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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李滉출생 | 150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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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70년 |
이기호발설을 중심으로 영남학파를 형성했고, 이이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대립하며 동서 붕당과도 연관되었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기대승과 8년에 걸친 논쟁을 벌이며 조선의 성리학을 집대성했다.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큰 영향을 끼쳤다.
동방의 주자
이황은 다산 정약용과 더불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학자이다. 그는 주자 사상의 체계를 세우고 독창적으로 정리해 집대성하여 조선 성리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글을 배우는 것은 마음을 바로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고 학문의 도리를 인간 본성의 회복에 두었다. 칠십 평생을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자세로 일관하며 자신의 학문을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황은 일본에서도 학문의 스승으로 추앙받을 정도로 대유학자였지만 평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 속에서 진리를 구하고 수용하려는 자세를 가진 학자였다.
이황은 연산군 시절 경상도 예안군에서 진사 이식(李埴)과 춘천 박씨 사이에서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7달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어머니 박씨가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맏이인 잠(潛)만 장가를 갔을 뿐 나머지 자식들은 혼인 전이어서 박씨의 책임은 무거웠다. 하지만 박씨는 농사를 짓고 누에를 쳐 생계를 이어나가면서도 자식들을 교육시키는 데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과부의 자식은 배운 게 없다고 비웃곤 한다. 만약 너희들이 글공부에 남들보다 백 배는 더 힘쓰지 않는다면 어찌 이런 비웃음을 면할 수 있겠느냐?”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 이우(李堣)에게 《논어》 등을 배웠다. 숙부는 영특한 조카를 매우 아꼈다. 어렸을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사색을 즐겼던 그는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도 벽을 보고 앉아 골똘히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좋아하여 자연을 사랑하고 은둔하며 학문에만 열중하는 생활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숙부가 세상을 뜬 후부터는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가 주자학을 처음 접한 것은 열아홉 살 때였다.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은 그는 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주역》의 연구가 필수라고 여기고 주역 공부에 몰두했다.
이황은 과거에는 연거푸 네 번이나 낙방하고, 스물일곱 살이 되어서야 경상도 향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30대 초반 문과에 합격할 때까지 이렇다 할 관직 없이 백면서생으로 학문에만 몰두했다. 그의 학문적 깊이를 생각하면 매우 늦게 벼슬길에 들어선 셈이다. 그러나 외교문서를 취급하는 승문원으로 조정에 첫발을 디딘 후부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며 두루 요직을 거쳤다.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고, 경연관으로 활약했으며 단양 군수, 풍기 군수 등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백성들의 고통과 농촌의 현실을 보고 겪기도 했다. 이때 그는 임지에 있던 백운동서원을 운영하기 위해 특별히 경상 감사에게 부탁해 조정으로부터 원조를 받기도 했다. 이 서원은 지방의 교육기관으로 훌륭히 자리 잡았고, 그 후 각 지방에 서원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긴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이따금씩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기도 했으나 조정에서는 그런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가 사직상소를 올리기라도 하면 중종은 휴가를 주어 이를 무마하려고 했다. 여기에는 조정의 요청에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종종 훌륭한 스승과 친구를 얻지 못한 채 벼슬을 하게 되어 공부에 전념할 수 없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황은 타고난 학자로 벼슬에 있을 때나 재야에 있을 때나 손에서 책을 놓는 경우가 없었다. 이로 인해 건강을 해쳐 소화불량과 안질, 현기증에 시달렸으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쇠약해져 갔다. 하지만 사직한 후 고향에 내려가 있어도 번번이 임금의 부름이 이어졌다. 명종은 고향으로 내려간 그가 거듭 불러도 오지 않자 독서당 관원들에게 ‘현자(賢者)를 불러도 오지 않는 것을 탄식한다(招賢不至歎)’라는 제목으로 시를 한 수씩 지어 올리라고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도산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 하고, 그가 쓴 《도산기》와 《도산잡영》을 필사해 병풍으로 만들게 하여 침전에 둘 정도였다. 가히 이황에 대한 애정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덕분에 그는 자신이 벼슬보다는 자연과 학문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40여 년간 관직에 머무르면서 네 임금을 섬겼다.
명종 때 쓰시마 섬주가 왜구가 조선에 침입한 죄를 사죄하며 화평 조약을 맺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한 데 대해 조선 조정에서 거절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즉시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려, 남방의 왜를 공연히 자극해 그들이 침입해 온다면 커다란 혼란이 일어날 것이므로 선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을 단속해 함부로 조선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선견지명은 훗날에는 높이 평가되었지만 당시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을사사화를 겪은 직후여서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없었다. 오히려 있지도 않은 사실을 유포해 불안을 키운다고 하여 관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무고함이 밝혀져 곧 복직한 이황은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66세의 나이로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예조 판서를 거쳐 의정부 우찬성, 예문관 대제학까지 거친 후에야 관직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물론 당시 왕위에 오른 선조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이황과 같은 대신들이 조정에 남아 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그때가 물러날 시기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선조는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더라도 한성에 머물면서 자문이라도 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황은 이것마저 사양하고 낙향했다. 그래도 걱정은 되었는지 장문(長文)의 상소문을 제출했다.
“지금은 평화롭지만 남쪽과 북쪽에서는 항상 우리를 넘보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소서. 또한 권력자의 수탈로 나라의 재정이 문란해져 국고가 비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되면 머지않아 큰 위기가 닥칠 수 있사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일생 동안 연구한 학문을 10개의 그림으로 요약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렸다. 여기에서 그는 수신(修身)이 정치의 근본이 됨을 강조하고, 군주의 도덕적 수양을 촉구하면서 수신의 방법과 그 철학적 근거를 밝혔다. 은퇴한 후에는 《주자서절요》 등 저술 작업과 학문 연구, 그리고 제자 양성에 전력했다.
이황의 성품은 차분하고 겸손했으며 합리적이었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아무리 어리다 해도 예를 다했으며 음식이나 놀이에 있어서도 정도를 넘지 않았고 평생을 겸허한 자세로 스스로를 경계했다. 또한 매우 검소해 대궐을 출입할 때에도 수레를 타지 않고 말을 타고 다녔으며 부유한 처가의 도움을 한사코 사양했다. 제자들에 대한 사랑도 지극하여 제자에 관한 언짢은 꿈을 꾸면 그의 안부를 염려하는 편지를 보내고 곤궁한 제자가 있으면 곡물을 보내 주었다.
그가 확립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간단히 설명하면 인간은 본래 착한 바탕이나 태어나 살면서 선(善)이 되기도 하고 악(惡)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理)’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기 수양이나 교육을 통해 연마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그를 주리론자(主理論子)라고 한다.
낙향한 다음 해 종가 제사에 참석한 그는 감기에 걸려 고생하다가 일어나 앉은 자세로 숨을 거두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것처럼 죽기 며칠 전에는 자신의 비문 내용을 손수 지어 남겼으며 죽던 날 아침에는 서재에 있는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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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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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황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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