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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0. 10. 25, 잉글랜드 레스터셔 로틀리템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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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59. 12. 28, 런던 캠든힐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휘그당 정치가, 수필가, 시인, 역사가.
개요
그가 쓴 유명한 〈영국사 History of England〉(5권, 1849~61)는 1688~1702년의 영국을 다루고 있으며 이른바 '휘그식 역사해석'의 창시자로서 그의 위치를 굳힌 책이다.
1857년 귀족이 되었다.
초기생애와 정치활동
레스터셔에 있던 아저씨의 집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헤브리디스 제도 출신의 장로교 목사였고 아버지 재커리 매컬레이는 시에라리온의 총독을 지냈다. 열렬한 박애주의자였던 아버지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싸운 윌리엄 윌버포스의 친구였으며 철저히 복음신앙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퀘이커교도인 어머니는 브리스틀의 서점주인 딸이었다. 그는 9형제 가운데 맏이었으며 가족들에게 헌신했고 특히 두 누이동생 해나와 마거릿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8세 때 세계사 개론을 썼고 월터 스콧 경의 시풍(詩風)을 본떠 낭만적인 서사시 〈체비엇 전투 The Battle of Cheviot〉를 썼다.
사립학교에서 공부한 뒤 1818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갔다. 1831년까지 이곳의 특별연구원으로 남아 있었고 재능있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다정한 성격과 지칠 줄 모르는 언변으로 신망을 얻었다. 1825년 밀턴에 관해 쓴 최초의 평론이 〈에든버러 리뷰 The Edinburgh Review〉에 실리자 유명해졌고, 더욱 넓은 무대에서 자신의 사회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었으며, 그 시대 거의 모든 뛰어난 인사들에게 사랑과 찬사를 받았다.
법률을 공부해 1826년 변호사가 되었으나 본격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자 그는 저술과 강의로 가족을 부양했고 사소한 공직을 맡았다. 정계 진출을 꿈꾸며 1830년 윌트셔의 칸 대표로 하원의원이 되었다. 선거법 개정안(1832)의 통과에 앞서 열린 토론에서 유창한 연설로 의회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그는 그시대 여러 위대한 웅변가들 가운데 지도적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동인도회사의 인도 통치를 감독하던 인도 통치부에 들어갔으며 나중에 그곳의 장관이 되었다.
낮에는 인도 업무를 보고 저녁에는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바쁜 가운데도 시간을 내어 〈에든버러 리뷰〉에 기고한 8편의 문학·역사 평론을 비롯해 발라드 〈아르마다 The Armada〉를 썼다.
1832년 선거법 개정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의회의원 선거에서 새로이 자치권을 얻은 리즈 선거구의 2명의 의원 중 1명으로 뽑혔다. 노예제도가 쟁점으로 떠오르자 그는 곧 양심문제에 부딪혔다. 정부 관리로서 내각이 제안한, 그러나 노예폐지론자들은 반대하는 수정안에 찬성표를 던져야 할 입장이었다.
그는 사표를 제출하고 정부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하원이 노예폐지론을 지지했으며 정부가 양보함에 따라 그는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인도통치
1834년 무렵 새로 생긴 인도 최고위원회에서 일해달라는 요청을 받자 자신의 봉급으로 평생먹고 살 충분한 돈을 모을 수 있으리라 믿고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누이 해나를 데리고 인도에 도착했는데 이때는 동인도회사의 효율적인 통치가 영국 왕실의 통치로 바뀌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점에서 그는 언론의 자유, 유럽인과 인도인의 법적 평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구식 형태이기는 했으나 전국적인 교육제도를 만들고 인도법제위원회의 의장으로서 나중에 인도 형법의 기초가 된 형법전 초안을 만들었다.
한편 영국에 있던 누이동생 마거릿이 죽고, 1835년 여동생 해나가 동인도회사의 유망한 젊은 직원 찰스 트리빌리언과 결혼하려고 그의 곁을 떠나자 개인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말년과 저술
1838년 영국으로 돌아와 에든버러 대표로 의회에 들어갔다.
1839년 멜버른 경 내각의 육군장관이 되었으나 1841년 내각이 무너지자 틈을 내어 〈고대 로마의 담시 Lays of Ancient Rome〉(1842)와 평론집 〈비평적 역사평론 Critical and Historical Essays〉(1843)을 펴냈다. 1846년 존 러셀 경이 총리직에 오르자 재무부 경리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846~47년의 의회 회기에서는 5차례밖에 연설을 하지 않았다. 1847년 지역이해를 소홀히 했던 까닭에 에든버러에서 낙선했고, 정치에 흥미를 잃은 그는 구원받은 심정이 되어 개인생활로 돌아와 〈영국사 History of England〉의 저술에 몰두했다.
내용과 문체를 끝없이 고치면서 천천히 집필했다. 사실을 확인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종종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기도 했다. 1849년 첫 2권이 나오자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어 재판(再版)을 거듭하며 영국과 미국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1852년 휘그당이 다시 정권을 잡았을 때 각료직을 거절하고 에든버러 대표로 의회에 돌아왔으나, 얼마 뒤 심장병에 걸려 정치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영국사〉의 제3, 4권은 1855년에 발행되어 즉시 널리 유포되었다.
처음 책이 나온 뒤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영국에서만 약 14만 권이 팔렸으며 미국에서도 그에 못지 않게 팔렸다. 이 책은 독일어·폴란드어·네덜란드어·덴마크어·스웨덴어·헝가리어·러시아어·보헤미아어·프랑스어·스페인어 등으로도 번역되었다.
1856년 그는, 1840년부터 살아온 피카딜리의 올버니를 떠나 그때에는 잔디와 나무가 우거져 있던 캠든힐의 홀리로지로 이사했다. 이듬해 로슬리의 매컬레이 남작으로 귀족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져 상원에서는 한번도 연설을 못했으며, 〈영국사〉에서 윌리엄 3세 재위기간을 다 쓸 때까지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시인했다.
그는 캠든힐에서 죽어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묻혔다. 〈영국사〉 제5권은 누이동생이 편집해 1861년 발행했다.
매콜리의 성격
매콜리는 다른 많은 천재들과는 달리 자신의 특출한 정신적 재능 때문에 불행을 당하거나 정신적 고뇌를 겪지는 않았다.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정치에서 높은 자리에, 어쩌면 최고의 지위에까지 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을 영국의 과거를 그리는 데 바치기로 했다.
그의 문학지식은 비길 데가 없었다. 비범한 기억력 속에 저장한 그리스 로마 문학에 관한 지식은 대학시절부터 정통해 있었으며 여기에다 영국의 문학과 프랑스·스페인·독일 문학의 지식을 덧붙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말년에는 어떠한 종교적 신념도 표현하지 않았으며, 윤리적이 아닌 정신적 우수함에 대해서는 평가를 하지 못했다. 종교와 철학에 관한 사색은 전혀 낯선 일이었으며 기술과 관계가 없는 과학적 발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예술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문외한이라고 고백했으며 음악에는 귀머거리나 다름없었다. 놀이, 스포츠, 면도나 넥타이 매기 같은 육체적 기술에는 완전히 무능했다. 생김새는 작은 키에 수수하며 옹골찬 모습이었고 강인한 정신력과 솔직하며 개방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다. 대신 누이동생들, 특히 트리빌리언 부인이 된 해나에 대한 애착과 연민으로 무한한 애정을 쏟았고 거기에서 만족을 느꼈다. 해나는 결혼 뒤에도 거의 매일 그를 만났고 그는 누이의 아이들을 자기 아이들처럼 생각했다. 그는 보람된 삶에 민감했으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이런 삶을 누릴 수 있는 수단으로 부(富)를 받아들였으나, 성격상 돈만 바라거나 이기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생활이 넉넉해지자 때로는 무모하게까지 남들에게 베풀었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도 가난한 목사보에게 편지를 받아쓰게 하고 25파운드 수표에 서명한 것이었다.
매콜리에 대한 평가
그는 〈영국사〉를 씀으로써 동시대의 역사가 헨리 핼럼과 더불어 이른바 휘그당식 역사 해석의 창시자로서의 위치(비록 비중은 줄어들었지만)를 굳혔다. 엄격한 복음신앙의 전통과 자유주의 개혁의 분위기에서 자란 그는 의회의 우월성을 확고히 하고 군주제를 헌법상 지위로 제한한 1688년 혁명에서 이런 가치의 기원과 승리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1688년부터 1820년 조지 3세의 죽음까지의 영국사를 쓸 계획이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그의 이 저술은 혁명 전후시대를 기술한 혁명사라고도 볼 수 있다. 영국사에서 혁명이 지닌 고유한 중요성과 혁명을 부른 휘그당(토리당도 역시 개입했지만) 사람들의 가치관의 우수성을 함축적으로 강조하면서 영국사를 보는 관점을 대중화시켰다. 조카 조지 오토 트리벨리언과 조카의 아들 조지 매콜리 트리벨리언이 그의 뒤를 이어 제2차 세계대전까지 역사교육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평론은 한 세대 동안 영국인들의 견해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처음으로 과거를 생생하게 훑어볼 기회를 주었으며, 영국의 제도는 영국의 보호를 받는 개발도상국가들의 이익을 최대로 높여줄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짤막한 문장에 빈틈 없는 단락, 명료하고 단호하며 감정이 섞이지 않은 그의 독특한 문체는 반세기 동안 고급 신문·잡지와 모든 종류의 해설적 논문의 영어 문체를 특징지었다. 그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엄청난 명성을 누렸으나 그뒤 50년 동안 조금씩 그 명성이 퇴색했다.
공공연한 당파심, 문화·진보에 대한 영국 부르주아의 규범이 후진국들의 영원한 기준이 될 것이라는 오만한 가정, 실질주의적 가치관과 기호 등은 모두 토머스 칼라일, 매슈 아널드, 존 러스킨 등 그와 가까운 시대의 비평가들에게서 심한 공격을 받았다. 더구나 그가 살아 있을 때 이미 독일에서 일어난 역사학의 혁명이 곧 영국 역사서술에 영향을 미쳤으나 정작 그 자신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학식은 방대했지만 가끔 지나친 열정으로 흥분할 때가 있었으며, 대체로 무비판적으로 접근했다. 연설가로서의 훈련과 취향으로 인해 그의 저서는 공정한 설명이라기보다는 특별한 목적을 지닌 해명이었다. 이런 심각한 문제점이 있지만 그의 위대성은 논란의 여지가 없으며 그의 〈영국사〉는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폭넓고 다양한 지식, 생생하고 면면한 서술의 힘, 탄탄한 구성을 이루도록 주제를 정리·정돈한 솜씨로 보아 〈영국사〉는 영국 역사가들의 저서 가운데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에 버금가는 우수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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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토머스 바빙턴 매컬레이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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