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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
째 이야기
바다의 무법자인 해적왕은 누구일까
9년 전쯤, 소말리아 해적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요즘 세상에도 해적이 있단 말이야?” 마침 조니 뎁 주연의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이 인기를 끌 무렵이라 현실에서 들리는 해적 소식이 더욱 현실감 없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소말리아뿐 아니라 서아프리카 기니만 해역과 인도네시아 나투만 해역 등 21세기에도 해적행위가 버젓이 저질러지고 있고, 그들은 해적 영화 속 해적처럼 자유로운 바다 사나이가 아닙니다. 해적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먼저 상징적으로 떠오르는 해적이 바이킹(Viking)입니다. 8세기 말,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따뜻하고 풍요로운 땅을 찾아 대이동을 시작했는데 이들을 바이킹이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협강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들의 고향인 스칸디나비아에서부터 덴마크에 걸쳐 협강(vik), 즉 피오르드가 많았기 때문이지요. 이들의 후예가 오늘날 아이슬란드인, 노르웨이인, 덴마크인, 스웨덴인 등인데 학술적으로 정확한 용어는 노르드인(Norsemen)입니다.
바이킹은 이누이트가 사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해안, 잉글랜드의 절반 이상을 점령했으며 먼 남쪽 지중해까지 내려와서 시칠리아를 점령했고, 내륙지방은 물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까지 침략하는 등 2백여 년간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 넣었는데요. 그 공포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유럽에서는 꽤 오랫동안 파란색을 야만인의 색이라고, 파란 눈의 남자를 거칠고 어리석다고 여겼습니다. 바이킹이 얼굴에 청회색을 칠했고 그들 대부분이 파란 눈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전해집니다.
유럽뿐만이 아닙니다. 북아메리카 대륙을 가장 먼저 발견한 외국인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니라 비아르니 헤리울프손이라는 설이 이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는 바이킹이었으며 그 때가 1000년경이었습니다. 헤리울프손은 그린란드에서 북아메리카로 이주해 정착을 시도했지만 원주민과 충돌 끝에 돌아갔는데요. 이 말을 들으니 바이킹이 아무리 무시무시한 해적이라고 해도 콜럼버스를 필두로 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강도들보다 온건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백 년 동안 유럽대륙을 벌벌 떨게 만든 해적 바이킹은 12세기 말부터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바이킹에 대적할만한 라이벌의 침략을 받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소빙기라는 자연재해를 맞아 항해가 힘들어지자 더 이상의 진출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4백여 년 후 ‘해적의 황금시대’가 도래합니다. 구체적으로는 1690년에서 1730년 사이, 이 시기에 가장 많은 해적들을 배출했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해적왕’을 탄생시킨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바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입니다. 그녀는 해적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자국의 물자를 확보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이 시기에 영국 출신 해적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캐리비안 해적 중에서도 영국인이 35퍼센트나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적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해적일 뿐, 자국에서는 영웅인 경우가 적지 않지요. 더구나 엘리자베스 1세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해적을 적극적으로 양성했는데,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정면대결로는 이기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16세기 유럽의 강자는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가 통치하고 있던 스페인이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한때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했다가 “이교도와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로 거절당한 바 있지요. 스페인이 아르마다라는 무적함대를 이끌고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영국은 변방의 작은 섬나라에 불과했고 판세가 뒤집힌 것은 1588년 영국함대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하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믿을 수 없는 승리의 중심에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있었습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인명사전에서 찾으면,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국의 항해가이자 제독’이라고 멋지게 소개돼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개는 순전히 영국의 입장에서일 뿐 피해국가로서는 악명 높은 해적 두목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를 항해가이자 제독으로 만든 이도, 해적두목으로 만든 이도 엘리자베스 1세였습니다. 왜였을까요?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영국은 헨리 8세 이후에 줄줄이 겪은 정치적, 종교적 혼란으로 만신창이였습니다. 국력과 국고 모두 바닥이 난 상태였지요. 이런 상황에서 여왕은 과감한 조세정책을 내놓습니다. 세금을 국가가 정하지 않고 국민이 주는 대로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민의 평안을 만사 제치고 최우선으로 여긴 여왕의 과감한 정책은 위기의 순간에 큰힘을 발휘합니다. 1588년, 스페인과의 일전을 앞두고 여왕이 국민을 향해 전비 모금을 호소했을 때 여왕이 제시한 금액보다 훨씬 많은 34만 파운드를 모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점이 생깁니다. 국민이 주고싶은 대로 받은 세금으로 나라살림을 꾸리는 것이 과연 가능했겠냐는 것이지요. 이 지점에서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등장합니다.
1572년, 여왕이 드레이크를 궁으로 불렀습니다. 당시에 그는 이미 악명 높은 해적 두목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노예무역이지 인신매매로 해적질을 시작했고 자신의 배를 소유한 후에는 캐리비안 일대를 돌면서 마을을 습격해 노략질했습니다. 여왕은 그에게 함선을 내주고 사략선장에 임명합니다. 민간인 신분으로 적국의 선박을 공격해도 좋다는 일종의 면허였지요. 스페인의 선박을 공격하고 영토를 약탈하라는 왕명이었습니다.
드레이크의 해적질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스페인의 식민지인 산티아고, 콜롬비아, 플로리다 등지를 돌며 갖가지 보물을 챙겨 본국으로 향하는 스페인 선박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는데, 그런 식으로 여왕에게 바쳐진 금은보화는 영국의 국고세입을 넘어설 정도였다고 합니다.
급기야 스페인에서 해적 드레이크를 처단할 것을 정식으로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여왕은 보란 듯이 드레이크를 해군 중장에 임명하고 해군 병력을 내주지요. 1588년, 스페인이 보복을 결정하고 세계 최강의 무적함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향합니다. 이때 여왕은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드레이크를 해군 부제독에 임명했고, 드레이크는 이에 부응하듯 작고 빠른 배로 기습작전을 펼쳐 스페인의 무적함대 3분의 2를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둡니다. 하지만 여왕이 허락한 합법적인 약탈행위는 영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해적행위를 조장하는 부작용을 낳아 해적의 황금시대를 열게 됩니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범선이 징더전에서 20여만 점의 중국 도자기를 싣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포르투갈 상선을 공격한 것도 사실상 해적행위였지요. 드레이크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상대로 거둔 아르메다 해전의 승리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등장은 세계 해상권뿐 아니라 역사와 종교의 판도까지 바꿔놓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가톨릭, 영국은 성공회, 네덜란드는 개신교 국가였으니 말입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영국과 네덜란드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 했고 두 번 다시 예전과 같은 영광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해적을 이용해서라도, 해적질을 해서라도 자국을 부강하게 만들고자 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정치적인 선택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숙제를 던져주는 역사의 뒷이야기입니다.
• 아티스트 : Karl Jenk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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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한 인물들과 매일 우리가 무심코 보고 생각하고 자고 행동하는 일상에 대해 문득 궁금해진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덕분에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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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바다의 무법자인 해적왕은 누구일까 – 문득, 묻다 : 두 번째 이야기, 유선경, 지식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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