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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申采浩출생 | 18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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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6년 |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사론》 등을 집필했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 의식 함양에 힘썼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고 민족사관을 수립하여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신채호는 젊은 시절 애국 계몽 운동가로서 주로 언론 저술 활동에 종사했고, 일제하에서는 러시아, 만주,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독립운동가로서 활약했다. 또한 사학자로서 한평생 ‘민족’과 ‘역사’를 화두로 당시 국정과 일본의 불의를 통렬히 비판하며 조선 민중의 혼을 깨우는 데 앞장섰다.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의 수많은 유적지들을 직접 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료들을 접하면서 우리 고대사(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라고 통탄했다. 그가 민족 독립과 민중 해방을 위한 방편으로 아나키스트 운동에 투신하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있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엇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행동하는 지성인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신채호는 충청남도 대덕군 도림리에서 신광식과 밀양 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정6품 사간원 정언을 지냈으나 아버지가 벼슬을 하지 않아 집안은 가난했다. 신채호는 어린 시절 서당 훈장인 할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삼국지》나 《수호지》 등 중국의 역사소설을 즐겨 읽었다. 열여덟 살 때에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빌려 주던 신승구의 주선으로 학부대신을 지낸 신기선(申箕善)의 서재에 출입하면서 많은 책을 접했고, 스무 살에는 신기선의 소개로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 시절 신채호는 변영만, 김연성, 류인식, 조소앙 등과 교류했으며 이들과 독서회를 조직해 사회과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봉건적 주자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서양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립협회에 가입한 이후 1898년에는 43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기도 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농민들에게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전파했다. 스물여섯 살에는 성균관 박사로 임명되었지만 관직 생활 대신 구국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고향에서 교육 활동에 힘썼다. 그러던 중 장지연(張志淵)의 제의로 황성신문사에 논설위원으로 입사하면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이라는 논설로 장지연을 비롯해 10여 명이 구속되자 〈황성신문〉은 무기 정간되었고, 그는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언론 활동을 계속했다. 스물여덟 살에는 양기탁, 이동녕, 이회영, 이동휘, 안창호, 전덕기, 이갑, 이승훈 등과 더불어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여했다.
신채호는 〈일본의 삼대 충노(忠奴)〉, 〈친구에게 주는 절교서〉 등을 통해 친일파들의 반민족 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일본의 원조를 받을 수도 있다는 근대화 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일제의 식민지화가 기정사실화되면서 그는 안창호, 김지간 등 신민회원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그가 망명을 선택한 것은 비록 나라는 망하더라도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이후 조카의 혼사 문제와 제자 김기수의 죽음으로 고국에 돌아온 일을 제외하고는 고국에 발을 디디지 못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해조신문〉을 복간하고 〈청구신문〉 발행에 참가하는 등 언론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1911년에는 〈권업신문〉의 주필, 〈대양보〉의 주필로도 활동했다. 그리고 무애생(無厓生), 열혈생(熱血生), 검심(劍心), 연시몽인(燕市夢人) 등의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여 문필 활동을 계속했다.
1915년 신채호는 신규식과 박은식으로부터 상하이 활동을 권고받고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혁명단에 참가했다. 그는 이 무렵 〈꿈하늘〉이라는 중편소설을 발표했다. 국가주의와 국수주의, 영웅주의를 주제로 한 이 소설을 통해 그는 외교 독립론과 실력 양성론을 비판했다.
신채호는 역사 연구를 민족 해방 운동의 주요한 방편으로 삼았다. 이미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하면서 당시 국사 교과서의 오류와 김부식의 사대주의 사관을 비판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집필하는 한편 남만주 일대와 백두산을 직접 답사하고 광개토대왕비를 돌아보며 보고 들은 것을 기반으로 《조선통사론》, 《인물고》 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고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는 임시정부 수립에 앞서 임시정부창건위원회의 요인으로 활약했으나, 미국에 위임 통치를 제안했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임시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사양하고 임시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의 독립 투쟁 노선은 철저하게 무장 투쟁이었다. 그는 외교나 문화운동, 일제의 이성에 호소하는 따위의 온건한 방법으로는 아무런 성과도 이룰 수 없으며 암살이나 테러 등의 수단을 통해 항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1년 창간한 잡지 〈천고(天鼓)〉를 통해 테러를 통한 무장 투쟁을 민족해방운동의 수단으로 채택하면서 국내에 흑색청년동맹을 창설하고 북경 지부까지 설치했다. 이 단체는 의열단과 함께 1920년대 초 아나키스트들의 테러 활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의열단의 강령과 행동 목표의 취지 및 단원의 정신 무장을 위해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 자세히 드러나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조선 민족 생존의 적’이라고 규정하고 임시정부를 비판했으며 나아가 민중의 직접적인 혁명을 통해 민중의 자유가 보장되고 민중이 주인인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행동 목표에는 일본 천황의 암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글을 읽는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격렬하고 논리정연한 문장으로 혁명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덕분에 의열단의 무력 항쟁은 눈부시게 전개될 수 있었다. 이런 행동들은 끝내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고 일본은 그를 일급 불온인물로 낙인찍어 체포에 혈안을 올렸다.
그는 1928년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하는 등 아나키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 후 한국인 아나키스트 대회를 개최해 아나키즘을 선전하고 적의 기관을 파괴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러시아와 독일의 폭탄 전문가를 초빙해 폭탄과 총기를 만들어 각국으로 보내 대관(大官)을 암살하고 건물을 파괴하는 한편 세계 각국에 선전문을 발송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기관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외국환을 위조할 계획을 세운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당시 우체국에 근무하던 대만인 아나키스트 임병문으로 하여금 위조 외국환을 우체국에 저축하도록 한 뒤 일본 등에서 현금으로 인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유맹원이라는 중국인 행세를 하면서 1만 2,000원을 인출하기 위해 대만행 배를 탔는데 임병문이 체포되는 바람에 사전에 계획이 발각되어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 끝에 그의 독립운동 경력이 모두 드러났고 특히 그가 〈조선혁명선언〉을 쓴 인물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그는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 갇혔다.
신채호는 옥중에서도 우리나라 역사 연구에 몰두하다가 오랜 감옥 생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죽기 전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라고 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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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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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신채호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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