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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은 파리 살롱전의 심사위원이나 그림을 구입하는 주요 고객층인 귀족들이 보기에 품위 없고 가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신도, 영웅도, 왕도 아닌 무명씨들이 주인공이었고 신화와 역사 등의 과거에서 벗어나 지금 이 시대의 풍경과 인물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훗날 인상파가 서양회화사에 기여한 가장 큰 성과로 인정받게 될 소재와 주제지만, 인상파 화가들이 살롱전에서 줄줄이 낙선하고 또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1840년에 태어나 1926년, 여든여섯까지 장수한 덕분에 말년에 부와 명예를 누린 모네를 제외하고 말이지요.

당시 인상파 화가들을 대거 탈락시키고 그랑프리를 거머쥔 그림들은 20세기에 곧 잊혔습니다. 반면 우리가 아는 것은 조롱과 비난을 받으며 탈락했던 모네의 〈해돋이〉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입니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벨 에포크가 찾아왔고,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는 파리와 파리 근교에서 벨 에포크를 향유하는 파리시민들의 모습이 담깁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1877)〉와 〈유럽의 다리(1876)〉,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선상파티의 점심(1881)〉과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 조르주 피에르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4~1886)〉에서 그 시절의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1877)>

ⓒ Gustave Caillebotte/위키피디아 | Public Domain

벨 에포크를 담은 많은 인상파 그림 중에서 특별히 위의 그림들을 꼽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림 속 여성의 옷차림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자세히 보고 싶다면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주점〉이나 〈미셸 레비 부인의 초상〉, 조르주 쇠라의 〈양산을 쓴 여인〉을 참고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슴과 허리를 타이트하게 조여서 가슴은 풍성하게, 허리는 가늘게 강조했습니다. 치마는 앞에서 보면 종처럼 생겼고 옆에서 보면 앞보다 뒤, 특히 엉덩이를 풍성하게 부풀린 모양입니다. 이처럼 여성의 몸매를 더할 곳도 뺄 곳도 없이 강조한 드레스를 유럽에서는 ‘아르누보 실루엣’이라 불렀습니다. 아르누보는 당시에 전 유럽을 휩쓴 문화양식입니다. 그리고 같은 드레스를 미국에서는 ‘깁슨 스타일’이라고 불렀습니다.

미국의 화가 찰스 다너 깁슨이 그린 일러스트를 보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속 여성들보다 몸매가 훨씬 더 과감하게 강조된 ‘S 커브’ 스타일입니다. 사람들은 깁슨의 모델이 되어준 여성들을 ‘깁슨 걸(Gibson girl)’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시대의 ‘잇 걸(It girl)’이었던 셈이지요. 미모도 몸매도 빼어난 깁슨 걸 대부분 백만장자와 결혼했는데 그중 최고의 스타가 이블린 네스빗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또 다른 별칭이 있는데 바로 ‘아메리칸 이브(American Eve)’입니다. 미국 최초의 여성, 즉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뜻인가 싶지만, 이브가 아담을 유혹해 타락시킨 것처럼 ‘죄를 짓게 만드는 여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서늘한 별명이 붙은 데는 세기의 살인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188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태어난 네스빗은 열다섯 살 때부터 생계를 위해 모델일을 시작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인 깁슨의 모델이 되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녀의 사진이 많이 남은 것으로 보아 화보모델로 더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1905년 스물한 살 때, 철도 재벌 2세인 해리 켄델 소우와 결혼합니다. 1년 후, 소우가 스탠퍼드 화이트에게 총격을 가해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살해 동기는 질투였습니다. 네스빗이 결혼 전에 화이트와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우가 질투에 휩싸여 화이트를 살해하고 만 것입니다.

스탠퍼드 화이트는 유명 건축가였습니다. 뉴욕에는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그리니치빌리지에 있는 워싱턴스퀘어 공원의 워싱턴 스퀘어 아치, 맨해튼에 있는 저드슨 메모리얼 교회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주고객은 J. P. 모건과 같은 거부들로 호화로운 최고급 저택을 많이 설계했지요. 잇 걸과 재벌 2세, 당대 최고의 건축가가 상열지사로 얽혀 살인이라는 비극으로 치달은 이 사건은 연일 신문 1면에 보도되면서 네스빗에게 아메리칸 이브라는 야릇한 수식어가 붙여졌습니다. 세월이 좀 더 흘러서는 더 야릇한 수식어가 더해졌는데, ‘빨간 벨벳 그네를 탄 여자(The Girl in the Red Velvet Swing)’입니다. 화이트의 저택에서 누드로 빨간 벨벳 그네를 타고 놀았다는 그녀의 회고에 따른 것입니다.

세기의 살인사건이 일어난 1905년, 캐나다의 에드워드 프린스에 사는 한 작가가 우연히 잡지에서 이블린 네스빗의 사진을 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작가는 이 사진을 오려내어 벽에 붙이고선 매일 바라보며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탄생한 소설이 《빨간 머리 앤》, 작가 이름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입니다. 그런데 영 믿기지 않습니다. 명랑하고 순수하며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앤의 모델이 아메리칸 이브였다는 사실이 생뚱맞기만 합니다. 앤과 네스빗은 빨간 머리라는 점 말고 외모는 물론 성격과 취향, 삶, 어느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으니까요.

이블린 네스빗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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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몽고메리는 사진 속 소녀가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아메리칸 이브인 줄 몰랐다고 합니다. 하기는 1905년에, 그것도 캐나다의 시골에 사는 사람이 그 사실을 안다면 그게 더 신기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몽고메리가 본 사진은 네스빗의 열여섯 살 적 모습으로 님프처럼 꾸미고 촬영한 것이었습니다. 백 년도 훨씬 전의 프로필이지만 요즘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미모에 전혀 뒤지지 않습니다. 요즘 잇 걸들에게서 느끼기 힘든 묘한 매력에 더해, 세상의 때라고는 손톱만큼도 묻어 있을 것 같지 않고, 위로 살짝 치켜 뜬 눈빛에서는 당돌함도 느껴집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달리 이때 네스빗은 두 살 위인 존 베리모어와 사귀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드류 베리모어의 할아버지로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집안의 아들이자 나중에 미남 배우로, 그리고 바람둥이로 이름을 날리는데요. 둘 다 성적으로 무척 조숙했던 모양입니다.

결론적으로, 몽고메리가 네스빗의 사진에서 받은 영감이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서 풍기는 순수한 이미지, 정확히는 사진이 연출한 이미지였습니다. 정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도 찾기 힘든 시대였기 때문에 편견 없이 볼 수 있던 덕이기도 하지만 앤에 대한 기본적인 구상이 없었다면 과연 네스빗의 사진이 그처럼 큰 영감을 주었을까요. 몽고메리가 사진에서 본 것은 네스빗이 아니라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던 빨간 머리 앤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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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 Marilyn Monr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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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경 집필자 소개

1970년 전북 부안 출생, 1993년부터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글을 쓰고 있으며, 2011년부터 매일 아침 KBS 클래식 FM [출발 FM과 함께]에서 [문득 묻다], [그가 말했다] 등의 글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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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묻다 : 두 번째 이야기
문득, 묻다 : 두 번째 이야기 | 저자유선경 | cp명지식너머 도서 소개

미스터리한 인물들과 매일 우리가 무심코 보고 생각하고 자고 행동하는 일상에 대해 문득 궁금해진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덕분에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져..펼쳐보기

전체목차
Chapter 01. 그 사람은 누구일까 누가 생텍쥐페리를 격추시켰을까? 윤동주와 백석이 동시에 사랑한 시인은 누구일까? 스탕달 신드롬을 일으킨 미인은 누구일까? 아메리칸 이브는 누구일까? 댄디즘의 시조는 누구일까? 뱀파이어는 누구일까? 프랑켄슈타인은 누구일까? 〈미녀와 야수〉의 야수는 누구일까? 누가 디즈니 성을 지었을까? 혼자서 궁전을 지은 사람이 있을까? 세계 최초의 건축가는 누구일까? 우리나라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는 누구일까? 멘토는 누구일까? 〈아테네 학당〉에 여성이 있을까, 없을까? 고대에 광선총을 발명한 사람은 누구일까? 가발을 유행시킨 사람은 누구일까? 〈옴브라 마이 푸〉를 부른 세르세는 누구일까? 우산을 발명한 사람은 누구일까? 화투의 ‘비광’ 속 우산 쓴 사람은 누구일까? 바다의 무법자, 해적왕은 누구일까? 보물선을 발견하면 주인은 누구일까? 클레멘타인의 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이었을까?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누구를 위한 노래일까? 백만 송이 장미를 받은 여인은 누구일까? 누가 살리에리를 모차르트를 시기한 자로 만들었을까? 신사의 결투로 죽음을 맞이한 시인은 누구일까? 세계 3대 악처는 누구일까? 누가 온달을 바보로 만들었을까? 지리산의 산신은 누구일까? 고수레는 누구를 위한 말일까? 돌하르방은 누구일까? 도깨비는 누구일까? 갑은 누구일까? 교활, 낭패, 유예는 누구일까? 최초의 실루엣 그림 속 인물은 누구일까? 산타클로스와 루돌프는 누구일까? 누가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켰을까? 1등보다 유명한 2등은 누구일까?
Chapter 02. 매일 하다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질까? 새벽은 어떻게 올까? 아침 일찍 일어나면 성공할 수 있을까? 개미와 꿀벌은 정말 부지런할까? 사람의 눈은 왜 두 개일까? 곤충과 동물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세대차이는 인류의 난제일까? 표정은 감정과 일치할까? 행복할 때 짓는 미소는 어떤 미소일까? 화장은 왜 하기 시작했을까? 인간에게 털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키스하다가 죽을 수도 있을까? 독사가 자기 혀를 깨물면 죽게 될까?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문자가 없는 사회는 미개할까? 손짓은 무엇을 의미할까? 옛날에는 시간약속을 어떻게 했을까? 18세기 유럽에서는 연주회의 시작시간을 어떻게 정했을까? 하루는 왜 24시간일까? 잠을 자는 동안 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스스로 원하는 꿈을 꿀 수 있을까? 꿈을 사면 효과가 있을까? 나이가 들면 왜 잠이 없어질까? 곰은 왜 겨울잠을 잘까, 물고기도 겨울잠을 잘까? 인간은 언제부터 옷을 입기 시작했을까? 여자는 분홍, 남자는 파랑이라는 구분은 어떻게 생겼을까? 호주머니와 핸드백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남자들도 하이힐을 신었을까? 왜 8등신일까? 만 원권 지폐에는 몇 개의 문화재가 들어 있을까? 냄새를 맡을 수 없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언제부터 쌀을 먹었을까? 트림과 방귀가 환경을 오염시킬 수 있을까? 왜 정신이 없을까? 책상을 청소하면 공부를 잘하게 될까? 디지털 치매, 진짜 해로울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중독일까? 영혼의 무게를 측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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