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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
째 이야기
뱀파이어는 누구일까
몇 년 전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뱀파이어 열풍은 이제 가히 장르를 이룬 것 같습니다. 커다란 모기처럼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점에서 괴기스럽지만 뱀파이어는 다른 공포물과 차별점이 있습니다. 외모가 매혹적이지요. 또 같은 흡혈귀라도 드라큘라 백작보다 덜 음험하고 훨씬 낭만적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뱀파이어의 모델이 귀족 신분에 뛰어난 미남이었고 낭만주의를 대표했던 영국의 천재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었으니까요.
바이런은 불같은 성미를 가진 아버지와 허영심이 강한 어머니 밑에서 불안정하지만 자유분방하게 자랐습니다. 스물네 살에 장편 시집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을 발표했는데 4주 만에 7쇄를 찍는 대성공을 거뒀지요. 이때 그가 한 말이 그 유명한 “하루아침에 깨어나자 유명해진 것을 알았다”입니다. 런던 사교계는 이 천재 시인에 열광했습니다. 바이런은 잘생긴 얼굴에 세련된 패션감각을 가진 젊은 귀족이었습니다. 비록 한쪽 다리가 불편했지만 2년여에 걸쳐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스를 여행했고 당시 산업혁명의 폐해로 몸살을 앓던 영국의 현실을 상원에서 고발할 만큼 강인하고 열정적인 남자였습니다. 나중에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했다가 말라리아로 세상을 떠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시를 쓸 줄 알았던 낭만주의자였습니다.
단 한 번만 용기를 내서- 〈어떤 사람에게〉 중에서
당신을 보기 위해 눈을 들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하늘 아래
내 눈은 다른 어떤 것도 볼 수 없었다
그것을 내게 묻다니 가혹하군요. 수많은 눈길을 읽으시고도-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냐고 묻기에〉 중에서
그대를 보는 순간 비로소 인생이 시작된 것을
런던 사교계가 바이런에게 열광하고 남을만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나 멋진 그가 어쩌다 음산하기 짝이 없는 뱀파이어의 모델이 됐을까요.
어느 해 여름, 바이런은 지인들과 함께 무서운 이야기를 돌아가며 하다 내기를 걸었습니다. “우리 중 누가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그 결과로 세상에 나온 무서운 이야기가 1818년에 메리 셸리가 발표한 《프랑켄슈타인》과 이듬해 존 폴리도리가 발표한 《뱀파이어》입니다. 서양의 대표적인 고딕소설 두 작품이 한 자리에서 잉태됐다는 점이 흥미롭지요.
《뱀파이어》가 출판됐을 때 독자들은 주인공 뱀파이어 클래런스의 창백하지만 우아한 모습에서 바이런을 쉽게 떠올렸습니다. 소설을 쓴 존 폴리도리가 바이런의 주치의이기도 했지만 바이런을 둘러싸고 떠도는 갖가지 소문의 영향이 더 컸습니다. 《뱀파이어》가 출판되기 2년 전, 캐롤라인 램이라는 여성이 바이런에게 버림받고 그 앙갚음으로 《글래나본》이라는 책을 써서 출간했습니다. 책에 나오는 뱀파이어의 외모와 성격은 누가 읽어도 바이런이었습니다.
그런데 연이어 바이런의 주치의가 본격적으로 《뱀파이어》를 발표하니 대중은 바이런이 수상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곧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이런이 애인을 살해하고 피를 마신다!” 지금으로 말하면 톱스타를 괴롭히는 악성루머였습니다. 당시에도 노이즈 마케팅이 통했는지 무섭고 흉흉한 소문은 호기심을 더욱 증폭시켰고, 독자들은 클래런스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유혹해서 피를 빠는 장면에 열광했습니다. 또, 소설에 나오는 치명적인 유혹과 잔인한 배신, 불멸 같은 장면이 소문난 바람둥이이자 천재적인 시인 바이런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되면서 《뱀파이어》는 흥행에 성공을 거뒀습니다.
원래 서구민담에서 난폭한 털복숭이 사내였던 뱀파이어가 에로티시즘과 공포가 기묘하게 뒤섞인 모습으로 변모하는 데 본의 아니게 바이런이 기여했고,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 심지어 21세기까지도 영화와 소설의 히트 상품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인데요. 정작 바이런 자신은 뱀파이어라는 악성 루머 때문에 꽤나 괴롭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바이런처럼 평생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악성 루머에 시달렸으며 심지어 그 때문에 죽어서도 교회의 반대로 36년 동안이나 묘지에 묻히지 못한 음악가가 있습니다.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히는 니콜로 파가니니입니다.
파가니니는 열여덟 살 때부터 유럽 전역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다른 연주자들에게선 볼 수 없는 기이한 공연을 보여줬습니다. 바이올린 한 대로 플루트와 트럼펫, 호른의 소리를 흉내 내는가 하면, 갖가지 동물 소리를 내고, 활이 아니라 나뭇가지로 연주하고, 악보를 거꾸로 올려놓고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보수적인 평론가들이나 관객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지만, 그보다 많은 관객들이 그의 공연에 열광했는데 그중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의 여동생 엘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루카라는 지역을 다스릴 때의 일입니다. 파가니니를 불러 궁정음악가에 임명했는데 어느 날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의 현을 두 개만 사용해서 연주하자, 엘리자가 하나로만 연주할 수도 있냐고 물었습니다. 파가니니는 이 말에 영감을 얻어 정말로 G현 하나로만 연주하는 곡을 만들었는데 이 곡이 바로 로시니의 오페라 〈이집트의 모세〉에서 주제를 빌려온 〈모세 주제에 의한 변주곡〉입니다. 그리고 이 곡이 나오면서 문제의 악성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파가니니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G현이 그가 목 졸라 살해한 애인의 창자를 꼬아 만든 줄이라는 둥, 파가니니가 연주할 때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것이 사실은 악마라는 둥,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소문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사람들은 파가니니가 나타날 때마다 정말로 악마인지, 아니면 악마가 옆에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고 하는데요. 이런 소문이 퍼진 데는 상식을 깰 만큼 파격적으로 빼어났던 실력이 결정적이었겠지요. 파가니니의 괴팍한 성격과 행동, 깡마른 체격에 매부리코를 가진 외모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기 힘들면,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근거를 만들어 갖다 붙이기 마련인데요. 바이런에게는 ‘뱀파이어’, 파가니니에겐 ‘악마’가 그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 아티스트 : Franz Lisz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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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한 인물들과 매일 우리가 무심코 보고 생각하고 자고 행동하는 일상에 대해 문득 궁금해진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덕분에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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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뱀파이어는 누구일까 – 문득, 묻다 : 두 번째 이야기, 유선경, 지식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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