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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李奎報출생 | 116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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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241년 |
고려 중기의 대문호. 호탕하고 활달한 문장으로 당대를 풍미한 명문장가이다. 시, 술, 거문고를 즐겨 삼혹호 선생이라 자칭하기도 했다.
저서에 《동국이상국집》, 《국선생전》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동명왕편》 등이 있다.
무신 시대 문인의 애환
이규보는 고려의 명문장가이자 문신이다. 그의 시풍은 시대를 풍미했는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감상을 읊은 즉흥시로 유명하다. 호는 백운거사이다. 말년에 시와 거문고, 술을 즐겼다 하여 ‘삼혹호(三酷好) 선생(先生)’이라고 자청하기도 했다.
이규보는 어린 시절부터 글 짓는 재주가 남달랐다고 한다. 아홉 살 때부터 어려운 고전들을 읽기 시작했고, 열네 살 때는 한 사학이 주최한 하과(夏課, 여름철에 절을 빌려 과거 시험 준비를 하는 것)에서 시를 가장 빨리 지어 ‘기재(奇才)’로 불렸다. 그는 형식적인 글을 멀리했다. 보잘 것 없는 소인배들이나 형식에 젖어 그를 과시하는 글을 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몇 번이나 사마시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럼에도 그는 기성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문인들의 시회에 나가기도 했다.
이규보는 1189년(명종 19) 사마시에 네 번째 응시한 끝에 수석 합격했고, 이듬해 예부시에서는 동진사로 급제했다. 하지만 관직 운은 없었던 것 같다. 특별히 할 일을 찾지 못한 그는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개경 천마산에 들어가 시를 지으며 세상을 관조했다. 1년 만에 개경으로 돌아갔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부에서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등 정치적 상황이 더 복잡해졌을 뿐이다. 이규보는 몇 년째 관직에 나가지 못했고, 자연히 생활은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시기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탄생 설화를 기록한 《동명왕편》을 썼다. 금나라가 고려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고구려 시조의 영웅담을 환기시킨 것은 고구려 계승 의식을 통해 우리 역사를 자주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또한 《동명왕편》은 《구삼국사(舊三國史)》의 내용을 주(註)로 달았기에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서른 살이 다 되도록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이규보는 1197년 조영인(趙永仁)과 최선(崔詵) 같은 최충헌 정권의 유력자들에게 서신을 썼다. 한마디로 취직을 청탁하는 내용이었다. 구직의 기회는 2년 뒤에야 찾아왔다. 최충헌이 주최한 초청시회에서 이규보는 최충헌을 위대한 공로자, 국가를 살린 공신으로 칭송하는 시를 읊었다. 이 대가로 이규보는 사록 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가 되어 전주 목에 부임했다. 그러나 막상 일자리를 얻고 보니 생각보다 봉록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처리해야 할 행정 잡무는 번거롭고, 상관은 태만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그는 제대로 일도 해 보지 못하고 1년 4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일자리를 잃은 이규보는 1202년 동경(東京, 지금의 경주)과 청도 운문산 일대의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군대에 자원했다. 각종 격문(檄文)을 쓰며 때를 노리던 이규보는 15개월 만에 귀경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자 다시금 좌절하게 된다. 그가 겨우 자존심을 회복한 것은 1207년(희종 3) 이인로, 이공로, 이윤보 등과 글을 겨뤘는데 최충헌이 이규보의 작품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면서부터이다. 최충헌은 이규보를 칭찬하며 권보직한림으로 발탁했다. 이후 1215년 우정언(종8품) 지제고로서 참관이 되었고, 이때부터 동료 문사들과 비슷한 속도로 출세하기 시작했다. 2년 뒤 다시 우사간에 임명되어 관리로서 행복한 순간과 문인으로서 쾌적한 창작의 시간을 동시에 즐겼다.
1217년 이규보는 최충헌을 비판했다는 밀고로 정직되고 3개월 뒤에는 좌사간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에는 사소한 실수가 집무상 과오로 확대되어 좌사간마저 면직되고 말았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유교적 윤리에 입각해 일을 하더라도 최고 권력자의 눈 밖에 나면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권력자란 무신 정권의 독재자 최충헌이었다. 이 일로 이규보는 ‘보신(保身)만이 살 길’이라고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1220년 최충헌이 세상을 떠나고 최이가 집권하면서 이규보는 다시 개경 정계의 한복판에 서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개인적인 의견은 접었고, 모든 일을 최이가 원하는 대로 처리했다. 덕분에 이규보는 이후 10년 동안 문예가로 이름을 날리는 동시에 보문각 대제, 지제고, 태복소경, 장작감, 한림학사, 시강학사, 국자좨주 등 숱한 벼슬을 지냈다. 1228년에는 중산대부 판위위사로서 과거를 주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1230년 그는 또 한 번 유배되었다 복직되는 일을 겪었고, 스스로가 얼마나 부덕한 사람인지를 통감하는 시를 남겼다.
그는 출세 지향적이었고 보신주의로 한평생을 살았다고 비판받는다. 그러나 이는 독재 정권 아래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택한 생존 방법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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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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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규보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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