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직인 100
인
성삼문
成三問출생 | 1418년 |
---|---|
사망 | 1456년 |
세종 때 《예기대문언두》를 편찬하고 음운 연구를 통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기여했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처형되었다.
1691년(숙종 18)에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었고, 신위는 노량진 민절(愍節)서원에 모셔졌다.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
성삼문은 세종 때의 촉망받는 관료이자 학자이다. 그는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잃었다. 이후 한 임금에 대한 충절은 충신의 표본으로 여겨졌고, 그는 스스로의 학문과 신념을 실천하고자 하는 참된 지식인의 표상이 되었다.
성삼문은 1418년 도총관인 성승(成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1435년 열여덟 살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응시하여 훗날 생사를 같이 한 하위지와 함께 급제했다. 이후 집현전 학사로 뽑힌 뒤 스물다섯 살에 신숙주, 박팽년,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삼각산 진관사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집현전은 고려 시대에 설치되어 조선 건국 초기까지만 해도 별다른 활동이 없었으나 세종이 즉위한 후부터 본격적인 학문 연구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집현전의 가장 중요한 일은 임금에게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강의하는 경연(經筵)과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書筵)이었다. 그 밖에 중요한 외교문서를 작성하거나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도 했다. 근무는 매우 엄격해서 다른 관청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으며 차례로 숙직을 했기 때문에 수시로 왕과 세자가 찾아와 자문을 구했다.
집현전의 가장 큰 업적은 훈민정음의 창제라 할 수 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성삼문과 정인지, 신숙주, 최항 등에게 우리글을 연구하도록 명했다. 성삼문은 신숙주와 함께 여러 번 랴오둥을 방문하여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정확한 음운(音韻)을 배워 오고,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 와서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음운과 교육 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음운에 관한 책인 《동국정운》을 편찬하는 데 동참하기도 했다.
2년 3개월의 짧은 치세 끝에 문종이 숨지자 열두 살의 어린 세자가 왕위에 올랐다. 왕실에는 수렴청정을 해 줄 직계 어른이 한 사람도 없었다. 문종은 세상을 떠나기 전 집현전 학자들과 황보인, 김종서 등을 불러 세자를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다 보니 권력은 황보인과 김종서에게 쏠리게 되었고 왕실 측근들은 이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단종의 즉위를 보고하러 가는 명나라의 사은사로 자신이 직접 가겠다고 나서면서 신숙주를 서장관으로 선발했고, 이때의 동행으로 신숙주와 집현전 학자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사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수양대군은 정권의 핵심인 김종서를 제거하고 왕명을 빙자해 대신들을 입궐하게 한 다음, 방해가 될 만한 인물을 모조리 죽였다. 대권의 경쟁자였던 안평대군을 강화로 유배시킨 다음 사사했고,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수양대군은 영의정 부사, 이조·형조 판서와 내외병마도통사를 겸직해 인사권과 병권 등 나라의 전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거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공을 찬양하는 글을 집현전에서 작성해 발표하고 정변에 참가한 이를 정난공신에 봉해 친위 세력으로 만들었다.
공신록에 오른 인물은 수양대군을 포함해 36명이었는데, 성삼문도 정변 당일 집현전에서 숙직하며 근무한 공이 있다 하여 3등공신에 올랐다. 성삼문은 자신의 이름을 공신록에서 삭제해 달라고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시방석 같은 보위에 앉아 있던 단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내놓고 말았다. 그때 예방승지였던 성삼문은 직무상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갖다 바쳐야 했다. 옥새를 품에 안고 옮기던 성삼문은 그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지 못하고 목 놓아 울고 말았다.
단종의 양위로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수양대군의 행동은 유교적 윤리관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문종의 유언을 기억하고 있던 집현전의 학자들은 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결국 학자들을 중심으로 단종의 복위가 시도되었다. 이들이 단종 복위에 나선 것은 단종에 대해 충절을 지킨다는 유교적 명분도 있었지만 관료 지배 체제의 구현을 이상으로 삼았기에 세조의 독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기도 했다.
드디어 1456년 새 왕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로부터 사절이 도착했다. 창덕궁에서 환송연이 열리게 되었고,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임금의 호위역인 별운검(別雲劍)으로 내정되었다. 이들은 환송연에서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거사 당일 한명회의 갑작스러운 제의로 별운검을 세우지 않게 되었다. 이에 거사가 탄로 날 것을 두려워한 김질이 세조에게 그 사실을 밀고하는 바람에 성삼문은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다음 날 국문에서 성삼문은 김질의 배신을 통렬하게 꾸짖은 뒤 태연히 역모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달군 쇠로 다리의 살이 뚫리고 팔이 잘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와 신숙주의 불충(不忠)을 꾸짖는 기개를 보였다. 세조는 더 이상 취조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며 모두 능지처참할 것을 명했다. 박팽년은 형장에 가기도 전에 감옥에서 죽었고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중림, 김문기, 박쟁(朴崝) 등은 능지처참되었다. 체포되기 전에 가족과 함께 자결한 유성원을 포함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이개를 사육신(死六臣)이라고 부른다(김문기를 포함하여 사칠신이라고도 한다).
이들 중 특히 성삼문은 아버지가 주모자 중 한 사람이었기에 삼족이 몰살되는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처형된 사람들의 시신은 사지가 절단되어 형장에 그대로 버려졌고 잘린 목은 효수되었다. 그나마 그들의 의리에 감복한 사람들에 의해 신체의 일부가 거두어져 노량진 변에 묻혔다.
이런 숙청 끝에 세조는 단종 역시 복위 사건에 책임이 있다고 하여 그를 노산군으로 낮춘 후 영월로 귀양을 보냈다. 어린 왕은 뒤이어 폐서인되었다가 열일곱 살의 나이에 결국 사사되었다.
이들 사육신에 대한 평가는 이후에도 논란이 거듭되다가 200년 후 숙종 대에 들어서 공식적으로 그 충절을 인정받았다. 성삼문은 1691년(숙종 18)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출처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전체목차
한국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성삼문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