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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로 몸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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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17. 11. 30, 슐레스비히 가르딩
사망 1903. 11. 1, 베를린 근처 샤를로텐부르크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역사가·작가.

테오도어 몸젠

Theodor Mommsen 1902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개요

걸작 〈로마사 Römische Geschichte〉로 유명하며 1902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초기생애

슐레스비히의 가르딩에서 프로테스탄트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올데슬로에(지금의 바트올데슬로에)에서 자랐다.

당시 홀슈타인 공국에 속해 있던 알토나의 '김나지움 크리스티아노임'(중등학교) 상급반에서 기초적인 고전공부를 했고 1838~43년 킬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당시 독일에서 법률연구는 주로 로마법을 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때의 공부가 장래 연구방향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법률과 역사 사이에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는 그의 사상은 당시의 교사들보다도 역사법률학파의 창시자인 프리드리히 카를 폰 자비니의 저작에서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석사와 박사 학위를 딴 뒤 그는 자신의 군주였던 덴마크 왕이 주는 연구장학금을 받아 1844~47년 3년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는 그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으며 로마의 '고고학 연구소'는 연구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무렵 몸젠은 이미 〈라틴 명문(銘文) 전집 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을 구상했다. 이 책은 고대부터 돌·철 등의 내구성이 강한 물질에 새겨 보존된 라틴 명문을 집대성하여 문헌학적 방법론의 기본원리에 따라 배열한 것이었다.

킬대학교의 젊은 교수 오토 얀을 통해 이 분야에 대한 예비지식을 갖추게 되었던 그는 산마리노의 박식한 정치가 바르톨로메오 보르게시의 지도를 받아 이내 금석학(金石學 : 명문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학문)의 대가가 되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몸젠은 〈라틴 명문 전집〉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단편적인 문헌자료를 보완하는 필수적인 자료가 되었고 처음으로 고대세계의 일상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왔을 때 몸젠은 슐레스비히의 사회불안이 고조되고 있는 상태임을 알았다. 슐레스비히 태생인 그는 덴마크 왕의 백성이었으나 스스로 독일인으로 자처했고 독일인이기를 원했으며 독일의 통일을 고대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자유란 독일 국가들이 외세의 영향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독일 시민들이 전제주의나 경찰국가를 제외한 어떤 종류의 정치체제든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갖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자유주의자로서 공화국을 이상적인 국가형태로 생각했으나 입헌군주제일지라도 그것이 헌정(憲政)의 탈을 쓴 위장한 전제정치가 아니면 괜찮다고 보았다. 몸젠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이니셰 차이퉁 Schleswig-Holsteinische Zeitung〉의 편집장직을 맡아 1848년 혁명 때 수립된 임시정부를 위해 일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언론은 그의 취향에 잘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해 말 라이프치히대학교 민법 교수직을 맡으라는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행동하는 정치가로서뿐 아니라 사려 깊고 비판적인 관찰자로서 평생 동안 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1873~79년 프로이센 영방의회 의원, 1881~84년 독일 제국의회 의원을 지냄). 그는 계속 정치활동에 시간과 정력을 쏟았으나 국가와 그 자신에게 얼마나 이익을 주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학자로서는 자기 분야에서 공인받는 권위자였지만 정치가로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특별히 나을 게 없는 단순한 추종자에 불과했다. 더욱이 정치활동 때문에 학문활동을 위태롭게 만든 적도 몇 번 있었다. 1849년 5월 작센에서 일어난 봉기에 가담했다가 교수직을 박탈당했고 투옥될 뻔했다.

라이프치히에서 해임된 뒤 1852년 취리히에서 법률학 교수직을 맡았다.

자신의 '망명객' 신세를 한탄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가 스스로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깊이 절감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1854년에는 프로이센의 브레슬라우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무렵 그는 서적상의 딸인 마리 라이머와 결혼했는데 오래도록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렸으며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역사가로서의 활동과 저작

몸젠은 라이프치히·취리히·브레슬라우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로마사〉의 첫 3권을 완성했다.

BC 46년 타프수스 전투까지를 집필함으로써 이 저작은 로마사 연구에 새로운 방법론을 도입했다. 그는 이제까지 의심없이 받아들였던 구전자료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으며 고전시대를 이상화하는 계몽주의식 연구태도를 거부했다. 한편 역사서술에 엄격한 사료비판 방식을 도입한 역사가 바르톨트 게오르크 니부어의 제자로 자처했으나 두 사람의 연구방법과 서술방법은 달랐으며 더욱이 로마사에서 신화성을 제거하는 일에는 몸젠이 니부어보다 훨씬 앞섰다.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일반대중들이 보기에 올림포스 산 꼭대기에 사는 존재 같은 고대인들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일이었다. 이러한 근대적 연구방법이 모든 사람의 취향에 맞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몸젠은 19세기의 사회정치적 언어를 사용해 과거를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주계급과 사제들이 고대 로마에서도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고 본 것은 자유주의 정치가로서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그럼에도 〈로마사〉는 정치적 경향성을 띤 저작이 아니라 독특한 문체가 특히 돋보이는 최고 수준의 학문적 저작이다.

문헌학자는 구비전승(口碑傳承)의 보존자로 간주되지만 몸젠은 그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는 오히려 예술가에 가까웠는데 주로 언어를 다루는 데서 자신의 예술적 기량을 발휘했다. 그는 산문 문체를 부적합하게 배합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로마사〉와 〈로마 헌법 Römisches Staatsrecht〉 두 저서를 통해 내용과 형식을 훌륭히 통일시키면서도 서로 다른 2가지 문체를 창조해냈다.

창조적인 시인은 아니었지만 그는 시를 수단으로 이용했으며 시적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즐겼다. 1843년에 동생 티호와 작가이자 시인인 테오도어 슈토름과 함께 펴낸 〈세 벗의 노래책 Liederbuch dreier Freunde〉에 그의 재능이 잘 나타나 있다. 평생 동안 괴테를 시인이자 '당대 제일의 현자(賢者)'로서 이상형으로 삼았다.

한편 영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 등의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므로 연구여행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그는 괴테뿐 아니라 셰익스피어도 자주 인용했다.

그가 독재자 카이사르를 높이 평가하고 폼페이우스와 키케로 같은 카이사르의 정적(政敵)을 비난한 것은 많은 비평가들이 보기에 그의 자유주의적 정치관에 어긋나는 것처럼 여겨졌다. 몸젠은 단지 몰락해가는 국가의 구원자로서 카이사르를 찬양했을 뿐이라고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애썼으나 그가 카이사르를 찬양한 데는 어느 정도 그의 성격이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몸젠이 자기 학문 분야에서 독재자여서 반대자들은 그의 학문연구 방법을 '카이사르주의'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생각이 일치하는 동료를 누구보다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개인적 친교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으며 실제로 사람 사귀는 재주가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와 우정을 나눈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었다.

누구든 자신을 몸젠의 친구로서 몸젠과 동등하게 여긴 사람은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라틴 명문 전집〉 출판계획을 추진하려면 프로이센 학술원 회원이 되어야만 했으므로 몸젠은 1858년 베를린대학교에서 직책을 맡았다. 그는 또한 1861년 그 대학교 철학부 교수가 되었는데 그가 법학부가 아닌 철학부를 선택한 것은 문헌학과 역사학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로마사와 금석학 과목의 교수로서 그는 나중에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학생들을 특히 세미나를 통해 많이 양성했다. 그의 연구작업은 주로 〈라틴 명문 전집〉을 계속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또한 〈게르만 역사문헌집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편찬과 리메스(limes : 독일 남서부에 있던 로마 변경 요새) 탐사, 프로이센 학술원의 고대 화폐 연구, 〈라틴어 사전 Thesaurus Linguae Latinae〉 편찬 등과 같은 여러 대규모 학술사업에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새로이 파피루스 연구에 관심을 쏟은 데서도 나타나듯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항상 새로운 학문적 요구에 마음이 끌렸다.

몸젠의 역사연구는 명문 집대성 사업 때문에 중단되었으며 〈로마사〉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몇 십 년 후 베를린에서 로마사를 완성하는 작업에 착수했을 때 몸젠은 황제들의 역사를 다루는 제4권의 집필 계획을 포기했는데 그 까닭은 스스로가 그것을 도저히 공화정의 역사만큼 훌륭한 문체로 써낼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1885년에 발표된 제5권은 제정 로마 시대의 처음 3세기에 걸친 로마 속주(屬州)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명문과 주화라는 문헌외 사료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서 몸젠을 따를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역사는 몸젠이 아니었다면 어느 누구도 그처럼 권위있는 논조로 서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몸젠이 남긴 최대의 학문적 업적으로서 학자들에게 〈로마사〉보다 더 중요한 저작으로 꼽히는 〈로마 헌법〉은 1871~88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스스로도 기억할 만한 업적이 있다면 바로 이 저작일 것이라고 했다. 로마인들 자신은 헌법을 집대성한 적이 없었으나 몸젠이 최초로 그 일을 해냈던 것이다. 그는 고전학문에 대한 역사적 접근방법을 사용해 로마 헌법의 바탕을 이루는 무수한 세부적 법률들을 체계적으로, 그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해명했다. 몸젠같이 법학과 고전학에 모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야 로마의 공법(公法)을 연구대상으로 삼을 수 있고 또한 역사적 개념을 가지고 사고하는 훈련을 거친 사람이라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공법에서 형법은 헌법과 나란히 취급되었는데 몸젠의 마지막 대작은 바로 1899년에 출판된 〈로마 형법 Römisches Strafrecht〉이었다.

86회 생일을 4주 남겨놓고 숨을 거두었을 때 몸젠은 이미 동시대인들에게 신화적인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그가 늘 원했던 일들을 다 마친 상태였다. 거의 초인간적인 기준에 따라 자신이 해야겠다고 설정한 과업들을 완성시킨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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