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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安昌浩출생 | 18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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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8년 |
1907년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기관지로 항일운동을 했다.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와 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고,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안창호는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고 정치운동과 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선각자이다. 그는 정보와 실력 부족으로 대일 항쟁도 하지 못하면서 권력싸움에만 몰두하던 독립운동계에 민족 통일과 애국 정신을 확산시키며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제공했다.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농민 안흥국(安興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읜 후로는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서울로 와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우면서 서구 문물을 접했다.
그는 1898년 독립협회 관서 지부에서 일하면서, 만민공동회 연설을 통해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고 해체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점진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점진학교는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최초의 학교이다. 그러나 부족함을 느낀 그는 형 치호(致浩)와 친지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고 1902년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이곳에서 한인 노동자들의 어려운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최초의 한인 친목회를 조직해 한인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주선하는 등의 일을 시작했다.
1904년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뒤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에게 ‘오렌지 하나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임을 강조하고 언제나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일함으로써 한인들의 신용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그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교포 사회의 영사관 구실을 했다. 1905년 4월 5일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야학을 개설해 교포들의 교육에 힘쓰는 한편, 순 한글신문인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이 공립협회는 1909년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
을사조약 체결 후 국내로 들어온 안창호는 계속 교육 활동을 하면서 각계의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했다. 그는 특히 민중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실업 사상을 기르며 산업을 경영할 신민(新民)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창호는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해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해 독립애국청년을 양성하고, 대구에 태극서관을, 평양에는 자기 회사를 세워 독립운동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다.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이와 관련된 혐의를 받고 3개월간 개성 헌병대에 갇혔다가 1910년 봄 망명길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를 거쳐 미국으로 간 그는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와 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샌프란시스코에서 후신인 흥사단(興士團)을 결성했다. 무실역행(務實力行)과 민족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흥사단은 지역 차별을 없애기 위해 8도를 대표하는 청년들로 창립 위원을 구성하고 25인을 발기인으로 하여 발족되었다.
미국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한 그는 1919년 4월 정인과(鄭仁果), 황진남(黃鎭南)과 함께 상하이에 도착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취임해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각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소집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안창호의 준비론,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이동휘의 무장독립론으로 나뉘어 있던 임시정부는 결국 1921년 1월 이동휘가 노령으로 임시정부를 떠나자 분열되었다. 그 후 이 상황을 극복하고 통일된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해야 한다는 요구가 곳곳에서 제기되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대회가 개최되자 그는 윤해(尹海)와 함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회의가 시작되면서부터 안창호의 소속 단체인 북미국민회가 미국에 대해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문제로 안창호의 대표권 불신임이 제기되었으며,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유지하면서 개조시키자는 개조파가 대립했다. 결국 안창호가 부의장직을 사임하고 개조파가 대회 불참을 선언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에 실망하고 상하이를 떠났다. 그는 미국을 방문해 재미교포들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대통령 중심제로는 이념과 노선이 다양한 독립운동계를 통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미국, 만주, 러시아 동포 사회를 지도할 수 있는 삼두정치론(三頭政治論)을 주장했다. 그러나 국무총리 이동휘가 임시정부를 탈퇴한 후에는 대독립당 결성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국내외 한인들을 국민으로 하는 민적(民籍)을 작성해 국민의 정부인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실제 독립운동은 대독립당이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특수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당이 아니라 민중적 기반 위에 결성되는 각 독립운동 세력의 수평적인 의결 체제를 의미했다. 안창호는 독립운동에 있어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와의 사상과 노선 갈등을 유화시켜 제3의 새로운 노선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생산성과 실용성을 중시하여 허위의식을 배척하고 철저한 자기비판의 기반 위에서 인력과 자금, 조직을 갖추기 위한 현실적 여건을 조성해 나가는 데 힘썼다.
1932년 4월 안창호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 투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구실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1935년 2월 가출옥한 뒤에는 일제의 철저한 감시로 인해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37년 6월, 일명 동우회 사건으로 이광수 등 관련자 181명과 함께 또다시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경성대학 병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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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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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안창호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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