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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崔濟愚출생 | 18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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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4년 |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 사상과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시했다.
1864년 동학을 사학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동학의 창시자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며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주창했다. 신분 계급제인 양반 사회를 부정하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 속에 한울님을 모신 존귀한 인격이라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가지고 만민평등의 큰 뜻을 전파했다. 또한 평민들도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주체로 승격할 수 있다는 자주적 평등의 민족 사상을 국민들의 마음속에 심어 주었다.
왕조 사회의 쇠망을 예언하고 후천개벽(後天開闢, 조선 후기의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만민이 평등한 세상이 온다는 의미)의 새 시대가 도래한다는 이상향을 제시하였으며, 당시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척양왜(斥洋倭)’의 자주적 저항 의식을 서민들의 마음속에 불어 넣었다. 민족자주, 인간존중, 만민평등을 바탕으로 한 그의 민본주의 사상은 그가 순교한 후 갖은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나날이 번창해 동학농민혁명에서 3·1운동에 이르는 우리나라 근대 민족사의 정신적 주류가 되었다. 그의 동학 교리를 한문체로 엮은 《동경대전(東經大全)》은 오늘날까지 천도교의 경전으로 전해진다.
최제우는 경주에서 최옥(崔鋈)과 부인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본래 이름은 제선[濟宣 혹은 복술(福述)]이다. 7대조인 최진립(崔震立)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해 사후에 병조 판서로 추증되고 정무공(貞武公)의 시호를 받았지만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다. 아버지는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한 유생으로 두 번이나 상처(喪妻)를 하고 과부였던 한씨를 만나 예순세 살의 나이에 최제우를 낳았다. 그가 서자로 알려진 데에는 이 무렵 최옥이 동생의 아들 제환을 이미 양자로 들였기 때문이다.
가난하게 살던 그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여덟 살에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는데 열 살 무렵이 되어서는 세상의 어지러움을 한탄할 정도로 어른스러웠다고 한다. 열일곱 살에 아버지까지 여의자 그는 3년상을 마친 뒤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익히고, 갖가지 장사와 의술(醫術), 복술(卜術) 등의 잡술(雜術)을 배우기도 했다. 비참하고 어려운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는 어떻게 하면 많은 백성들이 고통받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고 있을 때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한 승려가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책을 그에게 주었다. 승려는 그에게 “이 책을 탑에서 얻었는데 그 내용을 아무도 해독할 수가 없습니다. 생원이 박식하다고 하니 혹시 풀 수 있을지요?”라고 물었다. 그 책에는 “하늘에 기도를 하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즉 세상을 구할 도를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하늘로부터, 나아가 안에서 구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는 이후 수련에 힘써 1856년 양산군 천성산의 내원암에서 49일 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47일 만에 기도를 중단했다. 그리고 다음 해 적멸굴에서 49일 기도를 드렸다. 그는 이 무렵 세상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 이름을 ‘제우(濟愚)’라고 고쳤다.
그러나 이렇게 지내다 보니 가산을 탕진했고 빚은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는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관가에까지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어느 날 빚 독촉을 하던 노인이 행패를 부리자 분한 마음에 그를 밀쳤는데 그만 죽고 말았다. 노인의 아들과 사위가 몰려와 난동을 부리자 그는 닭털 꼬리를 노인의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노인이 기침을 하면서 깨어났다. 이 일로 인해 그가 영험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1860년 4월, 그는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공중으로부터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바로 상제(上帝)의 음성이었다. 그는 상제로부터 병을 고칠 수 있는 영부(靈符)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조화(造化)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년 동안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했다. 당시 널리 전파되고 있던 천주교를 서학(西學)이라고 부르는 것에 맞서 동학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동학은 인간 중심을 내세운 종교였다. 또 나라와 시대의 모순을 고민하는 보국(保國) 종교였다. 이는 “사람을 한울처럼 섬겨라.”,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널리 민중을 구제하라.”라는 가르침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포교를 시작하자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랐다. 인간평등 사상을 내세운 동학은 신분 제도 속에서 희망을 잃은 사람이나 천대받던 사람들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최제우는 두 여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한 명은 며느리로 삼았고 한 명은 수양딸로 삼는 등 인간 평등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은 모든 교도들에게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맞절을 하게 했다.
최제우는 인간의 본바탕이 선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형벌로 인간을 다스리지 않고, 내부에서부터 선함을 끌어내려 했다. 이것은 노자의 가르침인 ‘무위이화(無爲而化, 자연의 뜻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지도록 교화한다)’와 통하는 것이다. 동학의 핵심인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사람이 곧 하늘이므로 하늘을 받드는 사람은 사람을 하늘처럼 받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런 포부를 펴기에는 시대가 지나치게 암울했다. 동학의 세력이 커지자 각종 불미스러운 소문이 떠돌았고 지방의 유림과 친척 중에도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는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 피신했다. 그는 이곳에서 《권학가(勸學歌)》를 쓰고, 관가에 쫓기거나 굶주린 농민들을 불러 모아 동학을 가르쳤다. 교세가 경상북도 일대까지 확대되자 유림들은 통문을 돌려 동학이 사학(邪學)임을 밝히고 전파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동학의 전파를 막을 수는 없었다.
1863년 12월, 조정에서 최제우를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몸을 피하라는 제자들의 권고를 거절하고 조용히 포졸들에게 끌려갔다. 이에 동학교도 수천 명이 몰려들어 최제우의 가르침이 민속(民俗)을 해치지 않는다고 증언하면서 석방을 청원하자 경주 진영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무죄로 방면했다.
그가 석방되자 사람들은 조정에서 동학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교세는 더욱 늘어났다. 최제우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신도를 관할하게 하는 등 신도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접은 경상도,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설치되었고,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 소에 달했다.
그러나 최제우는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곧 조정에서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했다. 그는 최시형을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제2대 교주로 삼았다. 최제우는 1864년 11월, 왕명을 받은 선전관 정운구(鄭雲龜)에 의해 제자 23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를 구출하기 위해 제자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는 최시형에게 도망치라는 지시를 내렸다. 최시형은 동학의 포교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났다.
1864년 최제우는 ‘사도난정(邪道亂正)’이라는 죄목으로 달성공원에서 효수형에 처해졌다. 포교를 시작한 지 3년 만이었다. 동학 포교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핍박받던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동학에 입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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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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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최제우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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