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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이유, 世祖출생 | 14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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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68년 |
조선 제7대 왕(재위 1455~1468년).
세종의 제2왕자로 1428년 수양대군에 봉해졌고, 1455년 단종을 선위(禪位)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의정부의 정책 결정권을 폐지하고 6조직계제를 부활시키는 등 왕권을 강화했고, 호적과 호패 제도를 강화하고 진관 체제 등을 실시하여 국방력을 신장시켰다.
왕위 찬탈자인가, 위대한 군주인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세조에 대한 평은 좋지 않다. 사료는 그에 대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통치 체제를 다시 6조직계제로 고쳤으며, 자신의 활동을 견제하는 집현전을 없앴다. 경연(經筵)도 열지 않았으며, 태종 이후 정치 참여가 제한되었던 종친들을 등용하기도 했다.”라고 적고 있다. 조선의 성리학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던 세종이나 성종과는 반대였다. 그러나 그는 태종에 이어 조선의 정치, 군사 등을 정비하고 조선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다.
세조가 집권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 그가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 수십 명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을 말한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4개월 만에 세상을 뜨자 열두 살의 어린 단종이 즉위했다. 그러나 궐 안에는 수렴청정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는 단종을 낳은 후 한 달 만에 산욕열로 죽었고,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는 정치적 발언권이 없이 궐 안의 일을 관장할 뿐이었다. 또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는 아직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아 단종의 후원 세력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모든 정치적 권력은 문종의 유지를 받든 황보인과 김종서 등의 대신뿐이었다.
당시 수양대군(훗날의 세조)과 안평대군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많은 문객을 모으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주로 불교 서적을 번역하거나 병서를 편찬하는 일에 관여했고, 진법(陣法)을 지휘하는 일도 했다. 반면 안평대군은 문학과 예술을 좋아했다.
단종 집권 이후 황보인 등의 대신들로 인해 의정부가 지나치게 비대화되자 집현전 출신인 신숙주, 성삼문 등이 대간직으로 진출하면서 의정부 대신들의 권력을 축소할 것을 요구했다. 단종이 의정부를 옹호하자 황보인 등은 대간의 업무를 탄압하게 되었고 이에 상당수 집현전 출신들이 수양대군과 함께 정변에 참여하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사, 내금위 무사, 내시부의 내시를 규합하고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그는 즉위한 다음, 제2의 창업지주(創業之主) 혹은 조종지주(祖宗之主)임을 내세웠다. 그리고 왕이 죽은 제도라 하여 의정부서사제는 혁파하고 6조직계제를 선택했다. 정적을 숙청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 영집현전사, 영경연사, 영춘추관사, 영서운관사, 판이병조, 내외병마도통사 등 중직을 겸하는 등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했다. 그리고 정인지, 권람, 한명회, 양정 등 43명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했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며 문종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세종은 통념적인 종법대로 적자로서 왕위를 승계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형인 문종 역시 군주의 자질이 충분했기에 둘째 아들인 그가 왕위에 오르기는 불가능했다. 세조는 그저 왕실 종친 중 한 사람으로 남게 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문종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세종은 자신의 건강도 좋지 않았기에 다소 이르지만 문종에게 섭정을 하게 하여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했다.
당시 세조는 궁 밖에서 자라고 있었다. 궁 밖에서의 삶은 그에게 오히려 좋은 영향을 주었다. 궁에서 애지중지 귀하게 자라 세상 물정을 모르기보다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활달한 아이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부당함, 진실과 거짓을 일찍부터 알게 되었다. 그는 또한 다섯 살의 나이에 《효경(孝經)》을 외워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이러한 영특함은 형제들 중 단연 돋보여 세종과 형인 문종에게 인정을 받았다.
또한 세조는 무예에 대한 체득도 남달라 궁마술에 뛰어났고, 매사냥을 좋아하여 자신이 직접 매를 사육시켜 사냥을 다니곤 하였다. 그가 이렇듯 마음껏 무예를 닦을 수 있었던 것은 왕자로서 덕을 키우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는 성리학적 윤리 규범이 강하게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열두 살에 훗날 여장부로 명성을 떨치게 될 정희왕후 윤씨와 가례(嘉禮)를 올렸다. 당시 윤씨의 나이는 세조보다 한 살 아래였다. 정희왕후는 세조를 내조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세조가 중대한 날에 판단을 주저할 때에는 그의 결단을 이끌어 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순간에도 그녀는 갑옷 입기를 주저하는 세조에게 “지체할 시간도 없는데 아랫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어야 할 사람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라고 질책하며 그를 움직이게 했다. 그녀는 세조가 붕어(崩御)한 뒤에도 왕실을 안정시키고 왕위 계승 문제를 분명하게 처리했으며,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행한 여장부였다.
그는 1428년에 진평대군, 1432년 함평대군에 책봉되었다가 이해 7월 진양대군으로, 다시 1445년 수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 그는 세종 시절 토지 개혁을 맡았으며,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요(歷代兵要)》, 《의주상정(儀註詳定)》 등의 책을 썼고, 중국의 《운회(韻會)》를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가 왕위에 머문 기간은 14년 정도지만 그동안 많은 제도를 개혁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아버지였던 세종이 하나의 제도를 몇 년 동안 고심한 것과는 정반대로 대부분의 제도 개혁을 독단으로 결정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 인해 집현전의 공신들과는 집권 초기부터 사이가 벌어졌고 이는 단종 복위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세조는 집현전의 유교적 이상주의가 왕권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해 집현전을 혁파하고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학자들을 배출하던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서적들도 모두 예문관으로 옮겨 버렸다. 이 때문에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고,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 밖에도 왕권 강화책으로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태종 때 실시했던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 《동국통감》을 편찬하고 《경제육전》을 정비했으며, 왕조 일대의 총체적 법전인 《경국대전》 찬술을 시작했다.
또한 역모와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군정을 정비하는 데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 각 고을에 명해 병기를 만들게 했고, 종래에 현직·휴직·정직 관원에게 나누어 주던 과전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하는 등 백성들의 살림살이도 살폈다.
그러나 그는 측근 중심의 정치를 펼치며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은 가차 없이 제거했지만 자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게 굴었다. 일례로 계유정난의 공신이자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공이 많았던 양정이 그에게 불손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참형에 처해진 반면, 또 다른 공신인 홍윤성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수하로 하여금 사람을 죽였음에도 주의만 주고 사건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승정원과 6조는 모두 그의 심복들인 정난공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예조 판서, 군사통인 한명회는 병조 판서, 재무통인 조석문은 호조 판서를 지내는 동시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도 봉직했다. 또 이들은 비록 현직에서 물러나도 부원군 자격으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했다.
그렇게 많은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세조는 말년이 되면서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일종의 원상제(院相制)로 왕이 지명한 삼중신(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함께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제도였다. 그가 세 중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1468년 9월 세조가 세자에게 전위(轉位)한다는 뜻을 밝히자 대신들은 불가하다며 나섰다.
“운(運)이 다한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 것인데, 너희들이 나의 뜻을 어기고자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그는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는 그다음 날 죽었다. 이것은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이다.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었다고 생각해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나 그 피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문인지 세조는 불교에 큰 관심을 두었다. 궁 안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왕자 시절에 불경 언해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교학(敎學)에도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세조가 불교 융성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유교적 입지가 약한 그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죽인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 사상 아래에서는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친불 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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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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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세조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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