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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형운, 正祖출생 | 175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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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00년 |
조선의 제22대 왕(재위 1776~1800년).
대과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는 등 과거 제도를 개선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다.
전제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큰 관심을 가졌고,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 기구로 삼았다.
못다 한 개혁의 꿈
조선 시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임금으로는 세종과 정조를 꼽는다. 특히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가 다진 정치적 안정을 발판으로 왕도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던 왕이다. 그러나 그 뜻을 완전히 펴지 못한 채 마흔아홉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고, 이후 조선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조는 그를 유난히 아꼈는데 이것은 아들인 사도세자의 행동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영조는 1762년 아들을 뒤주에 가두는 벌을 내렸고 사도세자는 한여름에 뒤주 속에서 굶어 죽고 말았다. 당시 정조는 열 살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자 세손이던 정조는 세상을 뜬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제왕 수업을 시작했다. 그와 함께 조정도 둘로 나뉘었다. 사도세자의 편은 시파였고, 반대편은 벽파였다. 조정의 권력을 쥐고 있던 벽파에게는 세손인 정조가 눈엣가시였고 이런 정치판 속에서 어린 세손은 숨을 죽인 채 계속되는 목숨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홍국영 등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보전했고, 철저히 내면을 숨기며 정치적 발언을 삼가한 채 살았다.
1776년 영조가 여든세 살에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즉위했다. 정조가 왕위에 올라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사주한 숙의 문씨의 작호를 삭탈하고, 화완옹주는 사가로 내보냈으며, 숙의 문씨의 동생 문성국은 노비로 만들고,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과 홍인한을 죽였다.
그는 문화 정치를 표방하며 규장각을 설치해 역대 왕들의 문적과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들을 보관하고, 재주 있는 젊은 학자들이 이곳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정조 자신도 종종 그곳에서 학자들과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며 학문을 논하곤 했다. 규장각에는 ‘초계문신(抄啓文臣)’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문신을 가려 뽑아 규장각에서 공부시킨 후 시험을 보고 성적이 좋으면 벼슬자리를 주는 것이었다. 초계문신은 신진 정치 엘리트로 당파에 휩쓸리지 않는 정조의 친위 세력이 되었다. 여기에서 배출된 이가 이가환과 정약용이다. 정조는 특히 정약용을 아껴 중국에서 들여온 책을 선물하기도 하고, 시골 수령으로 보내 지방 실정을 알아 오게도 했다. 또 서자 출신이라 해도 재능이 있다면 등용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이다.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했다. 그는 아버지 장헌세자가 당쟁으로 희생되고 자신도 당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기에 누구보다도 그 폐해를 절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관리를 선발하고자 노력했다.
1788년에는 남인인 채제공을 정승으로 등용해 노론과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했고, 정조를 측근에서 보호해 왔던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며 권력을 남용하자 가차 없이 그를 제거했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로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백관들은 물론 8도 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일 정도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누이동생이 정조의 후궁이 되면서 모든 관리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 이른바 ‘세도’라는 말이 생겨났다. 하지만 후궁이었던 누이동생이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정조 또한 홍국영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우려해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정조는 그에게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결국 제거되었다.
정조는 학문적으로 남인 학파와 친숙하였고, 예론에서도 왕권의 우위를 주장하던 남인들과 밀착될 소지를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신권을 주장했던 노론 인사 중에서도 박제가, 유득공 등 북학 사상을 표방하던 젊은 선비들과도 친밀했다. 정조가 남인에 기반을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모든 학파의 장점을 수용해 정국을 이끌어 가자 조정은 당연히 정조의 통치 이념에 찬성하던 시파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벽파는 종전보다 훨씬 더 내부적으로 결속되었다.
벽파는 1791년에 일어난 신해박해를 기점으로 서서히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벽파는 서양 문화가 침입해 조선의 미풍양속을 해치고 있다며 천주교인들을 모두 잡아들일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남인 계열의 학자들은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다. 전라도 진산의 양반으로 천주교를 신봉하던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자 천주교 의식에 따라 상을 치른 것이다. 이 일로 그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인척이자 같은 천주교인이던 권상연이 그를 비호하고 나서면서 이 문제는 정치 쟁점이 되었다. 조정은 벽파와 시파로 갈라져 정면충돌했다.
정조는 조선이 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나라인 만큼 더 이상 천주교도들을 두둔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권상연과 윤지충을 사형시키고 천주교도들을 대거 잡아들였다. 이것이 신해박해이다.
그러자 대세는 벽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남인의 실학자로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고, 채제공 등 중신들의 입지도 크게 약화되었다. 1799년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시파 중에서도 남인 세력은 완전히 위축되었고, 이듬해 정조마저 세상을 떠나자 남인들은 정계에서 거의 축출되고 말았다. 정조의 친위 세력이던 시파들 역시 일부 노론 출신의 외척 세력을 제외하고 대부분 정계에서 밀려났다.
정조는 늘 백성을 잊지 않고 살핀 임금이었다. 백성들의 고통이 적힌 암행어사나 수령들의 보고서를 읽을 때면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능행길에서 백성들을 만나면 어가를 세우고 그들의 형편을 묻기도 했다. 서자나 노비 등 소외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죄수들에게 형틀을 씌우지 못하게 하고, 고문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사태가 생기지 않도록 배려하는 등 이전 임금과는 다른 행보를 보인 까닭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성군(聖君)이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1789년 정조는 경기도 양주에 있던 장헌세자의 묘를 당시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던 수원 화산 아래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1793년 화성 축조 계획을 발표했다. 이것은 그가 오랫동안 꿈꿔 온 계획이었다. 이에 정약용은 중국의 책들을 참고해 무거운 돌을 들어올릴 수 있는 거중기를 발명했다. 화성 축성은 다른 국가 공사와 달리 인부들에게 임금을 지불했고, 정약용이 개발한 거중기 덕분에 2년 7개월 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정조가 화성을 쌓은 것은 수도를 이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쟁의 뿌리가 깊은 한양에서는 개혁 정치를 실행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에 수도를 옮겨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새로운 조선의 부흥을 계획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개혁 정치는 번번이 반대 세력들의 견제로 제대로 성과를 내기 힘들었다. 게다가 지병인 종기가 도져 자리에 눕게 되면서 정조의 꿈은 미완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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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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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정조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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