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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
道詵출생 | 8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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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898년 |
통일 신라 시대의 승려. 속성은 김. 호는 옥룡자(玉龍子).
저서로 《도선비기(道詵秘記)》 등이 있고, 그의 음양지리설과 풍수상지법은 고려와 조선 시대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백계산 옥룡사에서 35년간 머무르면서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 냈고, 헌강왕의 초빙으로 궁중에 들어가 설법을 하는 등 왕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풍수지리설을 제창하다
도선은 통일 신라 말의 승려로 풍수설의 대가이다. 그가 남긴 음양지리설,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은 한민족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속세의 성은 김씨로 전남 영암 출신인데,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도선의 행적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한다. 그가 열다섯 살에 화엄사에서 출가한 사실은 대부분의 사료들이 똑같이 기술하고 있지만 당나라에서 유학을 했다거나 승려로서 업적을 많이 남겼다는 기록은 다소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는 승려라기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당나라에서 풍수설을 배웠다는 주장도, 그가 스승으로 삼았다는 승려 일행(一行)과는 시대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850년에 천도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백계산 옥룡사에서 후학을 지도할 때 제자들이 수백 명씩 모여들었고, 이를 들은 헌강왕이 궁으로 초청해 법문을 들었다는 일화는 사실로 추정된다.
도선이 유명해진 계기는 무엇보다 고려 태조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875년(헌강왕 1) 도선이 “지금부터 2년 뒤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예언한 이후 송악에서 훗날 고려 태조가 되는 왕건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왕건은 도선에게 직접 설법을 듣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을 많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특히 민간에 널리 알려져 있던 《도선비기》에 큰 관심을 쏟았다.
태조가 후대에 남긴 〈훈요십조〉 가운데 “여기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점쳐 정한 자리에 개창한 것이다. 도선은 일찍이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외에 함부로 사원을 세우면 국운이 길하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다.”라는 제2조만 해도 태조가 도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태조는 신라 말에 사찰을 마구 세우는 바람에 나라가 멸망했으니 그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여 도선의 생각을 존중했다. 이처럼 도선이 산천의 지세를 점쳐 정한 자리에 세운 절과 탑을 ‘비보사탑(裨補寺塔)’이라고 한다.
도선은 898년(효공왕 2) 72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항상 제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그는 앉은 채로 입적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숨진 후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은 옥룡사에 징성혜등탑을 세웠다. 고려 현종은 그를 대선사(大禪師)로, 숙종은 왕사(王師)로 추증 했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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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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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도선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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