한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추가되는 바람에 다른 부분과 부조화를 보이고 있는 〈법의 정신〉 후반부에서는 법률사에 몰두하여 프랑스가 성문법 지역과 관습법 지역으로 나누어진 경위를 설명하려 애썼고 또 많이 논의되는 프랑스 귀족제의 기원에 관한 논의에도 기여했다(법철학). 여기서 그는 신중함과 상식뿐만 아니라 전거(典據)를 문헌학적으로 다루면서 이전에 없던 참된 학자적 능력도 보여주었다.
〈법의 정신〉이 나온 뒤 매우 다양한 방면에서 칭찬이 쏟아졌다.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런던에서 이 저작이 모든 시대에 걸쳐 칭송받으리라고 썼다. 이탈리아인 친구는 그 책을 읽으면서 감동의 황홀경에 빠졌다고 말했으며, 스위스의 과학자 샤를 보네는 뉴턴이 물리세계의 법칙을 발견했듯이 몽테스키외는 정신세계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평가했다.
그 자신도 그렇게 여겼지만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그를 계몽주의자로 받아들였다(필로조프). 그러나 이 책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 책을 반박하는 다양한 논문과 소책자들이 나왔다. 소르본과 프랑스 성직자 회의가 퍼부은 공격은 다행히 무마되었지만, 로마에서는 프랑스 외교관과 자유주의 고위 성직자들의 중재활동과 교황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몽테스키외의 반대자들이 승리하는 바람에 그 책은 1751년 '금서목록'에 들어갔다.
몽테스키외는 실망했지만 이것은 일시적 좌절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법의 정신에 관한 변론 Défense de L'Esprit des lois〉(1750)을 출판했다. 섬세하고 해학이 넘치면서도 강렬하고 날카로운 이 책은 그의 글 가운데 가장 훌륭했다. 마침내 그는 세계적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말년
화려한 명성이 그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그의 상냥함과 점잖음을 칭찬했다. 얼빠진 듯하지만 재능있는 젊은 무명의 문인들에게 그는 친절하게 도움을 주는 믿음직스런 친구였다. 〈백과전서 Encyclopédie〉 편집자들이 그에게 협조를 구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인데, 실제로 달랑베르는 그에게 민주주의와 독재에 관한 항목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몽테스키외는 자신이 이미 그 주제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으며 취미에 관해 글을 쓰고 싶다고 하면서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결과 25년 전쯤에 초안을 잡아두었다가 손을 본 〈취미에 관한 에세이 Essai sur le goût〉가 그의 마지막 저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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