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직인 100
인
장영실
蔣英實출생 | 미상 |
---|---|
사망 | 미상 |
동래현의 관노 출신으로 태종 때 발탁되어 궁중에서 기술자 업무에 종사했고, 1423년 세종의 특명으로 면천되었다.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 등 각종 과학 기구들을 제작하며 조선 전기의 과학 기술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1442년 그가 제작한 세종의 수레가 부서져 그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신분의 굴레를 뛰어넘은 최고의 과학자
세종 시대에 이루어진 놀라운 과학 발전의 한 기둥을 차지하고 있는 이가 바로 장영실이다. 비천한 신분에도 타고난 재능과 기술로 조선 전기의 과학 기술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는 당시의 엄격한 신분 제도의 벽을 넘어선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농본’을 국가 이념으로 삼던 조선 시대에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업의 발달이 요구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과학적인 지식과 기술 발전이 반드시 필요했다. 장영실은 조선 초기의 과학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세종의 치적에 큰 방점을 찍었지만 단 한 번의 실수로 역사의 무대에서 쓸쓸히 사라지고 말았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귀화한 중국인이며 어머니는 기생이었다고 한다. 그 역시 동래현의 관노로 지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기구를 만지는 것을 좋아해서 일을 마치고 나면 틈틈이 병기창고에 들어가 녹슬고 망가진 병장기와 공구들을 말끔히 정비하곤 했다. 마을 사람들이 종종 망가진 농기구 수리를 의뢰할 정도로 마을에서 유명한 소년이었다.
장영실에 관한 기록은 태종 때부터 등장한다. 이것으로 보아 태종 때부터 궁에서 기술자로 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장영실은 천문 기구 제작법을 배우러 중국으로 떠났다. 천민 출신인 그가 중국까지 갈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꽤 전문적인 실력을 가진 기술자였음을 말해 준다. 하지만 중국의 철저한 통제로 그는 설계도나 실제 제작에 필요한 것들을 얻어오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세종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고 상의원별좌에 임명하려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동 물시계인 경점기(更點器)를 고친 공로로 노비 신분을 벗고 결국 상의원별좌에 임명되었다. 당시의 신분 제도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인사였다.
1432년 가을부터 세종은 예문관 제학 정인지를 중심으로 천문대와 각종 천문 기구를 제작하는 의표창제(儀表創製) 사업에 착수했다. 대규모 천문 관측대인 대간의대를 경복궁 안에 세우고 소규모 관측대인 소간의대는 광화문 근처에 짓도록 했다. 실무 집행은 공조 참판을 역임한 이천에게 맡겨졌는데, 이때 장영실은 이천을 도와 큰 역할을 했다. 작업을 시작한 지 거의 1년 만에 장영실은 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측정하는 일종의 천문 시계인 혼천의를 만들었다. 여기에다 김빈과 함께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 주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드는 데에도 성공했다. 세종은 그 공을 치하하면서 장영실을 정4품 무관 벼슬인 호군으로 임명했다.
세종은 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전각을 짓고 자격루를 설치해 조선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도록 했다. 자격루에서 시간을 알려 주면 궁궐 밖 종루에서 낮 12시와 밤 10시에 북이나 종을 쳐서 일반 백성에게 시각을 알렸다.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중종 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 외에도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앙부일구, 태양시와 항성시를 측정하여 주야 겸용 시계로 쓴 일성정시의,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 등을 완성했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지 5년 후에 더욱 정교한 시계인 옥루를 만들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 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더한 것으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해야 할 농사일까지 알려 주는 다목적 시계였다. 세종은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집무실 옆에 흠경각을 지어 옥루를 설치하게 하고 자주 드나들었다. 이 공으로 그는 경상도 채방별감이 되어 동(銅)과 철(鐵)을 채광하고 제련하는 일을 감독했다.
장영실이 만든 것은 이런 관측 기구뿐만이 아니다. 1434년에는 김돈, 김빈 등과 함께 금속활자인 갑인자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태종 때 만들어진 계미자는 활자가 고르지 못하고 활자를 고정시키기 위해 밀랍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양을 인쇄할 수 없었다. 이를 개량한 것이 갑인자로 20여 만 자를 만드는 데 2개월이 걸렸으나 글자의 모양도 아름답고 선명했으며 전보다 2배는 빨리 인쇄할 수 있었다. 이 갑인자로 수많은 책들을 출판할 수 있게 되면서 세종 시대는 문화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다.
1441년에는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와 하천 수위 측정기인 수표(水標) 제작을 감독했다. 강우량 측정은 농업 국가인 조선에는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수표는 청계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설치되었는데 현재 세계 각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양수표(量水標)와 같은 방식이다.
그는 과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정3품인 상호군까지 올랐다. 그러나 1442년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사고가 나는 바람에 불경죄로 투옥된 후 파면되었다. 그를 아꼈던 세종은 곤장 100대를 80대로 감해 주었을 뿐 더 이상 구제해 주지는 않았다. 왕에게 위해를 끼친 경우에는 대역죄로 처벌되는 것이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역사 속에서 장영실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출처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장영실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