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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득, 묻다
: 두 번
째 이야기

우리는 언제부터 쌀을 먹었을까

밥을 먹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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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이 얼마나 밥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밥의 존대표현이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바로 ‘진지’라는 말입니다. 안부를 물을 때도 진지는 드셨느냐, 밥은 먹었냐고 묻고 다음에 보자는 약속을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는 말로 대신하곤 하지요. 심지어 ‘밥벌레’라는 욕도 있습니다. 아까운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밥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터 먹었을까요?

한자로 쌀 미(米)는 농부의 손을 여든여덟 번 거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벼농사는 손이 많이 가고, 재배하는 과정에서 시기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협동은 필수입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밥을 먹었느냐는 질문은 언제부터 공동체 생활을 했느냐는 질문과 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벼농사를 시작한 것은 약 3천 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지난 2003년 밀양시 산외면의 금천리 부산-대구 고속도로 공사현장에서 5천여 평 규모의 논터와 보터가 발견된 것에 따른 것인데요. 벼농사에 필수적인 물을 가둬놓는 둑으로 사용했을 말뚝과 그물 모양의 나무들, 여기에서 물을 끌어들인 수로가 발견됐습니다.

학자들은 이 논터를 3천 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했고, 이로써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연대가 무려 천 년 이상 앞당겨졌습니다. 이때의 벼농사 기법은 7천여 년 전 인도 갠지스 강 유역에서 시작돼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쌀’이라는 말도 고대 인도에서 쌀을 뜻한 ‘사리(sari)’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요. 그렇다고 우리 민족이 이때부터 쌀을 먹기 시작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과 쌀을 먹기 시작한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최초의 쌀은 야생 씨앗의 형태였을 것입니다. 남자들이 무리를 지어 사냥을 나갔을 때 여자들은 들판에 나가 부지런히 풀과 씨앗, 열매 등을 채집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식량을 다 먹으면 그곳을 떠나 다른 들판으로 향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수천 년 되풀이하는 동안 신기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몇 해 전에 풀과 씨앗, 열매 등을 채집했던 곳으로 돌아가 보니 다시 무성하게 자라 있는 것입니다. 호기심 많은 누군가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궁금해했겠지요. 그는 우연히 땅에 떨어진 씨앗이 자라 또 다른 씨앗을 맺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물론 이 사실을 발견하기까지 수천 년, 혹은 몇백 년이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또 호기심 많은 누군가가 이번에는 일부러 많은 씨앗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곳을 떠납니다. 다음해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들판이 풀로 뒤덮여 있고 주렁주렁 씨앗과 열매를 매달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야생 벼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먹기에는 거칠고 딱딱하지만 껍질을 벗겨내 불에 익히면 먹을만하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발견하기까지 또 몇백 년이 흘렀을 수 있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몇백 년은 우리의 몇 초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볍씨를 땅에 뿌리기 시작했고 채집해서 먹었습니다.

논농사라기보다는 밭농사에 가까워 보이는 이런 형태가 우리나라에서는 1만5천 년 전에 시작됐을 거라고 하는데요. 우리의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연대지요. 이런 추정은 1998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오창과학산업단지 터에서 1만3천 년 전의 ‘탄화 볍씨’ 59개가 발굴되면서 나왔습니다. 소로리 볍씨는 2000년 말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인정받았지요. 중국의 볍씨보다 무려 4천5백 년이 앞섰고, 5천 년 전 인도 갠지스 강 유역에서 재배된 벼의 유전정보와 70퍼센트 정도 유사합니다.

인류 최초로 농사를 지은 것으로 알려진 그곳에서 발굴된 볍씨보다 무려 8천 년까지 앞서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류의 농경역사를 새로 써야 할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처럼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중국을 거쳐 인도로 전래됐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쌀이라는 말도 인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쌀이 인도로 건너가 사리가 됐을지 모르고요. 이처럼 인류의 역사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무엇이 발굴되느냐에 따라 다시 쓰이기 마련입니다. 수천 년이 아니라 1만5천 년 동안 쌀을 채집해 밥을 지어 먹어온 우리 민족. 한국인의 살을 만든 일등공신이 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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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 안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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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경 집필자 소개

1970년 전북 부안 출생, 1993년부터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글을 쓰고 있으며, 2011년부터 매일 아침 KBS 클래식 FM [출발 FM과 함께]에서 [문득 묻다], [그가 말했다] 등의 글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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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묻다 : 두 번째 이야기
문득, 묻다 : 두 번째 이야기 | 저자유선경 | cp명지식너머 도서 소개

미스터리한 인물들과 매일 우리가 무심코 보고 생각하고 자고 행동하는 일상에 대해 문득 궁금해진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덕분에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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