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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득, 묻다
: 두 번
째 이야기

신사의 결투로 죽음을 맞이한 시인은 누구일까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

러시아의 시인, 극작가

ⓒ Orest Adamovich Kiprensky / wikipedia | Public Domain

인용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한때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만큼이나 흔하게 이발소와 다방, 교실, 학원, 각 집안의 벽 등 여기저기에 표어처럼 걸려 있던 문구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이 문장을 외우면서도 정작 출처는 잘 몰랐던 것은 ‘소련’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는 것이 두려운 냉전시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에는 참고 견디라
믿으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지는 것이니
지나가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라
- 알렉산드르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바로 19세기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이 쓴 시지요. 푸시킨은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보다 자국민들에게 더 큰 사랑을 받는 대문호입니다. 그가 살던 시대에 러시아의 왕족과 귀족은 러시아어 대신 프랑스어를 구사했지요.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보니 정작 러시아어는 말과 글이 서로 달라서 글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어쩐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모국어의 역사입니다.

푸시킨은 말과 글을 일치시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글을 쓰기 시작한 작가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러시아에서도 뼈대 있는 귀족 가문 출신입니다. 이런 그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러시아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농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평민의 편에 서겠노라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오레스트 키프렌스키가 그린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초상〉 을 보면 그가 소문대로 상당히 멋쟁이였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전형적인 러시아인의 생김새와는 거리가 멉니다. 피부는 까무잡잡하며 머리카락은 검고 구불거리는 데다 검은 눈동자에 코끝이 납작한 편인데요. 이런 그의 외모는 러시아 귀족들 사이에서 상당히 튀어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푸시킨은 자신의 외모를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하지요. 그도 그럴 것이, 외증조부가 표트르 1세 시절의 유명한 장군, 아브람 한니발인데 그의 혈통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브람 한니발은 일곱 살 때 에티오피아에서 노예로 끌려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술탄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러다 여덟 살 때 러시아로 끌려갔는데 남다른 총명함이 표트르 1세의 눈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표트르 1세는 이 흑인 노예 소년에게 카르타고의 명장인 한니발의 이름을 성(姓)으로 하사했고 스물한 살 때는 파리로 보내 예술과 과학, 군사 등 고급 교육을 받도록 했습니다. 러시아로 돌아온 한니발은 군 입대 후 소장까지 진급해서 군사기술자로 명성을 얻었는데요. 이 한니발 장군의 손녀가 바로 푸시킨의 어머니입니다.

‘에티오피아에서 끌려온 노예에서 러시아제국의 장군까지’, 차르와 소수 귀족에 맞서 다수 민중을 대변하는 것을 신념으로 삼았던 푸시킨이었으니 이런 자신의 혈통에 큰 자부심을 가질만하지요. 그러나 이런 그의 신념이나 이상과 달리 서른여덟이라는 이른 나이에 맞은 죽음은 세간에 알려진 대로라면 너무나 어이없고 허무했습니다. 망명 온 프랑스군 장교 출신 조르주 단테스와 법으로 금지된 결투를 벌인 것이 죽음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결투를 먼저 신청한 쪽은 푸시킨입니다. 푸시킨의 아내인 나탈리아 곤차로바는 러시아 사교계의 꽃으로 불릴 만큼 미모가 빼어났는데, 단테스가 그녀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구애했다고 하지요. 신사의 결투에서 먼저 총을 맞은 이는 푸시킨이었습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상태에서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저택 부근에 2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푸시킨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지요.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Alexander Sergeyevich Pushkin)

ⓒ K.P.Mazer/wikipedia | Public Domain

많은 사람들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푸시킨은 이틀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니콜라이 1세가 푸시킨의 장례식에 앞서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는데 내용이 수상쩍습니다. “장례식 장소를 비밀리에 변경할 것, 일반인의 장례식 참석 엄금, 가족과 친구들만 참석 가능, 군대는 비상 대기할 것, 황실 주치의를 보낼 것, 불법 결투를 벌였지만 사면할 것, 신문의 과격한 추모 기사는 엄금.”

과한 감이 없지 않지요. 푸시킨의 장례식이 민중의 시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여긴 것입니다. 푸시킨이 왕족과 귀족에게 적잖이 껄끄러운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 때문에 푸시킨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문제의 결투가 사실은 러시아 궁정 세력이 푸시킨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였다는 설이 나돌았습니다. 푸시킨이 결투를 신청하지 않을 수 없게끔 단테스가 빌미를 제공했다는 거지요.

설령 그럴지라도, 푸시킨과 곤차로바의 사랑이 영원한 것으로 회자되었다면 그의 죽음이 덜 허무하게 느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푸시킨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후에 아름다운 곤차로바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영원히 러시아를 떠나버렸습니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면서 신사의 결투를 신청한 예술가가 또 있습니다. 벨기에의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그 주인공입니다. 《파랑새》를 쓴 바로 그 작가지요. 두 주인공의 이름이 우리나라에서 ‘치르치르’와 ‘미치르’로 알려진 것은, 일본어 번역본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한 잘못이고, 원래 이름은 틸틸과 미틸입니다. 마테를링크는 이 작품을 발표하고 3년 후인 1911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데요. 《파랑새》에 등장하는 요정,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미래의 왕국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와 그것들이 함축한 의미를 떠올리면, 그를 왜 ‘영혼의 이야기’를 쓰는 상징주의 문학의 대가로 부르는지 알 수 있습니다.

《파랑새》를 쓰기 훨씬 전인 1892년에 발표한 희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줄거리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주인공의 정체가 무엇인지 끝까지 알 수 없으며, 분위기가 모호하고 신비로우며 무엇보다 대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의 마음에 쏙 들었고, 마테를링크로부터 오페라로 개작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습니다.

드뷔시 (Achille Claude Debussy)

20세기 음악의 기초를 확립한 프랑스의 작곡가. 대표적인 인상주의 음악가

ⓒ Nadar / wikipedia | Public Domain

드뷔시는 10년에 걸쳐 〈펠리아스와 멜리장드〉를 서정극으로 옮겼는데 원작의 내용을 거의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마테를링크는 드뷔시가 자신의 작품을 훼손했다고 분노했고, 급기야 1902년 4월 30일 초연을 앞둔 시점에서 결투를 신청하기에 이릅니다. 드뷔시는 결투 신청을 받지 않고 계속 거절했지만, 그가 결투에 대한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는 소문이 파리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둘 사이에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마테를링크는 자신의 원작이 무대에 오를 때, 늘 아내인 조르게트 르블랑을 여주인공으로 써줄 것을 조건으로 달았는데, 10년 전 드뷔시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드뷔시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르블랑의 노래를 듣고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테를링크가 드뷔시에게 결투를 신청한 것은 원작자로서가 아니라 남편으로서였던 것입니다.

드뷔시가 결투를 받아주지 않으니 분한 마음을 분출할 길 없던 마테를링크는 〈피가로〉에 ‘나는 이 작품이 망하길 바란다’고까지 공개 글을 내기에 이르는데요. 이런 그의 바람과 달리 드뷔시의 서정극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대성공을 거뒀고, 20세기 현대음악 걸작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혹자는 이 작품을 ‘더듬거리는 유령’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드뷔시는 감각적이면서도 미묘한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음악에 살리고 싶어서 멜로디를 확실하게 살리지 않았고, 아리아를 비롯한 노래를 넣지 않았는데요. 한마디로 누군가는 걸작이라며 찬사를 보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지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드뷔시보다 서른 살쯤 위였던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는 후자였던 모양입니다. 공연을 관람하다가 드뷔시에게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연주되냐?”고 물었다가 “끝날 때까지!”라는 면박을 받았다는, 재미있는 후일담이 전해집니다.

우리로서는 드뷔시가 마테를링크의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참 다행입니다. 만약에 결투를 받아들여서 누구 한 사람 목숨을 잃기라도 했다면 《파랑새》를 읽지 못했던지, 아니면 드뷔시의 관현악곡 <바다>와 피아노곡 〈달빛〉을 듣지 못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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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 Debus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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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경 집필자 소개

1970년 전북 부안 출생, 1993년부터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글을 쓰고 있으며, 2011년부터 매일 아침 KBS 클래식 FM [출발 FM과 함께]에서 [문득 묻다], [그가 말했다] 등의 글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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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묻다 : 두 번째 이야기
문득, 묻다 : 두 번째 이야기 | 저자유선경 | cp명지식너머 도서 소개

미스터리한 인물들과 매일 우리가 무심코 보고 생각하고 자고 행동하는 일상에 대해 문득 궁금해진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덕분에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져..펼쳐보기

전체목차
Chapter 01. 그 사람은 누구일까 누가 생텍쥐페리를 격추시켰을까? 윤동주와 백석이 동시에 사랑한 시인은 누구일까? 스탕달 신드롬을 일으킨 미인은 누구일까? 아메리칸 이브는 누구일까? 댄디즘의 시조는 누구일까? 뱀파이어는 누구일까? 프랑켄슈타인은 누구일까? 〈미녀와 야수〉의 야수는 누구일까? 누가 디즈니 성을 지었을까? 혼자서 궁전을 지은 사람이 있을까? 세계 최초의 건축가는 누구일까? 우리나라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는 누구일까? 멘토는 누구일까? 〈아테네 학당〉에 여성이 있을까, 없을까? 고대에 광선총을 발명한 사람은 누구일까? 가발을 유행시킨 사람은 누구일까? 〈옴브라 마이 푸〉를 부른 세르세는 누구일까? 우산을 발명한 사람은 누구일까? 화투의 ‘비광’ 속 우산 쓴 사람은 누구일까? 바다의 무법자, 해적왕은 누구일까? 보물선을 발견하면 주인은 누구일까? 클레멘타인의 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이었을까?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누구를 위한 노래일까? 백만 송이 장미를 받은 여인은 누구일까? 누가 살리에리를 모차르트를 시기한 자로 만들었을까? 신사의 결투로 죽음을 맞이한 시인은 누구일까? 세계 3대 악처는 누구일까? 누가 온달을 바보로 만들었을까? 지리산의 산신은 누구일까? 고수레는 누구를 위한 말일까? 돌하르방은 누구일까? 도깨비는 누구일까? 갑은 누구일까? 교활, 낭패, 유예는 누구일까? 최초의 실루엣 그림 속 인물은 누구일까? 산타클로스와 루돌프는 누구일까? 누가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켰을까? 1등보다 유명한 2등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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