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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6년
사망 1948년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야수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소설가로도 활약했다.
조선미술전람회 제1회부터 제5회까지 입선했고, 1921년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조선 여성 최초로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작품으로는 〈스페인 국경〉, 〈스페인 해수욕장〉, 〈무희〉, 〈파리 풍경〉, 〈나부〉 등이 있다.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여인

나혜석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꼽히는 인물이며 남성 중심의 폐쇄적인 사회에서 활동하던 여성 지식인이었다. 또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최초의 여성 소설가로 우리 근대문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업적들에도 그녀는 파란만장한 삶으로 인해 근대사의 대표적인 비극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곤 한다.

나혜석은 수원의 큰 대문 참판댁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절 시흥 군수, 용인 군수 등을 지낸 아버지 나기정(羅基貞) 덕에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나혜석은 오빠의 권유로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렇듯 고등교육을 받은 그녀에게 당시의 남녀차별 문제는 매우 불합리하게 여겨졌다. 그녀는 조선인 유학생 잡지인 〈학지광(學之光)〉에 양부현부(良夫賢夫)에 대한 교육은 없으면서 현모양처(賢母良妻)에 대한 교육만 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 것은 둘째 오빠인 나경석이었다. 그는 오사카의 빈민굴에서 생활하며 사회봉사를 했던 혁명적 인물이었다. 나혜석은 이러한 오빠 덕분에 일본에서 당시 조선 여성이 지니기 힘든 자유와 도전정신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유학 1년 만에 그녀는 공부를 그만두고 돌아와 결혼하라는 부모님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근대적 여성 의식에 눈을 떴고 자의식이 강한 그녀는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학지광〉의 발행인 최승구(崔承九)와 사귀는 중이었다. 최승구가 1916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두 사람의 연애는 끝이 났다. 나혜석은 충격으로 신경쇠약에 빠져 한동안 방황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린 나혜석은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여자계〉를 발간했다. 이 회보에 발표한 단편소설 〈경희〉는 여성의 자아 발견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그러던 나혜석에게 또 다른 남자가 다가왔다. 교토 국제대학교에 다니던 김우영이었다. 김우영은 이미 한 번 결혼했던 처지였으나 교토와 도쿄를 오가며 나혜석에게 열렬히 구애했다. 그러나 당시 그녀의 관심은 오직 일본 제국주의에 고통받고 있는 민족과 여성뿐이었다.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으로 돌아온 나혜석은 함흥 영생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일했다. 이듬해인 1919년에는 동경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귀국한 김마리아, 황에스더와 함께 3·1운동에 관여하면서 5개월간 감옥 생활을 했다. 그때 변호사였던 김우영이 그녀의 변론을 맡으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6년 동안 계속된 김우영의 구애는 결국 결실을 맺게 되었다.

나혜석은 결혼에 앞서 몇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막지 말 것, 셋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따로 살게 해 줄 것, 넷째 연인이었던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 줄 것 등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지만 김우영은 이를 수락했고, 두 사람은 1920년 4월 서울 정동 예배당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한 두 사람의 결혼식은 당시 대단한 이슈였다.

그리고 다음 해 3월 나혜석은 만삭의 몸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최초의 서양회화 전시회를 열었다. 〈매일신보〉는 당시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성공적인 전시회였다고 평했다. 그 후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발령이 나자 나혜석은 그를 따라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부영사의 아내로서 안정된 삶에 만족하지 않고 야학을 열어 여성들을 가르치고 남몰래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3남 1녀를 낳고 기르는 와중 육아와 가사일에 지치고 예술에 대한 갈망이 점점 커졌다. 마침내 두 사람은 자녀들을 시댁에 맡기고 3년간 세계일주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러한 그들의 행보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들 부부의 여행 소식은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한 달 만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나혜석은 서양회화 작품들을 연구하며 자유를 만끽했다. 이 시기 나혜석의 그림은 야수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스페인 국경〉, 〈스페인 해수욕장〉, 〈무희(캉캉)〉, 〈파리 풍경〉, 〈나부〉 등의 작품이 남아 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파리에서 나혜석은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자 천도교 신파의 거두인 최린(崔麟)을 만났는데, 이 만남으로 인해 그녀의 삶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최린은 나혜석의 남편인 김우영과도 친분이 있었다. 김우영은 법률 공부를 위해 베를린으로 떠나면서 그에게 아내를 부탁했다. 그러나 남편이 없는 파리에서 둘은 위험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남자나 여자나 다른 사람과 좋아 지내면 오히려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결코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최린)를 사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에 대한 정이 두터워지리라고 믿었다. 구미 일반 남녀 사이에 이러한 공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1929년 그녀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파리에서 있었던 나혜석과 최린에 관한 소문이 조선 사교계에 퍼지면서 김우영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김우영은 이혼을 원했고, 나혜석은 재산 분배를 요구하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김우영은 이듬해 신정숙이라는 여성과 재혼했다.

이혼 후 나혜석은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한 〈정원〉은 일본 제12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입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활짝 개화한 예술 활동과 반비례하듯 살림은 점점 어려워졌다. 그런 데에다 출품 준비 중이던 작품이 화재로 불타 버린 후에는 충격으로 수전증이 생겨 팔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미술 개인지도를 하고 초상화를 그리는 등으로 생활비를 벌어야 하게 되었다.

1934년 나혜석은 잡지 〈삼천리〉에 원고지 1,500장 분량의 〈이혼고백서〉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나혜석은 자신의 약혼과 결혼, 최린과의 만남, 이혼에 이르는 과정 등을 상세히 밝히면서, 조선 남자들의 겉과 속이 다른 행동에 대해 일침을 날렸다. “조선 남성의 심리는 이상하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여자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한다. ……이 어이한 미개의 부도덕이냐…….”

그러나 〈이혼고백서〉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만을 불러일으켰다. 강한 남성 중심 사회였던 조선 사교계에서는 오히려 그녀의 뻔뻔함을 욕했다. 나혜석은 〈이혼고백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최린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최린이 파리에서 강제로 자신에게서 정조를 빼앗았고 김우영과 이혼하면 생활을 돌봐 주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며 1만 2,000원의 위자료를 청구한 것이다. 그때 최린은 중추원 참의가 되면서 본격적인 친일(親日)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나혜석은 소송을 취하하기로 하고 최린에게 수천 원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만났던 이광수, 최린, 김우영 등이 모두 반민특위에서 친일파로 단죄받았으나 그녀에게서는 친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 후 나혜석은 세상으로부터 잊혔다. 게다가 1935년 충무로에서 개최한 소품전이 완전히 실패하자 예술에 대한 의욕마저 잃게 되었다. 첫아들이 폐렴으로 열두 살의 나이에 세상을 뜨고,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그녀의 곁을 떠나는 것도 삶에 대한 희망을 잃게 했다. 김우영은 그녀가 자녀들을 만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그녀는 불교로 개종한 후 수덕사, 해인사 등을 전전하면서 유랑 생활을 하다가 해방 후 오빠 나경석의 도움으로 양로원에 몸을 의탁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나왔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자제원(侍立慈濟院, 지금의 시립남부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행려병자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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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운 집필자 소개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펼쳐보기

장희흥 집필자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펼쳐보기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윤재운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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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 변방의 무장에서 새 왕조의 주인으로, 이성계 500년 조선왕조의 기반을 다지다, 정도전 태종의 치적 뒤에 자리한 장자방, 하륜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 청백리의 표상, 황희 신분의 굴레를 뛰어넘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왕위 찬탈자인가, 위대한 군주인가, 세조 모사가인가, 지략가인가, 한명회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 성삼문 국력을 신장시킨 외교와 국방의 달인, 신숙주 사림의 영수, 김종직 비운의 폐왕, 연산군 도학 정치를 꿈꾼 급진적 이상주의자, 조광조 조선 최초의 자연철학자, 서경덕 조선 주리철학의 선구자, 이언적 중세의 봉건적 질서에 반기를 들다, 임꺽정 동방의 주자, 이황 조선의 주자학을 일구다, 조식 동서 분당의 시대, 정인홍 어린 천재에서 희대의 정치가로, 이이 전란 속에서 나라를 구한 재상, 유성룡 한국 해전의 역사를 새로 쓰다, 이순신 조선 의학의 집대성 《동의보감》, 허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 정여립 홍길동의 아버지, 허균 대동법을 실시한 실리적 개혁가, 김육 명분인가 실리인가, 최명길 우리말의 가락을 살려 우리 글자로 쓰다, 윤선도 유림 위에 군림한 정치 사상계의 거장, 송시열 성리학계의 이단아, 윤휴 붓으로 살려낸 만물의 조화, 정선 경세치용의 학문을 열다, 이익 당쟁 속에서 탕평을 실천한 재상, 채제공 못다 한 개혁의 꿈, 정조 정조의 남자, 홍국영 실학의 아버지, 박지원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정약용 한국화의 전통미를 일구어 낸, 김홍도 조선을 뒤흔든 농민봉기의 지도자, 홍경래 한국적 서체를 완성하다, 김정희 자주적 근대화를 주장한 개화 사상가, 박규수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조선의 마지막 봉건주의자, 이하응 격동의 역사 속 비운의 황제, 고종 풍전등화의 조선에서 치열하게 살다 간 여걸, 명성황후 암살당한 개혁의 불꽃, 김옥균 한국 민중 저항사의 상징, 전봉준 민중 계몽으로 자주독립을 꾀하다, 서재필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안창호 총 한 자루로 제국주의를 처단하다, 안중근 〈님의 침묵〉, 한용운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신채호 항일 무장 투쟁의 영웅, 김좌진 삼천 만 동포에게 고함, 김구 좌익과 우익, 한국 현대사의 갈림길에서, 여운형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여인, 나혜석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는다, 박정희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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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나혜석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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