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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미상
사망 1562년

조선 중기 양주의 백정 출신 도둑으로 일명 임거정 혹은 임거질정이라고도 한다.
명종 대의 정치적 혼란과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 활동을 벌였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홍길동과 임꺽정 그리고 장길산을 조선의 3대 도둑으로 꼽았다.

중세의 봉건적 질서에 반기를 들다

임꺽정은 명종 시대 황해도 지방의 백정 출신 도적으로 임거정(林巨正), 임거질정(林居叱正)이라고도 한다.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불린다. 16세기 중반 몰락한 농민과 백정, 천인들을 모아 지배층의 수탈에 저항했다.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황해도에서 살던 그는 뜻을 같이하는 농민 수십 명을 모아 황해도의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도적 활동을 벌였다. 1559년경에는 황해도뿐만 아니라 경기도와 평안도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관청이나 양반, 토호의 집을 습격하여 이들이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인 재물을 빼앗았다. 또 서울과 평양 사이의 주요 도로를 장악해 공물과 진상물 등을 탈취하기도 했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자 조정에서는 황해도 일대의 관리를 대부분 무관으로 교체하는 등 수습책을 마련하고 선전관을 보냈다. 그러나 임꺽정 무리들이 대단한 지략으로 관군을 따돌리고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구월산에 소굴이 있다는 말을 들은 관군은 그곳에서 임꺽정군의 행방을 찾다가 오히려 그들에게 목숨을 잃기도 했다.

임꺽정은 빼앗은 재물을 그대로 착복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억울하게 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풀어 주어 의적(義賊)으로 이름을 높였다. 위기감을 느낀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관군을 동원해 진압하려 했으나, 그들에게 번번이 패했다. 임꺽정은 1559년에는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李億根)을 죽이기도 했다.

1560년 가을 임꺽정 무리는 봉산과 개성을 거점으로 한양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임꺽정의 아내가, 12월에는 참모인 서림(徐林)이 체포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조정은 임꺽정의 아내를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고, 서림에게서 임꺽정의 활동 계획과 비밀을 알아내어 선전관 정수익(鄭受益)과 봉산·평산의 관군으로 하여금 토벌하도록 했다. 이때 농민들과 이서(吏胥)의 도움, 그리고 뛰어난 전투력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5도의 군졸들이 임꺽정을 잡으려 눈에 불을 켜는 동안 민심은 점점 흉흉해졌다. 관군의 물자를 대느라 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아졌고,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가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 후 임꺽정은 황해도, 경기도 북부, 평안도,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했고,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황해도에 순경사로 파견된 이사증으로부터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잡힌 사람은 임꺽정의 형인 가도치(加都致)로 밝혀졌으나 이후 임꺽정의 세력은 점차 위축되었다. 임꺽정은 토포사 남치근(南致勤)이 이끄는 관군의 끈질긴 추격에서 도망하던 중 마침내 1562년 1월, 서흥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으며, 약 15일 후에 처형되었다.

고석정

임꺽정이 은거했다는 곳으로 훗날 임꺽정을 기리는 이들이 정자를 짓고 고석정이라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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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한 사관은 임꺽정의 반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敎化)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하며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 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이 절박해도 끼닛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임꺽정의 반란은 1559년에 시작되어 1562년 1월까지 무려 3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여타 민란에 비해 한 인물이 이끈 난이 이렇게 오래 지속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는 관군과 전면전을 벌이기보다는 무장 게릴라 활동을 통해 평소 농민들의 지탄의 대상이었던 권문세가나 관리들의 재산을 털어 양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의적 행위를 했는데 이것이 난을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요인일 수도 있다. 또 한 가지로는 그의 난에는 현실 변혁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의지가 반영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민중들이 임꺽정의 무장단에 대거 참여하였다는 것은 중세 봉건적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임꺽정의 반란은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외척 세력을 축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에서 큰 의미가 있다.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명종은 외척에게 넘어간 왕권을 회복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이유가 바로 외척들의 불법적인 횡행에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사림이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임꺽정의 반란이 일어난 배경을 살피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왜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빈농이나 빈민, 유랑민, 또는 도적으로 변해 갔는가 하는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당시 정치를 맡고 있던 관료와 외척 들에게 있다. 당시는 왕권이 약화되어 중앙의 정치가 구심점을 잃은 상태였다. 정계가 시국에 따라 흔들리고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자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가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지방 관리들이 부패를 일삼고 날뛰게 되는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조 대에 실시한 직전법이 명종 대에 폐지되면서 관리들은 녹봉에만 의지해 살아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관료들은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토지의 개간, 매입, 약탈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신들의 토지를 넓혀 나갔다.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심각한 경우에는 무전 농민이 되어 도적이 되거나 유랑민으로 떠돌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16세기 농민들을 괴롭힌 것은 공납이었다. 왕실과 관료들의 사치가 날로 더해가자 부과되는 공물의 양은 끝도 없이 늘어만 갔다. 그런데 수납 과정에서 폐단이 생겼다. 농민들에게 그 전에는 현물로 바치던 것을 상인들이나 지방 관리들을 통해 대납하게 하였는데, 그 대가로 착취를 일삼아 관리와 중간 상인들이 중간 이익을 챙기게 되었다. 게다가 농민들은 각종 부역에도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는 사족(士族)들의 개간에 강제 동원되어 노동력을 착취당하기 일쑤였고 군역에 시달리던 장정들이 고향을 버리고 도망치는 사례가 속출했다.

이렇게 16세기 중엽의 조선은 사회 전반에 걸쳐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제도의 부패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농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임꺽정의 반란이 있기 전부터 이미 도적떼들이 성행했는데, 이것은 위와 같은 사회적 모순이 낳은 결과였다. 임꺽정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16세기 중엽의 조선은 부패해 있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임꺽정 집단의 치열한 활동은 지배층에게는 불안과 위기 의식을 심어 주었으며 피지배층에게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이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상반된다. 지배층은 그를 흉악무도한 도적이라 일컫고 민중들은 의적으로 영웅시했다. 그 뒤 그에 관한 많은 설화가 민간에 유포되었고, 그의 행적이 소설로 쓰여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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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운 집필자 소개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펼쳐보기

장희흥 집필자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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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윤재운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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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 변방의 무장에서 새 왕조의 주인으로, 이성계 500년 조선왕조의 기반을 다지다, 정도전 태종의 치적 뒤에 자리한 장자방, 하륜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 청백리의 표상, 황희 신분의 굴레를 뛰어넘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왕위 찬탈자인가, 위대한 군주인가, 세조 모사가인가, 지략가인가, 한명회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 성삼문 국력을 신장시킨 외교와 국방의 달인, 신숙주 사림의 영수, 김종직 비운의 폐왕, 연산군 도학 정치를 꿈꾼 급진적 이상주의자, 조광조 조선 최초의 자연철학자, 서경덕 조선 주리철학의 선구자, 이언적 중세의 봉건적 질서에 반기를 들다, 임꺽정 동방의 주자, 이황 조선의 주자학을 일구다, 조식 동서 분당의 시대, 정인홍 어린 천재에서 희대의 정치가로, 이이 전란 속에서 나라를 구한 재상, 유성룡 한국 해전의 역사를 새로 쓰다, 이순신 조선 의학의 집대성 《동의보감》, 허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 정여립 홍길동의 아버지, 허균 대동법을 실시한 실리적 개혁가, 김육 명분인가 실리인가, 최명길 우리말의 가락을 살려 우리 글자로 쓰다, 윤선도 유림 위에 군림한 정치 사상계의 거장, 송시열 성리학계의 이단아, 윤휴 붓으로 살려낸 만물의 조화, 정선 경세치용의 학문을 열다, 이익 당쟁 속에서 탕평을 실천한 재상, 채제공 못다 한 개혁의 꿈, 정조 정조의 남자, 홍국영 실학의 아버지, 박지원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정약용 한국화의 전통미를 일구어 낸, 김홍도 조선을 뒤흔든 농민봉기의 지도자, 홍경래 한국적 서체를 완성하다, 김정희 자주적 근대화를 주장한 개화 사상가, 박규수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조선의 마지막 봉건주의자, 이하응 격동의 역사 속 비운의 황제, 고종 풍전등화의 조선에서 치열하게 살다 간 여걸, 명성황후 암살당한 개혁의 불꽃, 김옥균 한국 민중 저항사의 상징, 전봉준 민중 계몽으로 자주독립을 꾀하다, 서재필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안창호 총 한 자루로 제국주의를 처단하다, 안중근 〈님의 침묵〉, 한용운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신채호 항일 무장 투쟁의 영웅, 김좌진 삼천 만 동포에게 고함, 김구 좌익과 우익, 한국 현대사의 갈림길에서, 여운형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여인, 나혜석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는다, 박정희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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