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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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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8. 8. 21, 프랑스 파리
사망 1874, 이에르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역사가.

기념비적인 저작 〈프랑스사 Histoire de France〉(1833~67)로 잘 알려져 있는 민족주의 역사가로서 개성적인 서술방식으로 과거를 되살림으로써 커다란 극적 힘을 지니는 역사적 종합(synthesis)을 이루었다.

미슐레는 자식을 공부시킬 수 있을 정도의 소규모 인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총명했던 그는 열심히 노력하는 탐구파 학생이었으며 29세 때에는 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와 철학을 가르쳤다. 이무렵 이미 여러 권의 교과서를 펴냈으며 잠바티스타 비코의 〈새로운 과학 Scienza nuova〉을 번역했다(1827). 프랑스의 1830년 혁명으로 미슐레는 역사를 숙명에 대한 인간 자유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파악하면서 역사 형성에서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는 비코에 더욱 공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보편사 서문 Introduction àl'histoire universelle〉(1831)의 주제를 이루었으며 이후 미슐레 전저작의 밑바탕이 되었다.

1831년 〈로마사 Histoire romaine〉(2권)를 써낸 뒤 그는 중세사와 근대사에 몰두했다. 마침 같은 해 문서국의 역사부 책임자로 임명되어 필생의 기념비적 작품인 〈프랑스사〉를 쓰는 데 필요한 중요 자료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제1부 6권(1833~43)은 중세말에서 끝을 맺었다. 이 가운데 〈프랑스의 장(場)〉에서는 프랑스가 하나의 국가로서 등장한 사건을 민족적·지리적 결정론에 대한 승리로 그리고 있다. 그는 여기서 잔 다르크를 프랑스의 영혼 그 자체이며 미슐레 자신이 생각하는 애국적·민주적 이상의 살아 있는 상징으로 다루고 있다.

미슐레는 과거를 되살리는 것(즉 재창조하는 것)이 역사가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확신하면서 자신의 깊은 자아를 글에 신중하게 투사했다.

이러한 과거의 되살림은 총체적이어야 하는데 정치뿐만 아니라 예술·종교·경제 등 과거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을 다시 불러내 원래 모습대로 엮어서 생생한 총합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시도가 다소 자의적이고 지나쳤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미슐레는 감성을 갖춘 천재성과 낭만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탁월한 시적·극적인 힘을 지닌 과거를 훌륭히 되살려냈다(역사편찬).

〈프랑스사〉의 제1부를 끝낼 무렵 몇 차례 닥친 개인적 위기는 그의 집필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1839년 첫 아내의 죽음과 1842년 친구 마담 뒤메닐의 죽음은 〈프랑스사〉를 쓰는 동안 내내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바로 이때 미슐레는 그리스도교에서 돌아서서 민주주의의 진보에 대한 예언자적 믿음을 공개적으로 밝히기 시작했다. 교회에 대한 적대감이 점점 커져서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하면서도 이러한 감정을 드러냈으며 이때문에 마침내 예수회와 충돌했고 1848년 1월에는 강의를 중지당했다.

그로부터 1개월 뒤 그가 1846년 〈푀플 Le Peuple〉 지에서 예고했던 대로 혁명이 일어나자 그의 꿈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꿈은 곧 깨어졌고 그는 1852년 제2제정에 충성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잃었다. 1847년 〈프랑스사〉의 집필 순서를 뛰어넘어 제3부인 〈프랑스 혁명사 Histoire de la révolution fran이미지aise〉(7권, 1847~53)를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프랑스 대혁명을, '정의'(la Justice)가 그리스도교 교리와 군주의 독단적인 권력을 뜻하는 '은혜'(la Grâce)에 승리하는 과정의 절정으로 묘사했다.

열띤 어조로 쓴 이 책들은 생생하고 감동에 찬 연대기이다.

그리고 나서 미슐레는 〈프랑스사〉를 다시 쓰기 시작해 르네상스부터 대혁명 직전까지의 제2부(11권, 1855~67)를 완성했다. 불행히도 그는 성직자와 국왕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문서를 성급하게, 마음대로 다루며 상징적 해석에 심취했기 때문에 이 책들은 내용이 왜곡되어 환각이나 악몽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왜곡은 마녀를 신에게서 버림받은 영혼이며 교회의 반(反)자연적인 금지령에 희생이 된 것으로 보고 마녀에 대한 변론을 전개하고 있는 책 〈마녀 La Sorcière〉(1862)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뒤 더욱 새롭고 행복한 영감에 사로잡혀 〈새 L'Oiseau〉(1856)·〈곤충 L'Insecte〉(1858)·〈바다 La Mer〉(1861)·〈산 La Montagne〉(1868) 등 자연에 관한 몇 권의 책을 펴냈다. 이 책들은 1849년 자신보다 30세 어린 아테나이 미알라레와의 재혼에서 자극받아 쓴 서정적인 작품으로, 최상의 산문작가가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문구를 담고 있다.

교훈적인 연애작품인 〈사랑 L'Amour〉(1858)과 〈여성 La Femme〉(1860)도 같은 영향을 받아 쓴 것이다.

1870년에 일어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미슐레가 독일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와 환상을 깨뜨려버렸다. 1874년 미슐레가 죽은 뒤 그의 아내는 그의 일기를 정리했으나 1959년에야 〈일기 Journal〉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2권은 1962년 출간되었고 〈젊은 날의 기록 Écrits de jeunesse〉이 역시 1959년에 나왔다. 여기에는 미슐레의 유럽 기행과 특히 그의 사람됨을 이해하는 열쇠가 들어 있으며 개인경험과 작품의 관계가 밝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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