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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
째 이야기
1등보다 유명한 2등은 누구일까
한때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고문구가 인기였습니다. 모두가 1등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지만, 진실은 모두가 1등이 될 수는 없으며 하물며 2등이 되기도 힘들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2등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남극점을 향해 노르웨이의 아문센 탐험대와 영국의 스콧 탐험대가 출발했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볼 때 유리한 쪽은 스콧 탐험대였습니다. 남극을 향한 두 번째 도전이었고 재정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나 1911년 12월 14일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쪽은 스콧이 아닌 아문센 탐험대였습니다. 스콧 탐험대가 남극점에 도달한 것은 35일 후인 1912년 1월 18일입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왔지만 노르웨이 국기가 이미 나부끼고 있었고, 그는 2등이 되고 말았습니다. 스콧은 그때의 절망감을 일기에 ‘오오…… 하나님……’이라고 적었습니다.
스콧은 패했습니다. 아문센보다 유리한 조건이었지만 준비가 부족했고 판단에도 착오가 있었습니다. 아문센은 물자 수송 수단으로 추위에 강한 개를 택했으나 스콧은 추위에 약한 말을 골랐습니다. 또 아문센은 방한과 보온 기능이 뛰어난 동물 가죽 털옷을 입은 데 반해 스콧은 습기에 금방 젖는 합성섬유를 착용했습니다. 이런 잘못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스콧은 역사 속에 위대한 영웅으로 기록됐습니다. 왜일까요?
추위와 굶주림 속에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잃지 않았던 강한 의지와 명예의식 때문입니다. 스콧 탐험대는 1등으로 남극점을 밟는 데 실패한 후에 빠르게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놔두고 일부러 길을 돌았습니다. 그 결과 16킬로그램에 해당하는 비어드모어 빙하의 지질 견본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스콧은 자신의 실패를 학문적으로 만회해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이라는 죽음의 여정에서도 그 무거운 지질 견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탐험대의 일원인 오오츠 대위는 동상 때문에 대열에서 처지자, 거대한 눈보라가 치던 날 “볼일 보러 나간다. 오래 걸릴 것 같다”면서 천막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또, 다섯 명의 탐험대원들은 안락사할 수 있는 모르핀을 “영국인답지 않다”고 거부하며 자연사를 택했습니다. 식량 보급대까지의 거리는 불과 20킬로미터, 그러나 눈보라에 갇힌 스콧 일행은 꼼짝할 수 없었고 그 9일 동안 스콧은 쓰고 또 썼습니다. 그중 이 글은 왜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이 거짓인지 알려주며 심금을 울립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이 탐험여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 여정은 영국인들이 역경을 견디며 서로를 돕고,
죽음을 강인하게 맞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썼고,
우리가 그럴 것이라는 것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환경은 우리 편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신의 섭리에 경의를 표하며 결연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1등이 되는 것에 실패했고 그래서 영원한 2등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스콧은 영국의 국민적인 영웅이며 역사는 그를 아문센과 동격으로, 아니 그 이상의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명의 위대한 2등이 있습니다.
올림픽에서 최고의 승자는 역시 금메달리스트입니다. 그러나 드물게 1위보다 더 진정한 승자로 평가받는 선수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1908년 런던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그랬습니다. 이 경기는 일명 ‘도란도의 비극’으로 불리는데, 도란도는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이탈리아의 도란도 피에트리 선수를 일컫습니다.
그는 마라톤 코스를 완주하고 가장 먼저 경기장에 들어섰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바퀴만 돌면 우승이었습니다. 관중들은 예비 우승자에게 일제히 환호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분 사이에 환호와 박수가 일제히 “No!”라는 탄식으로 바뀝니다. 그가 머리와 팔다리를 흔들거리면서 트랙 반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뉴욕 타임즈〉는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는 경주로를 따라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발을 놀렸다.
그의 발걸음은 걷는 것도 아니었고 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허우적댈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도란도 피에트리는 너무 지치고, 탈진한 상태였습니다. 관중석의 “No!”라는 외침에 놀라 방향을 바꾸었지만, 얼마 못 가 허물어지듯 그만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남은 힘을 쥐어짜듯 겨우 일어나 비틀거리며 몇 걸음을 걸었지만, 다시 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관중들은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게다가 이제 다음 선수가 달려오는 상황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경기 임원장 잭 앤드류가 피에트리 선수를 부축해서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경기 임원 둘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그는 마침내 부축을 받고 골인합니다. 피에트리 선수를 부축했던 경기 임원은 훗날,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도란도를 돕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를 일으켜 세워야 했다.”
모두가 피에트리 선수의 분투에 감동했지만 2위로 들어온 선수의 입장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겠지요. 미국 선수단은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했고, 피에트리 선수는 ‘외부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실격 처리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1위는 존 하예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날의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의 가슴에 진정한 1위는 도란도 피에트리였고, 영국 왕실은 금으로 만든 트로피를 따로 제작해 피에트리에게 전달했습니다.
하기는 피에트리가 탈진한 데는 영국왕실의 책임도 없지 않았습니다. 원래 마라톤 거리는 40킬로미터 안팎이었지만 이날 경기에서 처음으로 2.195킬로미터가 더 늘었습니다. 알렉산드라 왕비가 윈저궁에서 마라톤 출발장면을 보고 싶다고 해서 출발지점이 바뀌는 바람에 거리가 늘어 버렸습니다. 40킬로미터에 맞춰 연습했을 도란도 피에트리가 결승선을 앞두고 기진맥진했던 것도, 그러니까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후 마라톤은 16년 동안 논란을 거듭한 끝에 1924년 파리 올림픽 때부터 42.195킬로미터로 표준 경주 거리가 공식 확정됩니다. 그리고 도란도 피에트리와 존 하예스는 1908년 올림픽 후에 두 차례 더 대결을 펼쳤는데, 모두 피에트리가 승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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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한 인물들과 매일 우리가 무심코 보고 생각하고 자고 행동하는 일상에 대해 문득 궁금해진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덕분에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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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1등보다 유명한 2등은 누구일까 – 문득, 묻다 : 두 번째 이야기, 유선경, 지식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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