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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柳成龍출생 | 154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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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07년 |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고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하여 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했으며 군대 양성을 역설했다.
저서로는 《서애집》, 《징비록(懲毖錄)》 등이 있다.
전란 속에서 나라를 구한 재상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에 난리가 나면 훌륭한 재상이 생각난다.”라는 말처럼 유성룡은 나라가 어지럽고 난리가 날 때 생각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유성룡은 뛰어난 학식과 지혜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혼란의 시대에 병조 판서, 영의정을 두루 거치고 도체찰사로 전쟁의 최전면에 나서 위기의 조선을 지켜 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지닌 이들에게도 너그럽고 온화한 성격, 인재를 발탁하는 눈 그리고 치열한 논쟁 속에서도 화합과 조정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리더십 등으로 당시 많은 백성들의 우러름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노년에 자신이 가진 세 가지 한(恨)을 기록했는데, 첫째는 임금과 어버이의 은혜를 보답하지 못한 것, 둘째는 벼슬 자리에서 일찍 물러나지 못한 것, 셋째 도(道)를 배우겠다는 뜻을 두었으나 이룩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고 하니 겸허하고 공손한 삶의 자세를 짐작할 수 있다.
유성룡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유중영(柳仲郢)과 김광수(金光粹)의 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부터 《대학》을 읽을 정도로 영특했고, 스물한 살부터는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이황에게서 수학했다. 책을 들고 뒤따라 다니며 궁금한 것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유성룡을 보며 이황은 그가 장차 나라를 위해 크게 쓰일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는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에 올랐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출사했다. 문서를 맡아 보는 권지부정자 등을 거쳐 1569년(선조 2) 공조 좌랑을 지내면서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명나라에서 그는 태학(太學) 유생들의 학문적 오류를 바로잡아 주어 유생들의 우러름을 받을 만큼 학식이 깊었다.
부제학을 지내던 1581년, 그는 〈변방방위책 5개조〉를 올렸다. 첫째 화(禍)의 근원을 막을 것, 둘째 싸우고 지키는 규정을 정할 것, 셋째 오랑캐의 정세를 살필 것, 넷째 군량을 충분히 보급할 것, 다섯째 황정(荒政)을 닦을 것 등이었다. 유성룡이 이 방위책을 만든 것은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는 의견도 있지만, 최근에 와서는 과연 이이가 실제로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율곡의 《율곡전서》에도, 반대했다는 유성룡의 《서애집》에도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유성룡의 이런 의견은 반대파의 거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나라의 앞일보다 당파싸움에 열을 올리는 당쟁을 피해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조는 대사성, 경상도 관찰사, 예조 판서 등을 거듭 제수하며 그를 조정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했다. 그러나 선조의 강력한 권유에 못 이겨 결국 조정으로 돌아와 1584년에 예조 판서, 1590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이 무렵 일본은 전쟁 준비가 한창이었다. 일본은 조선에 사신을 보내 은근히 조선을 압박해 왔으나 조정은 계속되는 당파싸움으로 이런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는 동인에 속해 있었지만 상대 당파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동인이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나뉠 때도 그는 온건파인 남인에 속했다.
위기감을 느낀 유성룡은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 일본의 상황을 확인해 볼 것을 청했다.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첨지 황윤길(黃允吉)과 사성 김성일(金誠一)을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로 선발하고 전적 허성(許筬)을 서장관으로 삼아 사절단을 구성했다. 이들은 1590년 쓰시마 섬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안내를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절단을 만나 주지 않아 몇 달을 기다린 끝에야 간신히 만날 수 있었고, 매우 불손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부사 김성일은 동인이었는데, 당파가 다른 만큼 조선으로 돌아와 보고한 내용도 정반대였다.
동인은 공연히 민심만 소란해질 수 있다며 전쟁 준비를 반대했고 서인은 하루라도 빨리 전란에 대비할 것을 주장했다. 신료들은 팽팽히 갈라져 연일 치열하게 서로의 입장만을 주장했다. 유성룡은 비록 동인이기는 했으나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통신사가 가져온 일본의 국서에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로 쳐들어가겠다.”, “명나라를 정벌할 터이니 길을 빌려 달라.” 등의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선 조정은 일본의 침략 의도를 반신반의했다. 유성룡은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 덕분에 조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군대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성룡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권율을 의주 목사에,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추천했다. 특히 정읍 현감이라는 낮은 자리에 있던 이순신을 무려 7품계나 올려 기용하자 조정의 반대가 엄청났다. 벼슬을 물리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그러나 유성룡을 믿었던 선조의 결단에 대신들은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또한 당시 방위 체제인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를 진관(鎭管) 제도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진관 제도는 전국 요지에 주진(主鎭)을 설치하고 아래에는 거진(巨鎭)을 두며 그 아래 다시 여러 진을 소속시키는 형태의 방위 체제였다. 이것은 전쟁 같은 비상시국에 큰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삼남 각 도에 성을 수축하고 성벽을 견고히 할 것도 지시했으나 관료들이 간과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결국 유성룡은 혼자 동분서주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이 배 700척에 나누어 타고 부산포에 도착했다. 다음 날부터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은 부산진성으로 몰려들었다. 다급해진 선조는 유성룡에게 병조 판서와 군무를 총괄하는 도체찰사까지 맡겼다. 그러나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는 일본군의 기세를 막을 수 없어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피란을 떠났다. 유성룡은 영의정에 임명되어 왕의 피란길에 따라갔으나, 평양에 도착한 후 나랏일을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2년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일본의 주력 함대를 대파했고, 명나라가 4만 3,000여 명의 대군을 출병시켜 평양을 수복했다. 이 공로로 유성룡은 영의정으로 복귀해 다시 전란을 지휘했다. 그러나 일본의 술수로 이순신이 파직되면서 전세는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원균의 군대가 참패했고 일본군은 다시 공주와 진천까지 이르렀다. 유성룡의 간청으로 이순신이 복직되고 명량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은 남하하기 시작했다. 강화 협정이 전개되고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철병할 것을 유언하고 숨을 거두었다. 일본군은 후퇴를 결정했으나 퇴로를 찾지 못하던 중 이순신이 명나라의 진린(陳璘)과 연합해 이들을 궤멸시켰고 7년간의 전쟁도 막을 내렸다. 전란이 지나가자 조정에서는 책임 공방이 이어졌다. 유성룡은 일본과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관직을 삭탈당했다.
고향인 하회로 돌아온 그는 독서와 저술로 말년을 보냈다. 이때 쓴 책이 《징비록(懲毖錄)》이다. ‘징비’는 중국 고전인 《서경》의 ‘징전비후(懲前毖後)’에서 따온 말로 ‘미리 잘못을 뉘우치고 경계하여 훗날의 환란을 대비한다.’라는 뜻이다. 그는 여기에 임진왜란이 처음 일어났을 때부터 끝날 때까지 7년간의 사실을 기록했다. 더 이상 임진왜란과 같은 참담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가 《징비록》을 저술할 당시 조정에서 벼슬이 내려졌지만 거절했다.
그가 65세로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은 비어 있는 그의 서울 집으로 달려가 목 놓아 울었다. 또 가난한 그의 살림을 안타까워하는 백성들은 쌀이며 삼베를 모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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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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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유성룡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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