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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
째 이야기
갑은 누구일까
최근 매스컴에 많이 오르내리는 말 중에 하나가 ‘갑질’입니다. 갑질은 ‘갑’에 접미사 ‘질’을 붙인 말로, 권리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강자가 약자에게 저지르는 부당행위를 일컫는데요. 우리나라 직장인 80퍼센트가 스스로를 을로 여기고, 최악의 갑질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윽박지르기’라고 응답한 것이 눈길을 끕니다. 소수의 갑, 다수의 을, 갑은 군림하고 을은 비위를 맞춰야 하는 상황. 한국에서 상하관계나 주종관계를 상징하는 말이 된 ‘갑과 을’이라는 표현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중국 주자학에서 언급하는 육십갑자는 하늘의 기운을 나타내는 천간(天干) 10개와 땅의 기운을 나타내는 지지(地支) 12개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지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천간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입니다. 즉, 갑과 을은 육십갑자의 천간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순서로 오는 기호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 육십갑자는 순환하기 때문에 둘 중에 무엇이 더 우위라고 할 수 없지요. 한글로 치면 가와 나, 영어로 치면 A와 B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갑과 을 중에 누가 더 우위냐고 묻는 것은 가와 나, A와 B 중에 무엇이 더 우위냐고 묻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순서를 가리키는 기호에 불과한 것을 한국사회에서 우열과 상하를 통칭하는 대명사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계약서의 영향이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계약서에서 갑은 계약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쪽을, 을은 열위에 있는 쪽을 통칭합니다. 집주인이 갑이면 세입자가 을, 고용인이 갑이면 피고용인이 을, 대기업이 갑이면 중소기업이 을, 정부가 갑이면 기업이 을, 이런 식입니다. 계약서에서 그저 너와 나를 가리키는 대명사에 불과한 것이 사회적 강자와 사회적 약자, 즉 불법과 불공평, 불공정 관계를 의미하게 된 것은 ‘을에 불리한’ 계약서의 내용 때문이겠지요.
최근에는 갑과 을이라는 표현 자체를 삭제하는 계약서도 등장하고 있는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갑과 을이라는 언어표현이 문제가 아닙니다. 갑과 을뿐 아니라 을의 뒤로 병과 정이 줄지어 서 있고, 을이 병에게, 병이 정에게 부당하게 부리는 횡포도 만만찮습니다. 분배정의에 실패한 승자독식 문화에 투철한 계층의식, 여기에 무시당했다고 느끼면 쉽게 분노하는 자존감 약한 과도한 자기애까지. 갑을병정 관계 뒤에 드리운 우리 사회의 슬픈 그림자입니다.
• 아티스트 : AB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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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한 인물들과 매일 우리가 무심코 보고 생각하고 자고 행동하는 일상에 대해 문득 궁금해진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덕분에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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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갑은 누구일까 – 문득, 묻다 : 두 번째 이야기, 유선경, 지식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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