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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펜도르프

다른 표기 언어 Samuel, Freiherr von Pufend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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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32. 1. 8, 작센 탈하임 근처 도르프켐니츠
사망 1694. 10. 13, 베를린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법학자·역사학자.

푸펜도르프(Freiherr von Pufendorf)

ⓒ Joseph de Montalegre/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자연법사상 옹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죽던 해에 남작작위를 받았다.

성장과정 및 주요저서

푸펜도르프는 루터파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한 부유한 귀족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그의 아버지는 그와 형 에자이아스를 그리마의 유명한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철저한 고전교육을 받았다. 그후 당시 정통 루터파의 본거지이던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나, 곧 법학·문헌학·철학·역사학 등으로 관심을 돌렸다. 1656년에는 예나로 가서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접했고, 휘고 그로티우스와 토머스 홉스의 저작들을 연구했다.1658년 푸펜도르프는 코펜하겐 주재 스웨덴 대사의 가정교사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대사의 다른 수행원들과 함께 구금되었다. 8개월간의 구금생활 동안 그는 〈2권의 만국법요론 Elementorum Jurisprudentiae Universalis Libri Duo〉(1660 출판)을 다듬는 데 몰두했는데, 이 책에서 그로티우스와 홉스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 책을 헌정받은 선제후 카를 루트비히는 그를 위해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인문학부에 독일 최초로 자연법 전임교수직을 만들었다. 그는 1661~68년 동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독일의 현상태 De Statu Imperii Germanici ad Laelium Fratrem Dominum Trezolani Liber Unus〉를 저술했다. 이 책이 1667년에 출판되었을 때, 베로나의 귀족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헌법과 오스트리아의 의회에 관한 부분에 대해 신랄한 공격을 받았다.

이 책은 헌법과 역사에 관한 해박한 지식에 기초한 것이었고, 출판되자마자 유럽 대륙 전역에 걸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 책은 제국의 검열당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는데, 바로 이 금서지정 조치 때문에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외국에서 출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웨덴에서의 생활

1668년 푸펜도르프는 하이델베르크대학교를 떠나 새로 창설된 스웨덴의 룬드대학교 자연법 전임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보낸 20년은 그의 인생의 황금기였다. 1672년 그는 자신의 명저로 꼽히는 〈자연법과 만민법 De Jure Naturae et Gentium Libri Octo〉를 발표했고, 1673년에는 이 책에서 발췌·인용하여 〈자연법하에서의 인간의 의무 De Officio Hominis et Civis Juxta Legem Naturalem Libri Duo〉를 출간했다.

이 저서들에서 그는 자연법에 대한 중세 신학자들의 전통적인 접근법을 버리고 자신의 접근방법의 기초를 '사회적 존재'(socialitas)로서의 인간의 실존에 두었다. 그는 모든 개인은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하여 평등권과 자유권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천성적 노예신분과 같은 존재는 결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주인-노예 관계는 오직 상호 동의에 의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민법·형법·헌법 이론 또한 이러한 사회적 존재의 개념으로부터 끌어낸 것이었다(아리스토텔레스 주의). 그가 끼친 영향력은 투쟁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스웨덴과 독일에서 보수적인 개신교 신학자들로부터 수많은 공격을 받았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그를 "법률가도 아니며, 결코 철학자도 아닌 자"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스웨덴 정부는 그를 옹호했다. 1686년 에리스 스칸디카(Eris Scandica)라고 서명하여 출판한 소책자에서 그는 자신의 신념을 매우 효과적으로 항변했다.

덴마크가 룬드를 점령한 후인 1677년에 푸펜도르프는 스톡홀름에서 왕실사료편찬원이 되었는데, 그는 이때 구스타프 2세 아돌프로부터 카를 10세 구스타프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스웨덴 역사를 저술하는 데 전력했다. 1687년에는 〈시민의 생활과 관련된 그리스도교의 힘에 관하여 De Habitu Religionis Christianae ad Vitam Civilem〉를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교회에 대한 국가의 세속적 우월성을 제창했지만, 그와 동시에 개인의 양심의 자유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종교와 교회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의 권한을 인정했다. 그의 이러한 접근법은 교회의 조직체계와 종교회의 제도의 기초가 되어 18세기에 한층 더 발전하여 독일에서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한편 이 책은 일반적인 관용 및 특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관용사상을 옹호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는데, 당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1685년 프랑스에서 추방된 위그노파 개신교도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었다.

1688년 푸펜도르프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사료편찬원이 되어 베를린으로 갔다. 그는 1694년 남작작위를 받았으며, 그해에 죽었다. 1695년에 출판된 유작 〈외교법 및 개신교도의 화합과 불화 Jus Feciale Sive De Consensu et Dissensu Protestantium〉에서 그는 교회법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명확하고도 상세히 설명하는 한편, 루터파와 칼뱅파로 나누어져 있던 개신교를 통합한 통일개신교단의 구성을 주장했다.

18세기에 이르러 그의 저서는 수많은 형태로 출판되었다. 존 로크와 장 자크 루소는 젊은이들을 위한 필독서로 그의 저작들을 추천했고,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 2세는 어린시절 〈자연법하에서의 인간의 의무〉로 교육을 받기도 했다. 푸펜도르프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존 와이즈(1652~1725)는 당시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에서 목사이자 소책자 필자로서 식민지 시대의 아메리카 교회법과 시민의 자유권 및 종교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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